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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마리를 보다
와이번스와의 시리즈 마지막 경기.
시간은 이미 오후 8시를 지나 경기는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5회 말, 홈 팀인 자이언츠의 공격 상황.
선두 타자로 나선 9번 타자 김중호가 내야 뜬공으로 물러난 후 두 번째 타자로 타석에 선 선수를 확인한 중계석의 배 캐스터가 가지고 있던 자료를 읽으며 중계를 이어나간다.
"5대 1. 와이번스가 4점을 앞선 가운데 주자 없는 1사 상황에서 백강호 선수가 타석에 섭니다. 백강호 선수 오늘은 2타석 동안 안타 없이 볼넷 하나로 출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율은 5할 2푼 3리로 여전히 5할 대를 유지하고 있어요."
배 캐스터의 말에 안경훈 위원이 헛웃음을 짓는다.
사직에서 맞붙은 두 팀간의 시리즈를 쭉 진행하면서도 5할이라는 강호의 타율만큼은 적응이 되지 않는 안 위원이었다.
"들을 때마다 새롭네요. 5할이라는 타율이 백강호 선수가 규정 타석을 채우고, 정식으로 인정받고 있는 기록이잖아요. 오늘이 28일인가요? 백강호 선수가 정확하게 20일 동안 5할 대의 타율을 유지하고 있네요. 대단합니다. 테인즈나 이재훈 선수, 또 최현 선수 같은 2위권 그룹과 1할이 넘는 차이가 있는 상태네요. 뭐 언젠가는 내려갈 타율이기는 하지만, 백강호 선수의 데뷔전 후 상승세가 무섭습니다."
안 위원은 강호의 5할대 타율을 언젠가는 내려갈 타율이라고 평가했다.
tv로 중계를 지켜보는 야구팬들, 특히 자이언츠 팬들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안 위원의 평가가 듣기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자이언츠 팬들은 안 위원의 해설에 '에잉, 그걸 누가 몰라'라고 궁시렁거리며 타석에 선 강호가 안 위원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 안타를 때려내주기를 기대한다.
한편 타석에 선 강호는 방금 전, 정호종 타격코치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떠올리며 상대 투수에 대한 공략 전략을 세운다.
"강호야, 임진혁의 포심 구위가 좋으니까 포심보다는 변화구를 공략하도록 해. 최대한 투구 수를 늘려주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타석에 들어서려는 강호를 붙잡고 정 코치는 지시사항을 전한다.
그것은 지시라기보다는 당부나 부탁에 가까웠다.
상대 선발인 임진혁이 워낙 잘 던지고 있어서 강호가 돌파구를 마련해주기를 바라는 바람과도 같았다.
'포심 구위가 좋으니까 변화구를 공략하라니. 이렇게 심플한 타격조언이 또 있을까?'
강호는 정 코치의 조언을 떠올리며 미소짓게 된다.
잘 던지고 있는 상대 투수를 공략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말 같으면서도 납득이 되기도 한다.
투수들에게는 때로는 긁히는 날이라고, 제구력과 구위가 평소와는 월등히 좋은 날이 있다.
와이번스 선발 투수 임진혁이 오늘 긁히는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강호 본인이 볼넷으로 출루해 도루 후, 전준오의 적시타로 득점을 기록한 것이 오늘 임진혁에게 뺏어낸 점수의 전부였다.
전준오에게 내준 하나의 안타가 오늘 임진혁에게 때려낸 유일한 안타인 상태다.
정 코치의 바람대로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백강호 타자 타석에 들어선 후, 초구를 지켜봅니다. 초구는 스트라이크. 아! 지금 공은 152km가 찍혔네요. 임진혁 투수. 5회 말에도 구속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중계석에서 배 캐스터가 임진혁의 강속구에 대해 말을 꺼낸다.
그러자 곁에 있던 안 위원이 임진혁 투수의 투구 수를 확인하며 해설의 말을 꺼낸다.
"임진혁 선수 84년생이니까 올해로 36살이거든요. 다른 선수 같았으면 전성기가 지날 나이인데 체력이 대단합니다. 투구 수가 아직 59개니까 이대로라면 7이닝까지는 책임질 수 있는 기세에요. 자이언츠 입장에서는 백강호 선수가 임진혁 투수를 공략해내기를 기대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 시점에서 백강호 선수가 공략이 어렵다면 임진혁 투수는 8회까지도 마운드에 오를 수 있어요."
안 위원은 임진혁 투수의 오늘 투구를 상당히 고평가하고 있었다.
자이언츠에서 가장 정교한 타격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강호마저 범타로 물러나게 된다면, 오늘 승기는 와이번스가 가져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티익.
"파울입니다. 백강호 선수가 노 볼 2스트라이크의 불리한 볼 카운트로 몰리게 됩니다."
배 캐스터가 상황을 알리는 중계의 말을 한 후, 안 위원이 곧장 해설의 말을 더한다.
"임진혁 투수, 3구째는 유인구를 가져갈 필요가 있어요. 백강호 타자에게 삼구 삼진을 노리는 건 조금 위험한 결정이거든요. 체인지업이나 커브 같은 느린공을 던지는 게 어떨까 싶네요."
안 위원의 말대로 포수의 싸인을 받은 임진혁 투수가 느린 변화구를 던진다.
임진혁의 3구째는 몸 쪽을 파고드는 체인지업이었다.
가만히 놔둬도 볼이 될 코스였지만, 강호는 순간 오픈 스탠스로 자세를 바꾸며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걷어낸다.
따악.
정타를 때려낼 때의 타격음이 타석을 가득 채운다.
그 후 빠르게 뻗어져 나간 타구가 1루수를 스쳐 지나며 파울라인을 타고 흐른다.
처음에는 파울인 줄 알았던 배 캐스터는 3루심의 인필드 선언이 있은 후 곧바로 목소리를 높인다.
"페어! 타구가 파울라인을 타고 흐릅니다. 백강호 타자 빠르게 1루를 돌아 2루로 향합니다! 좌익수 김재영이 2루를 향해 공을 던지지만, 백강호 타자의 발이 빨랐습니다. 백강호 선수 선 채로 2루 베이스를 밟습니다!"
배 캐스터의 빠른 중계로 강호의 2루타가 시청자들에게 전달된다.
자이언츠 팬들은 와이번스 선발 임진혁에게 타선이 봉쇄당한 답답한 상황에서 나와 준 강호의 안타에 박수를 치며 환호를 내지른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나는 백강호가 안타 칠 줄 알았어!"
"이제 안타 하나만 치면 1점 따라 붙겠네. 그래, 한 점만 더 따라붙자. 5회부터 한 점씩 내서 역전가는 거야!"
자이언츠 팬들은 후속 타자들이 적시타를 때려 강호가 홈을 밟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무참히 깨어진다.
강호 다음으로 타석에 선 타자들이 연달아 범타로 물러나며 강호의 2루타는 잔루가 기록되게 된다.
"아...오늘은 못 이기겠다. 타선이 너무 힘을 못 쓰네. 백강호 혼자 출루하면 뭐해? 중심 타선이 제 몫을 못하는데."
"타선만 문제야? 투수 쪽은 어떻고. 윤명호가 2회에 개 털리니까 뭐 게임이 제대로 되겠어? 오늘 경기는 글러 먹었어. 이렇게 질 거면 2군 투수들이나 시험해 보던가. 한동현 감독, 이 사람은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tv로 중계를 보는 자이언츠 팬들의 맹비난을 받고 있는 한동현 감독.
그 역시 강호를 제외하고는 답이 없는 답답한 타선과 그것보다 더 답이 없는 투수조를 보고 한숨을 내쉬게 된다.
'아, 오늘은 지겠네.'
한 감독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런 날은 신인 급 선수들을 그라운드에 올리며 테스트를 해보는 것도 좋겠지만, 심사가 뒤틀린 한 감독에게는 그 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 한 감독의 무기력한 경기 운영 속에 와이번스와의 시리즈 마지막 경기는 7대 1로 자이언츠가 완패를 기록하게 된다.
이로써 와이번스에게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며 자이언츠의 승패는 11승 13패. 와이번스와 동률이 되어 공동 6위로 내려앉게 된다.
7위에 있던 이글스가 어부지리로 5위로 올라가게 되어 시즌 초반부터 중위권 싸움은 혼전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리고 시간은 하루가 지나 모든 선수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선수들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휴식일이 된 것이다.
자이언츠 선수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휴식하며 여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 중 일부 선수들은 선수들끼리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오오, 중석이. 안 보던 사이에 살이 떠 찐 것 같은데? 이제 150kg 정도 나가는 거 아냐?"
자이언츠의 지명타자 채중석은 며칠 만에 듣게 된 팀 동료의 목소리에 반가움을 표한다.
"살 얘기는 좀 하지 말라니까. 그러는 명학이 너는 2군 내려가더니 어떻게 얼굴이 더 좋아졌어? 길준이도 그렇고."
중석은 며칠 만에 다시 만난 손명학과 윤길준의 얼굴을 보며 너스레를 떤다.
손명학과 윤길준은 자이언츠 마무리와 셋업투수라는 중요한 보직에 있던 베테랑 불펜 투수들이지만, 지금은 2군에 내려가 2군 경기에 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석은 자이언츠의 지명타자로써 주로5번이나 6번 타순에서 타선의 무게감을 더하는 역할을 맡았었지만, 지금은 한 감독의 라인업 변경으로 인해 가끔 대타로 타석에 서는
것 빼고는 선발라인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중석은 83년생이지만, 빠른 년생이라서 82년생인 손명학과 친구간 이었고, 같은 83년생인
윤길준과는 선후배 관계에 있었다.
빠른 년생인 채중석으로 인해 족보가 꼬일까봐 세 사람이 자리를 함께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휴식 일을 맞아 2군에 내려간 두 투수들을 불러낸 것은 중석이었다.
점심식사를 함께하며 웃음 짓던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중석이 꺼낸 주제에 표정을 바꾸게 된다.
"한 감독 말이야. 요즘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나야 아직1군에 이름이라도 올리고 있어도,
명학이 너나 길준이를 2군으로 내린 건 너무 심하잖아. 아무리 최근성적이 별로였어도 클라스라는 게 있지. 너희들이 2군으로 내려가니까 팀 성적이 더 안 좋아 졌다니까. 참 나~"
중석은 명학과 길준의 2군행을 걸고넘어지며 한 감독을 비난했다.
명학은 중석의 말에 의외로 웃으며 대답한다.
"나는 괜찮아. 오랜만에 2군 오니까 좋더라. 2군에서 내 공 칠 수 있는 애들 별로 없더라. 던졌다 하면 죄다 삼진이라니까. 그리고 2군에는 한 감독도 없잖아. 출전수당이 좀 덜나와서 문제지 마음은 편해."
명학의 말에 곁에 앉은 길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역시도 차라리 2군에 내려와 있는 게 잘된 일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2군에서는 연투할 일도 없고, 손 감독님이 체력 안배나 구위 관리도 해주시니까요. 요즘은 심리상담사 불러서 선수들 트라우마나 심리치료도 하게 해주신다니까요. 당분간 이렇게 2군에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뭐 저희가 계속 2군에만 있을 것도 아니잖아요."
길준까지 그렇게 말하자 중석이 눈썹을 씰룩인다.
중석에 원래 목적은 2군에 내려간 두 사람과 한 감독에 대한 험담을 나누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당사자인 두 사람이 이렇게 나오자 중석으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어진다.
중석은 '쳇'하고 혀를 차며 불만스럽게 말한다.
"그렇게 좋으면 나도 다 포기하고 2군으로 내려갈까? 어차피 한 감독 체제 안에서는 1군에 내 자리도 없을것 같은데. 나도 그 심리상담 이라는 거 한번 받아보자."
중석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반쯤은 진심이 담긴 농담으로 두 사람에게 말한다.
그러자 명학이 '하하하' 하고 웃으며 중석에게 대답했다.
"중석이 너는 1군에서 버티고 있어봐. 조만간 팀 내부에 인사이동이 있을 것 같으니까."
명학의 말에 중석이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인사이동이라니?"
중석의 질문에 명학을 대신해서 길준이 대답한다.
"며칠 전에 구단사장이 상동을 찿아 왔었습니다. 밤늦게요. 손 감독님을 은밀히 만나고 갔다는데, 이게 코칭스테프 인사이동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길준의 말에 명학이 추가설명을 더한다.
"뭐 확실한 건 아니고,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는 거지 뭐. 우리 자이언츠에 손 감독님 같은분이 계시는데 언제까지 한동현 감독을 총 사령탑으로 두겠어? 이번에 부임한 구단사장도 바보는 아닐 테니까 답도 없는 한 감독을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손 감독님을 찾아온 거 아니겠어?"
확실한 건 아니라면서 꽤나 자세한 말을 하고 있는 명학이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으니 왠지 손성조 2군 감독과 지정만 사장이 비밀스럽게 회동을 가진 것이 한 감독의 경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 구단 사장이나 이상현 단장이 손 감독님을 사령탑으로 올리려고 한다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특히 이상현 단장은 한 감독하고 선후배 사이잖아. 이 단장이 가만있겠어?"
중석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답한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한 감독이 경질되고, 손성조 2군 감독이 총 사령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겨난다.
'그래. 손 감독님이 1군 감독이 되시면 납득이 가지 않는 라인업도 없을 거고, 선수혹사도 없을 거고, 컨디션 관리도 잘 해주실 거야. 팀 성적도 지금처럼 이 모양은 아닐 거 아냐?'
중석은 손 감독이 1군 감독이 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이런 세 사람의 대화는 단지 이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선수단 사이에서 조금씩 비밀스럽게 그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4월 29일 월요일, 휴식 일부터 제기된 하나의 가능성은 선수단의 바람을 담아 조금씩 퍼져 나간다.
하지만 아직은 실체가 보이지 않는 풍문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