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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패 사슬을 끊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4월이 지나 5월 2일 목요일. 트윈스와의 시리즈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휴식일 후 잠실 원정에 나섰던 자이언츠는 와이번스 전 2연패에 이어 30일, 5월 1일 경기를 연이어 패함으로써 4연패 수렁에 빠지고 만다.
특히 어제 경기였던 수요일 경기에서는 11회 말까지 가는 연장 혈투 속에 10대 11로 역전패를 허용하며 뼈아픈 패배로 기록되게 된다.
"안녕하십니까? 5월 2일 목요일, 잠실에서 펼쳐지는 트윈스와 자이언츠의 3차전 경기 중계를 맡은 권성호 캐스터 입니다. 해설에는 조성한 위원이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어제 경기에서 트윈스가 연장 혈투 끝에 짜릿한 역전승을 기록했어요. 양 팀 모두 불펜투수를 모두 마운드에 올린 상황에서 승리한 트윈스는 귀중한 1승을 추가하게 됐고요. 자이언츠로서는 기운이 빠지는 패배일수 밖에 없는데요. 특히나 어제의 패배로 자이언츠는 4연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트윈스는 3연승을 기록하게 됐고요. 이제 양 팀 간에 승패마진이 반 경기차로 좁혀졌습니다."
권성호 캐스터의 길었던 설명이 끝난 후 조 위원이 곧장 해설을 덧붙인다.
"자이언츠 입장으로서는 많이 아쉬운 경기였어요. 타자들은 제 역할을 잘 해줬거든요. 30일 경기 6득점, 어제 경기 10득점으로 팀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점수를 뽑아줬어요. 반면에 투수들이 대량실점을 허용하면서 경기를 너무 어렵게 풀고 나간점이 패인이 아닐까 합니다. 그건 사실 트윈스도 마찬가지거든요. 트윈스도 불펜진이 불안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는데 결국 경기 후반부에 조금 더 집중을 했던 것이 3연승이라는 결과로 이어진 거 같습니다."
조 위원은 자이언츠와 트윈스 양 팀이 비슷한 무게감의 타선을 보유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뒷심이 부족한 투수 문제를 겪고 있다는 불안 요소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실상을 살펴보면 중계석에서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문제가 자이언츠의 벤치를 잠식하고 있었다.
"경기할 맛 않나네요. 어차피 감독이 바뀌는 거면 크게 애쓰지 않아도 되잖아요. 구단 입장에서는 이번 시즌은 버리는 거 아닙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이언츠의 주전 유격수, 오진택이었다.
진택은 91년생으로서 올해 스물아홉 살이 되는 중견 선수의 입장이었다.
진택의 말에 대꾸하는 것은 베테랑 지명타자, 채중석이었다.
"잘 해봐야 소용없다니까. 지금 잘하면 한 감독이 잘해서 성적이 나오는 줄 알거 아냐. 구단에서 입장정리 확실하게 할 때까지 몸 안 다치고 경기 하면 돼!"
주전 경쟁에서 밀려버린 중석은 휴식 일에 명학과 길준에게 들었던 소문들을 동료들에게 전파하며 그간의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덕분에 선수단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나빠져 이길 수 있었던 트위스 전 두 경기를 쉽게 내주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오늘까지도 중석으로 인해 팀 분위기가 가라앉는 느낌이 들자 캡틴인 민수 입장으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중석에 비해 두 살이 어린 민수였지만, 서른다섯 살의 적지 않은 나이였고, 주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배님.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른 선수들도 잘 들어 줬으면 좋겠네요."
민수는 중석과 진택 뿐 아니라 근처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선수들까지 불러 모아 주장으로서의 생각을 전달한다.
그 중에는 타석에 오른 강호나 대기 타석에 나선 박철 같은 선수들은 빠져있었다.
"우리는 직장생활을 하는 일반 회사원이 아니라 고액 연봉을 받는 프로 선수입니다. 구단의 인사이동 문제는 우리가 관여할 수 있거나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선수는 경기를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팀이 연패 상황이고, 불펜 투수들도 많이 힘들어하는 상황인데 경기 외적인 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경기에만 집중했으면 합니다."
진심이 담긴 민수의 당부에 많은 선수들이 고개를 숙이며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반성하게 된다.
특히나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중석으로서는 뜨끔할 수밖에 없는 민수의 말이었다.
'민수 말이 맞아. 내가 이틀 전부터 괜한 소리를 해가지고 선수단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구나.'
중석은 속으로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었지만, 고참 선배로서의 체면 때문에 사과의 말을 쉽게 꺼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런 분위기에서 선수들이 경기를 편하게 할 수는 없잖아? 이런 상황에서 경기에 집중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민수야, 내 말이 완전 틀린 건 아니잖아?"
중석은 사과의 말을 대신한 변명으로 그렇게 대꾸한다.
그러자 민수는 미안해하는 중석의 마음을 눈치 채고는 웃으면서 두 번째 손가락으로 그라운드 한 방향을 가리킨다.
"저기 보세요. 중석이 형. 이런 분위기에서도 집중 잘 하는 선수가 있지 않습니까? 1군에 올라온 지 한 달밖에 안된 후배가 저렇게 이 악물고 경기하는데 선배들도 최선을 다해 줘야죠. 우리 오늘 경기만 생각합시다."
민수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트윈스 투수의 8구째를 커트해내는 강호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자세가 무너지면서까지 바깥 쪽 낮은 코스의 공을 파울로 만들어내며 끈질긴 승부를 가져가는 강호의 모습에 중석은 결국 입을 다물게 된다.
'강호나 대우같이 1군 생존 자체가 목적인 후배들도 있는데, 내가 좀 경솔하게 굴었구나. 민수 말이 맞아. 불평불만은 이쯤 해두고 한정된 기회라도 나한테 주어진 기회에 집중하도록 하자!'
중석은 '민수 네 말대로 하는 게 좋겠네'라고 말하며, 앉아있던 벤치를 떠나 화장실로 걸음을 옮긴다.
후배들에게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다.
민수 역시 중석이 악한 마음으로 선수들을 동요시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중석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 편히 웃음 지을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타석에 있는 강호는 어느새 10구째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강호를 바라보는 트윈스 선발 투수의 심정은 복잡했다.
'동양 타자들은 이게 싫어. 언제까지 커트할 생각인 거야? 경기 초반부터 꼬이네.'
트윈스의 선발 투수 허프만은 강호가 11구째마저 커트해내자 혀를 차며 속으로 탄식한다.
어느새 볼 카운트는 풀 카운트.
공 하나면 삼진을 잡을 수 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강호 역시 허프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타 한 번 때리기 힘드네. 투심 그만 던지고, 변화구 한 번만 던져라. 이렇게 커트해 내는데도 끝까지 투심으로 밀어 붙이네. 너도 참 독하다!'
강호 역시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5구째부터 11구까지 무브먼트가 극심한 투심만을 던지고 있는 허프만의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팀이 4연패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첫 타자인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는 강호였다.
'안타 하나면 되는데 이럴 거 였으면 아이템을 쓸 걸 그랬나?'
살짝 후회가 되기도 했다.
타석에 들어선 직후에 딱 한 번 뜨는 메시지를 거부한 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때가 가끔 있었다.
허프만의 집요한 투구 내용에 끈질기게 승부를 벌였음에도 출루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 바로 그러했다.
한편 포수인 유광남의 입장 또한 두 사람과 비슷했다.
'아놔. 싸인 좀 보고 던져. 허프만. 너 왜 투심만 던지는 거야? 내가 체인지업 싸인 냈잖아. 왜 내 싸인 대로 안 던지고 자꾸 이러냐고?'
광남은 이번에도 꿋꿋하게 체인지 업 싸인을 냈고, 투수인 허프만은 즉시 고개를 끄덕인 후 투심을 던진다.
'웃기지마. 체인지업이라니? 투심으로 잡을 거야!'
그것이 5구째부터 투심만 던진 허프만의 배짱이었다.
따악, 틱. 딱.
하지만 연이어 던진 세 개의 공을 타자인 강호가 모두 커트해내자 허프만의 배짱과 뚝심이 많이 약해지고 있었다.
'알았어. 체인지 업 던질게. 젠장, 이럴 거면 5구째에 광남의 싸인 대로 체인지 업 던지는 건데. 괜히 고집 부렸잖아!'
허프만은 투심을 열 개나 던지고 나서야 포수인 유광남의 싸인을 따르기로 한다.
그렇게 정해진 15구째 공이 허프만의 손을 떠난다.
그런데 그게 패착이 되고 만다.
따악!
호쾌한 타격음과 함께 강호의 배트가 허프만의 체인지업을 정확하게 때려내고 있었다.
"왓 더 헬!!"
허프만은 분노와 어이없음을 동반한 표정으로 유광남을 한 차례 째려본 후, 타구가 뻗고 있는 우중간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텅!
허프만에게는 다행히도 타구가 펜스를 넘기지는 않았지만, 펜스를 직격한 타구가 펜스 플레이에 들어간 우익수 김용희를 지나쳐 그라운드에 흐르고 있었다.
수비 커버를 위해 움직였던 중견수 임헌마저 타구 위치를 놓친 까닭에 강호의 주력을 고려한다면 3루타는 물론이고, 운이 나쁘면 그라운드 홈런으로도 기록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허프만은 외야를 굴러다니는 공과 이미 2루 베이스를 밟고 지나친 강호를 번갈아 바라보며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는다.
"오, 마이 갓!"
허프만이 절규하는 동안 강호의 발은 3루를 향하고 있었고, 타구 위치를 확인한 3루 베이스 코치가 오른팔을 풍차 돌리듯이 돌려 보이며 소리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돌아, 돌아, 돌아!!"
강호는 베이스 코치의 콜에 속도를 유지하며 3루 베이스를 밟고 지나갔다.
그 사이 공을 손에 쥔 우익수 김용희가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있는 힘껏 공을 던진다.
그 공은 2루수 손주연의 글러브로 옮겨졌고, 공을 받은 손주연은 곧장 포수인 유광남에게 공을 연결한다.
그 사이 홈까지 달리느라 꽤나 지쳐있던 강호의 슬라이딩이 홈으로 향한다.
파하핫, 타악!
강호의 슬라이딩과 유광남의 태그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주심에게로 향한다.
주심은 망설이 없는 목소리로 판정을 선언했다.
"세이프!!"
주심의 판정은 세이프였다.
그 판정에 포수 유광남이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아니, 먼저 태그했어요. 비디오, 비디오!"
광남은 자신의 태그가 먼저였다고 주장하며 비디오 판정을 요구했고, 트윈스 덕 아웃은 유광남의 요구를 받아들여 주심에게 비디오 판독을 요청한다.
잠시의 기다림 후 판독을 마치고 나온 주심은 양팔을 크게 벌리며 판정 번복은 없음을 알렸고, 강호가 때린 안타는 홈런으로 정식 기록될 수 있었다.
"와아, 강호 겁나 빠르네. 지금 봤어? 거짓말 조금 보태서 치자마자 홈에 가있네. 내가 그라운드 홈런을 직관으로 보게 되다니."
"저런 유형의 1번 타자가 우리 자이언츠에 있다니 대박이야! 그런데 그런 선수를 데리고 7등까지 떨어진 게 더 대박이야! 백강호 혼자 다하네!"
"토 달지 말고, 응원이나 해. 이 자식아. 7등이면 어떻고, 8등이면 어때? 백강호 같은 신인이 나와 줬는데. 그래도 요즘은 백강호나 권대우, 가진성 같은 신인들이 나와 주니까 팀 성적이 개판이라도 경기 보는 낙은 있어."
자이언츠 원정 팬들은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 나와 준 강호의 그라운드 홈런에 사심 없이 기뻐하면서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팀 성적에 한숨 쉬게 된다.
하지만 덕 아웃에서 강호를 반기는 선수들은 복잡한 감정을 털어낸 밝은 얼굴로 강호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아, 백강호 이거 물건이네! 나 우리 팀에서 그라운드 홈런 때린 선수 처음 봤어. 강호야, 이따가 경기 끝나고 싸인 하나 해주고 가!"
"잘 했어! 너 혼자 다 해 먹어라. 안타를 홈런으로 만들어 버리네. 나중에 내 타석 때 네 다리 좀 빌려줘. 나는 3루타라도 한 번 때려보게!"
장난기 다분한 말로 강호의 홈런을 칭찬하는 선배들이었다.
중석으로 인해 자칫 가라앉을 수 있었던 선수단의 분위기가 끈질긴 승부 끝에 그라운드 홈런을 뽑아낸 강호의 한 방으로 단 번에 고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강호 덕분에 침체되어있던 팀 분위기가 좋아지는구나. 그래고 다행이야. 어쩌면 오늘 경기에서 연패를 끊을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바로 하는 김민철 수석이었다.
김 수석 역시 선수단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소문에 대해 수석 코치인 자신이 해명을 하거나 말을 덧붙여서 논란을 가중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은 것이 수석 코치라는 자리의 고단함일 것이다.
이런 복잡한 자이언츠 선수단 내부 사정을 모르는 중계석에서는 보기 드문 강호의 그라운드 홈런에 대해서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아, 백강호 선수! 타격뿐만이 아니라 주력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보입니다! 시즌 첫 그라운드 홈런은 백강호의 이름으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이 홈런은 백강호 선수의 시즌 8번째 홈런으로 기록됩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권 캐스터의 중계에 곁에 앉은 조성한 위원도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백강호 선수, 정말 빠르네요! 타격도 좋고, 지금 홈런으로 4할대로 떨어졌던 타율이 다시 5할이 됐어요. 자이언츠 루키 중에 이런 선수가 나와 주네요."
자이언츠 출신 조성한 위원으로서는 데뷔와 동시에 대활약을 펼치는 강호의 모습이 기특하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현역시절 조성한 위원의 포지션 역시 2루수였다.
자신의 계보를 이어주는 후배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오늘 자이언츠 출발이 좋네요. 이번 시리즈 동안 타선은 이렇게 제 역할을 다해 줬거든요. 백강호 선수의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보고 자이언츠의 선배 선수들이 각성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더 이상의 연패는 좋지 않아요. 선수들이 합심해서 연패의 사슬을 끊어줘야만 해요."
중립적인 입장으로 해설을 해야 하는 해설위원의 자리였지만, 조 위원은 이 순간만큼은 자이언츠 출신의 선수로 되돌아간 느낌을 받고 있었다.
강호의 투지 넘치는 플레이 하나가 그라운드를 떠난 지 5년이 지난 조 위원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강호는 팬들과 동료 선수들, 그리고 코칭스태프뿐만 아니라 야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자이언츠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선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호의 활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