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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마리를 보다
하루가 지나고,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오전 일찍 경기장에 출근한 강호는 역시나 일찍부터 나와 준비 운동을 하고 있던 1루수 김상훈과 마주하게 된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강호, 왔어? 준비 운동 끝나고 바로 시작하자."
"네."
상훈은 강호가 건넨 인사를 받으며 밝게 웃어보였다.
어제 강호와 함께 좋은 수비를 만들며 타격에서는 1안타, 2출루, 1득점을 기록한 상훈이다.
타순이 7번으로 밀리기는 했지만, 라인업에서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상훈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강호야, 우리 같은 프로 선수들은 말이야. 한 시즌 반짝하는 것보다 일정한 성적을 꾸준히 냈을 때 인정받을 수가 있는 거야. 프로 선수의 커리어 하이는 현재 진행 중일 때가 가장 멋있는 거잖아."
준비 운동을 하던 상훈이 강호에게 말한다.
항상 장난스러운 상훈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일 대 일 훈련을 하면서 몰랐던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
누구보다 일찍 경기장에 나와 개인훈련에 전념하는 상훈은 최고의 선수로 기록되는 것보다 오랜 시간 동안 팬들과 호흡할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자신의 바람을 전했다.
'상훈 선배 같은 사람이야말로 프로 선수로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일 거야. 저런 마음가짐을 배워두도록 하자.'
강호는 상훈과 훈련을 하면서 야구를 바라보는 그의 가치관이나 태도 등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상훈과 같은 시선으로 야구를 해나간다면 단지 경쟁에서 이기는 것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날이 다가왔을 때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는 않아. 후회는 여태껏 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강호는 과거를 떠올려보며 미래를 준비해 나간다.
그것을 위해 지금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잠깐의 준비 운동을 끝낸 강호는 끌어 오르는 열기를 다스리기 위해 상훈에게 훈련을 재촉한다.
"준비 다 끝났습니다. 시작하시죠."
"그래, 오늘은 유격수 위치에서 시작하다가 중견수 정도에서 마무리하자."
"네."
상훈의 훈련 계획에 고개를 끄덕인 강호가 발걸음을 떼려할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선배님!"
이제 막 훈련을 시작하려 했던 두 사람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는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익숙한 사람을 확인하게 된다.
"대우 네가 웬일이야? 훈련 스케쥴 바꿨어? 너 원래 이 시간까지 웨이트 하지 않았어?"
상훈이 지척까지 다가온 대우에게 인사를 대신해 질문을 던진다.
대우는 그런 상훈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양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들어올린다.
"이거 드리려고 잠시 나갔다 왔습니다. 커피 한 잔씩 하시죠. 선배님들."
대우의 말에 상훈과 강호의 시선이 그가 들어 올린 일회용 커피 잔으로 향한다.
그란데 사이즈 컵의 상표를 확인한 강호의 시선이 다시 대우의 얼굴을 향해 옮겨진다.
그러자 대우가 씨익하고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스타벅습니다. 제가 없는 용돈 털어서 사온 거예요. 두 분 다 쓴 거 안 좋아하실 것 같아서 카라멜 마끼아또로 사왔는데 괜찮으시죠?"
대우의 말에 상훈은 '응, 나는 단 거 좋아해'하며 대우가 내민 커피를 받아들었고, 강호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나는 카페인 안 먹는다."
강호의 말에 대우는 '네?'하고 되묻게 된다.
그런 대우의 되물음에 강호는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 커피 안 마신다고. 카페인 때문에 안 마셔."
"아니 그래도 어렵게 사온 건데 말입니다. 어제 선배님 덕분에 승리 투수 되서 한턱 쏘려고 했더니 '밥은 집에 가서 먹을게'라고 하셔서 식사 대접도 못했잖습니까? 대신 이렇게 커피 사온 겁니다."
대우는 강호의 무뚝뚝한 말을 성대모사하며 항변하고 있었다.
어제 경기에서 강호의 투런포 덕분에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던 대우는 술을 마시지 않는 강호에게 식사라도 대접하려 했지만, 강호는 그 제안을 마다했었다.
그래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가 있는 브랜드의 커피를 사온 것인데 강호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승리투수를 만들어준 보답을 하기 어렵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대우가 가엽게 느껴졌는지 자신의 커피를 마시며 '아뜨뜨!'하고 입을 댄 상훈이 부르튼 입술을 식히며 강호에게 말한다.
"그래도 사온 정성이 있는데 입이라도 대봐. 겁내 뜨겁고 좋네."
선배인 상훈의 말에 강호는 '흐음'이라고 생각하는 시늉을 해본다.
그리고는 한 쪽 눈썹을 씰룩이며 대우를 향해 제안한다.
"그럼 커피는 마시겠는데 그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저기 구단 자판기에 맥스웰 커피 뽑아 온나. 커피는 맥스웰이지."
"네에?"
난데없이 자판기 커피를 뽑아오라는 강호의 말에 대우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자 강호가 재차 입을 연다.
"맥스웰 뽑아오라고. 그걸로 퉁치자."
"진짭니까? 나중에 후회마지 마시고, 그냥 오늘 경기 끝나고 식사라도 함께 하시죠."
"됐다고. 맥스웰이나 뽑아와."
"네, 알겠습니다."
대우는 캔 커피면 된다는 강호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장내 자판기가 있는 곳을 향해 뛰어간다.
그러다가 들고 있던 스타벅스 커피가 손에 쏟아졌는지 '아, 뜨거. 더럽게 뜨겁네'라고 말하며 그라운드에서 사라진다.
"선배님. 저희는 먼저 훈련하고 있죠."
"응? 왜? 대우가 사오는 커피 마시고 하지."
"아마 커피 못 사올 겁니다."
강호는 상훈의 질문에 피식 웃음 지으며 유격수 위치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수비 훈련.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온 대우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든다.
"선배님! 자판기에 레츠비밖에 없는데요?! 레츠비 뽑아오면 안 됩니까?!"
멀찌감치서 소리치며 묻고 있는 대우의 말에 상훈이 '푸핫'하고 웃게 된다.
강호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대우에게 재차 말한다.
"맥스웰 사오라고! 근처에 편의점 있잖아!"
"아, 정말 까다로우시네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만하면 포기할 만도 한데 대우는 진짜로 근처 편의점으로 뛰어갈 기세였다.
강호는 장난은 그만하기로 하고 밖으로 뛰어가는 대우의 등에 대고 소리친다.
"시원한 걸로 사와라!"
"아 씨!"
장난인 듯 장난이 아닌 것 같은 강호의 목소리에 결국 대우가 분통을 터뜨린다.
그렇게 대우도 강호와 상훈의 개인 훈련에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었다.
잠시 후, 비어있는 덕 아웃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캔 커피를 마시게 된 세 사람.
문득 상훈이 대우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대우 너 안 힘들어? 어제까지 4연투잖아. 투수가 4연투 정도 던지면 골골거려야 하는데 의외로 멀쩡하네?"
상훈의 물음에 캔 커피를 마시다 말고 대우가 대답을 위해 입을 연다.
"왜 안 힘들겠습니까? 어제는 직구 구속이 140도 안 나오던데요. 오늘 아침에는 오른손이 안 올라가서 양치질을 왼손으로 했다니까요. 감독님이 오늘도 저를 마운드에 올리시면 내일은 양치 대신에 가그린을 해야 할 판입니다."
진지한 상훈의 질문에 농담을 섞어 대답하는 대우의 말에 웃음 지으면서도 강호는 걱정이 된다.
상훈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를 향해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설마, 오늘도 올리겠어? 그럼 5연투인데?"
상훈의 질문에 대한 답은 대우가 아닌 강호가 대신한다.
"모르는 거죠. 명학 선배와 길준 선배를 2군으로 내린 마당에 홍성빈 선배도 어제경기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까? 대우나 박상현 선배님이 아니면 불펜에서 믿을만한 투수도 없어 보이니까 오늘도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박빙 상황이 벌어지면 또 대우를 올리겠지요."
진지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강호의 말은 진심이었다.
선수 혹사를 우습게 여기는 한동현 감독이라면 대우의 5연투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그 생각은 경기가 시작된 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지금 자이언츠 불펜에서 권대우 투수가 나오는데요? 오늘까지 등판하면 권대우 투수는 5연투가 됩니다."
중계석의 배 캐스터는 마운드로 향하는 대우의 모습에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현재 상황은 6회 초, 자이언츠가 6대5 한 점 차로 앞서고 있는 상황.
아무리 투수가 없는 자이언츠이지만, 아직 스무 살 투수인 대우에게 너무 과한 짐을 맡기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되었다.
안경훈 위원은 그런 의도를 담아 입을 연다.
"자이언츠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위험한 투수 기용이 아닌가 하네요. 권대우 투수 어제 구속이 140이 안 나왔었거든요. 구위도 상당히 떨어진 모습이었는데 오늘 경기까지 올리면 권대우 투수에게 무리일 수 있어요. 아직 스무 살이거든요. 가능성이 보이는 어린 선수를 보호해줘야 할 필요가 있어요."
안 위원은 불펜진이 무너진 자이언츠의 입장을 이해하기는 해도 또 다시 어린 선수에게 부담을 주는 한동현 감독의 투수 기용을 탓하게 된다.
현역 시절에 자질이 좋은 투수들이 혹사로 인해 마운드를 떠난 경우를 꽤나 봐왔던 안 위원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마운드로 오르는 어린 투수가 선배들의 쓰라린 전처를 밟을까봐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아! 박정건 때립니다! 타구는 2루수 방면으로! 잡습니다! 백강호 선수가 박정건 타자의 강한 타구를 라인드라이브로 잡아냅니다! 두 명의 주자는 모두 묶이고, 이제 아웃카운트는 2개로 올라갑니다!"
배 캐스터는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강호의 호수비에 목청을 높였다.
구위가 떨어져 어려운 승부를 펼쳐나가던 대우의 공을 정타로 때려낸 박정건의 타구가 강호의 호수비에 막히고 만 것이다.
배 캐스터의 곁에서 강호의 수비를 보게 된 안 위원이 특유의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한다.
"지금 백강호 2루수의 수비는 팀의 역전 실점을 막아내는 수비에요. 안타가 됐으면 2, 3루에 있던 주자가 모두 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코스였거든요. 반면에 박정건 선수로서는 아깝게 됐어요. 잘 맞은 타구가 아웃이 되면서 침체된 타격감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가 다음 타석으로 미루어지네요."
안 위원의 해설 속에 와이번스의 다음 타자가 타석에 올랐다.
와이번스 덕 아웃은 지금의 순간을 승부처로 본 것인지 원래 타자였던 김경민을 대신해 대타 이진석을 기용한다.
손목 부상으로 라인업에서 빠진 이진석을 대타로 냄으로써 나름의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그리고 와이번스 팬들은 이진석이 대우의 3구째를 받아쳤을 때 와이번스의 승부수가 성공하는 줄 알았다.
"아아..."
"와, 저걸 잡아버리네."
그러나 이진석의 잘 맞은 타구가 우익수 유성철의 호수비에 잡혀버리면서 와이번스 팬들의 기대는 탄식으로 바뀐다.
"휴우."
타구가 잡히는 것을 확인한 대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운드를 내려간다.
어렵게나마 이닝을 종료하고, 덕 아웃으로 걸음을 옮기는 대우.
그런 대우의 표정을 확인한 안 위원이 재차 입을 연다.
"다음 이닝에는 투수를 바꿔줘야 해요. 권대우 투수의 얼굴이 많이 지쳐 보이거든요. 볼 끝도 좋아보이지는 않아요. 호수비에 막혀서 그렇지 와이번스 타자들이 때려낸 타구의 질이 좋았어요. 7회에도 권대우 투수를 마운드에 올리는 것은 자이언츠 입장으로서는 자충수가 될 수 있어요."
안 위원은 그렇게 6회 초 해설을 마무리한다.
그의 주장대로 한 감독은 7회 초에는 대우를 내리고, 좌완인 심규민을 올렸지만 와이번스의 1번 타자인 가메스에게 투런 홈런을 내주고는 역전을 허용하고 만다.
6대 5로 앞서던 스코어가 7대 6으로 역전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점수는 9회 말까지 이어지며 자이언츠의 역전패로 경기가 끝나게 된다.
"아이고, 요즘 경기 끝나면 왜 이렇게 힘들죠?"
"내 말이 그렇다니까. 경기까지 지니까 더 힘든 것 같아."
"선배님들 나이가 있으셔서 그런 거 아닙니까?"
"아놔, 그러는 후배님도 올해 서른 다섯 아뇨? 나이 소리는 강호나 대우같은 이십대 후배들이 해야지."
"저희는 빼주십시오. 선배님."
"강호 왜 그래? 우리가 나이 먹은 게 창피하기라도 한 거야?"
경기를 끝내고 경기장을 나서는 선수들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시리즈마다 계속되는 접전 상황에 기력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 것이다.
한 편, 장소는 경기장에서 구단 본부 사장실로 옮겨진다.
삐익.
밤늦은 시간까지 팀의 경기를 지켜보던 지정만 사장은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러 TV를 꺼버린다.
그런 그의 표정은 꽤나 불편하게 느껴졌다.
보고할 것이 있어 사장실로 들어서던 허동준 기획실장은 단번에 좋지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는 걸음을 멈칫하게 된다.
'아 놔, 오늘 경기도 졌나보네. 조금 있다 올 걸. 그나저나 오늘은 토요일인데 왜 댁에 안 가시는 거야? 덕분에 나까지 집에 못가고 있잖아.'
허 실장은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할 생각에 보고를 서둘렀던 자신을 탓하게 된다.
토요일에 출근한 것도 억울한데 밤 10시가 넘어서도 퇴근을 못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속으로 한탄하게 된다.
"뭐야? 알아오라는 거 가져 온 거야?"
가시가 돋혀 있는 지 사장의 목소리에 허 실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로 다가간다.
"한동준 감독에 대한 자료를 보고서로 가지고 왔습니다."
"이리 내."
지 사장은 허 실장의 손에서 보고서를 받아들고는 내용을 살핀다.
그리고는 마지막 결론에서 미간을 찌푸리고는 허 실장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이게 진짜야? 증인이나 증거 확보할 수 있는 내용이야?"
지 사장의 물음에 허 실장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확보가 가능할 것도 같은데 시간은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이 단장이 모레면 복귀하지 않습니까? 그 전까지는 힘들 것 같습니다."
허 실장은 솔직하게 보고했다.
내일은 일요일이어서 기획실 직원들을 강제로 출근시키기에는 눈치가 보인다.
아무리 기획실의 수장인 허 실장이지만, 본인도 질색인 휴일 근무를 직원들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한 말인데 지 사장의 표정은 의외로 평온하다.
"좋아. 허 실장은 퇴근하도록 해.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알아볼 테니까 말이야."
"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 사장의 말에 허 실장은 혹시라도 지 사장이 자신의 말을 번복할까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장실을 나선다.
홀로 남은 지 사장은 허 실장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품속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든다.
"여보세요. 나 지정만이요. 부탁할 일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한동안 사장실에 홀로 남은 지 사장의 통화는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