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104화 (104/335)

0104 / 0335 ----------------------------------------------

실마리를 보다

아직은 월요일이 지나지 않았다.

강호는 휴식일도 잘 보내야 한다는 손 감독의 조언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경기장에 나가 개인훈련을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형이 일을 나간 까닭에 비어있는 사직동 집에 홀로남아 나름의 여가를 보내고 있었다.

"트윈스 타자들은 내야 땅볼을 치는 확률이 높은 편이네. 인필드 타구가 외야 뜬공이 되는 것보다 내야를 바운드로 찍고, 외야로 나가는 안타가 많네. 이번 경기 수비할 때 참고하면 좋겠어."

강호는 오른손에 리포팅 자료를 들고는 왼손으로 악력기를 쥔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발끝에 베개를 대고 다리를 올린 모습이 편해 보이기는 하지만, 악력기에서 '끼익 끼익 끼익' 악력을 가하는 소음을 듣고 있으면 그가 마냥 편하게 쉬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최근 들어 밀어치는 타격을 자주 구사하다보니 투수의 공을 컨택할 때, 오른손을 떼고 배트를 왼손으로 스윙하는 상황이 잦아졌다.

그래서 휴식 일을 맞아 몸은 쉬고 있지만 왼손 근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는 강호였다.

심지어 읽고 있는 자료는 화요일부터 잠실에서 있을 트윈스와의 올 시즌 첫 시리즈를 앞두고, 트윈스 타자들의 타구성향을 분석하기위해 보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그 자세로 자료를 읽던 강호는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뒤지기 시작한다.

"투수 쪽 자료가 어디 갔지? 분명 이 근처에 놔뒀는데 이건가? 아니네. 정리를 좀 하면서 봐야겠어."

악력운동과 리프팅 자료 분석을 병행하다 보니 강호가 누워있는 침대주변은 흩어진 A4 용지로 엉망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강호는 어질러진 종이들 사이에서 자신이 찾고 있는 자료를 발견하고는 '여기 있다'라고 말하며 손을 뻗는다.

그때 A4 용지들 사이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온다.

띠 디리리 디띠

휴대폰 벨소리였다.

갑자기 울린 벨소리에 놀라면서도 종이들 사이에서 휴대폰을 찾는 강호.

잠시 후 그의 손에 휴대폰이 만져진다.

휴대폰 액정에 뜬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통화버튼을 누른다.

"문표 선배님 아니십니까? 휴식 일에 어쩐 일이세요."

전화를 건 사람은 자이언츠의 짧은 2군 시절을 함께했던 문표였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강호의 물음에 답하는 문표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백강호! 이 섭섭한 후배님아. 연락 한통이 없네. 이 선배님께서 직접 전화를 들게 만들어야 겠어? 아, 이거 대만 스프링 캠프 때 쌓았던 동료애가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였어? 내가 너무 섭섭해서 눈물이 다 나네. 내가 흘린 눈물이 낙동강까지 흘러서 낙동강 하류수위가 높아졌다던데. 뉴스 봤어? 뭐 못 봤다고? 뉴스도 좀 보고 그래. 강호 후배."

강호는 오랜만에 듣게 된 문표의 너스레에 웃음 짓게 된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자이언츠 2군 시절의 치열했던 기억들이 추억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그게 벌써 3주나 지났구나. 1군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후, 하루 빼고는 계속 선발출장을 하고 있었네. 언제 1군에 올라갈지도 모르고 2군에서 구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 참 빠르구나. 그러고 보면 문표 선배나 2군 선수들에게 연락한 적도 없었네. 반성 해야겠어.'

강호는 자신의 무신경함을 반성하게 된다.

그 마음을 담아 문표의 장난스러운 인사말에 밝은 목소리로 답한다.

"저도 뉴스 봤습니다. 낙동강 강 수위가 낮아졌다는데요. 문표 선배님도 3주 동안 제 생각 안 하신 거 같은데. 눈물을 흘리시기는 한 겁니까?"

강호의 보기 드문 너스레에 문표는 '허허'하고 웃어 보인 후 여전히 장난스런 목소리로 대답한다.

-뭐? 강 수위가 낮아졌어?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어제도 강호 후배 사진보면서 새벽 4시까지 울었는데 잘못 안거 아냐? 아니면, 내가 치성이 부족했나?

그렇게 인사말을 마무리한 문표는 전화를 건 용건을 말한다.

-다른 게 아니고, 강호 후배 사직동 살지? 내가 어쩌다보니 사직동에 볼일이 있어서 들렸거든.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

문표의 말에 강호는 선뜻 승낙의 말로 답한다.

문표의 얼굴이 보고 싶기도 했고, 그에게 들을 2군 선수들의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다.

"어디서 뵐까요?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

강호는 그렇게 답하고는 외투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잠시 후, 문표가 말했던 약속 장소에 도착하게 된 강호. 그를 향해서 문표가 반갑게 미소 지으며 다가온다.

"이게 누구야? 우리 자이언츠의 간판타자 타율왕 백강호 선생 아냐? 게다가 도루왕이기도 하지, 아마?"

큰 목소리로 자신을 반기는 문표의 행동에 강호는 주변을 살피게 된다.

"선배님. 조용히 좀 말하세요. 여기 백강호 있다고 소문낼 작정이십니까? 들어가서 말씀하시죠."

주변 시선을 의식하는 강호의 행동에 문표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한다.

"우리 강호 후배, 조용한 거 원해? 여기 조용해. 어서 들어가자고. 그리고 미리 말해 두는데 나 2군 선수야. 돈은 1군 선수인 강호 후배가 내."

자신에게 밥값을 전가하려는 문표의 행동에 강호는 웃게 된다.

자신이 사는 사직동까지 찾아준 문표에게 원래부터 식사를 대접할 생각이었지만, 속내를 숨기며 모른 채한다.

"저희 같은 운동선수들은 선배들이 밥을 사는 게 불문율 아니었습니까? 저 1군으로 올라 온지 3주밖에 안됐어요. 밥값은 내겠지만, 싼 거드세요."

강호의 말에 문표는 '어디서 나한테 수작이야?'와 같은 표정을 얼굴로 표현하며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어허! 이게 무슨 소리야? 강호 후배가 사이클링 때리고 상금으로 500만 원 받는 거 내가 딱 봤어! 두 번이나 받았잖아. 이거 내가 TV로 안 봤으면 속을 뻔 했네. 먹고 싶은 거 먹게 해줘."

두 사람은 즐거운 기분으로 재회를 나누면서 식당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문표의 말대로 식당은 칸막이가 나누어진 구조의 밀폐 형 중국식 레스토랑이어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문표는 생각보다는 저렴한 메뉴를 주문하고는 요리가 나오자 고상한 척 식사를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까 그 소식 들었어? 인사이동 얘기 말이야."

문표의 말에 식사를 하던 강호가 고개를 든다.

시선을 마주하게 된 문표의 눈동자는 더 이상 장난기가 담겨있지 않았다.

"인사이동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강호의 물음에 문표가 곧바로 대답한다.

"강호 후배는 몰랐던 거야? 지금 상동에는 코칭스태프 인사이동 소문으로 뒤숭숭한데. 아직 사직에는 소식전달이 안된 모양이네. 그냥 강호 후배는 못 들은 걸로 해."

그렇게 말한 후 다시 수저를 드는 문표에게 강호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네."

강호가 이렇게 쉽게 납득할지는 몰랐던 건지 문표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 뭐야? 궁금하지도 않아? 못들은 걸로 하란다고 진짜 그러는 사람이 어딨어? 한 번은 물어봐 줘야지. 강호 후배가 안 물어 봐주면 나만 이상해지잖아. 한 번 물어봐줘라."

애교스럽게 말하는 문표의 말에 강호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궁금하지 않습니다. 소문이라면서요? 소문이 사실이면 곧 알게 되겠죠. 뭐 하러 미리 궁금해 해서 에너지를 낭비하겠습니까? 식사는 좀 어떠세요? 입맛에 맞으십니까?"

강호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화제를 전환한다.

그러자 애가 타는 것은 문표였다.

"내가 강호 후배가 궁금해 하면 말 안하려고 했는데, 안 궁금해 하니까 말해주는 거야.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비밀로 해야 돼."

"아니, 안 궁금하다니까요."

"됐어. 내가 말할 거야. 귀에 때려 넣어!"

문표는 굳이 알고 싶지 않다는 강호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하나의 사실을 전한다.

"한 감독이 곧 경질될 거라는 소문이 있어."

심각한 어조로 말하는 문표의 말에 강호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직 시즌 초반인데 구단에서 감독을 교체한다는 겁니까?"

강호가 되물었다.

시즌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는 현 시점에서 감독경질은 곧 교체를 의미한다.

강호의 놀란 목소리에 만족한 문표가 입 꼬리를 비틀며 대답했다.

"확정된 건 아닌데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거지. 며칠 전에 구단 사장이 상동에 다녀갔었어. 그런데 방문시간이 밤 11시란 말이야. 이상하지 않아? 왜 구단 사장이 2군 감독을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찾아왔을까?"

문표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강호 쪽으로 숙여 보인다.

이곳은 두 사람밖에 없는 장소였지만, 은밀한 비밀을 전파하는 상황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싶은 문표였다.

그런 문표의 행동에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말의 내용에는 집중하게 된다.

"사실 구단이 손 감독님께 1군 감독직을 권유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란 말이야. 내가 아는 것만 다섯 번이 넘어. 그 때마다 손 감독님은 총사령탑 자리를 마다하면서 2군에 남으셨어.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것 같아. 구단 사장하고 밤늦게 회동을 가질 정도면 뭔가 있다는 얘기잖아. 강호 후배, 이제 감이 좀 오지 않아?"

사실을 나열하며 물어오는 문표의 질문에 강호는 미간을 좁히게 된다.

문표의 예측은 가능성이 없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확신하기에는 전제가 부족해 보인다.

"지나친 비약 아닙니까? 그 정도만으로 1군 감독이 교체될 거라는 생각은 일러 보이네요."

"비약? 비약일 수도 있어. 단지 그 것뿐 만이라면 말이야."

문표는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자신의 양 손바닥을 비벼 보인다.

강호의 반응이 무척이나 기대된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강호는 문표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았다. 또 다시 자신을 낚아보려는 문표의 행동에 다시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한다.

"아~쫌! 재미없게 자꾸 이러기야? 알았어. 내가 그냥 다 말해줄게."

문표는 결국 '강호 낚기'를 포기하고 설명을 이어나간다.

"구단 사장이 다녀간 후로 손 감독님의 선수 운용에 변화가 생겼어."

손 감독에 대해 말하는 문표로 인해 관심이 다시 솟아난다.

"변화요? 어떤 변화요?"

"서두른다고 해야 되나? 왠지 감이 올라온 2군 선수들을 추려내는 느낌이 들어. 코칭스태프에 대한 관리를 하시는 모습도 있었고, 조만간 1군 감독 자리로 이동하실 것처럼 말이야."

이어진 문표의 말은 장난이나 뜬소문으로 치부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강호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문표 선배의 말이 사실이라면 손 감독님이 곧 1군 감독으로 오실 준비를 하고 있는 뜻이 돼. 손 감독님이 총 사령탑이 되시면 나로서는 환영할 일이지만, 그게 과연 뜻대로 쉽게 될까?'

강호는 쉽지 않다고 보았다.

시즌 중에 감독을 교체하는 일은 구단으로서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4월이었다.

개막전 경기가 4월 2일에 열렸으니 아직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셈이다.

이런 시기에 감독을 교체한다면 야구장 안팎으로 많은 말들과 뜬소문들이 생겨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손 감독님께서 요즘 나한테도 공을 많이 들이시고 있어. 요즘은 2군 경기에서 지명타자가 아니라 1루수로 출장하고 있어. 내가 1군에 올라갈 수 있도록 포지션 분배를 해주시려는 거야. 알겠어? 상동에서는 요즘 타격감이 좋은 선수들을 추려서 포지션을 배정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모두 손 감독님의 주도하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문표가 자세한 설명을 더한다.

그 후로도 식사가 끝날 때까지 문표의 말은 이어진다.

문표를 만나러 나올 때는 그의 2군 생활이나 다른 2군 선수들에 대한 소식을 들을 거란 생각으로 집을 나섰던 강호.

그런데 막상 문표를 만난 자리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사실들과 그로 인한 추측들, 그리고 상동에서부터 시작된 소문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그냥 소문이 아니라 손 감독님이 1군으로 올라오시는 건가? 그게 정말인 걸까?'

강호는 문표가 말해 준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된다.

혹시나 하는 마음과 소문이 사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그로 인해 구단이나 팀이 겪게 될 진통들을 걱정하며 복잡한 마음이 들게 된다.

하지만 곧 강호의 입술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과거 사직 구장 근처에서 손 감독이 자신에게 해줬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자이언츠가 우승권을 놓고 다투는 강팀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키 플레이어가 필요하다. 나는 말이다.'

그 때 손 감독은 자신에게 말했었다.

항상 중하위권에만 머물고 있는 자이언츠를 강하게 만들고 싶다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강력한 키 플레이어가 필요하다고.

강호는 그 때 손 감독이 건넸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 키 플레이어를 강호, 너로 정했다."

그 때 손 감독의 말.

그것은 커다란 울림이 느껴지는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강호는 문표가 전해준 소문이 사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으며 손 감독에게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전한다.

'1군 사령탑으로 오십시오. 더 나아진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손 감독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