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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을 치르다
오랜만에 1군 무대에 등판한 지터가 3이닝 무실점으로 호투를 펼친 후 6회 초가 시작되었다.
다음 차례로 나선 사준식 투수의 준비 시간이 길어서인지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1사 만루 상황에서 교체되고 만다.
그리고 그 때부터 자이언츠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따악!
타구가 배트에 맞자마자 장타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만드는 와이번스 4번 타자 정의준의 타구가 멀리 뻗어져 나간다.
타구가 펜스를 넘겨버리자 중계석에서 큰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아! 홈런입니다! 정의준도 넘깁니다! 황제인의 그랜드슬램에 정의준이 똑같이 되갚아 줍니다! 이런 경기가 다 있네요! 이제 8대 8 상황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정의준의 타구가 만루 홈런이라는 것을 알리는 배 캐스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경기를 지켜보는 와이번스 팬들은 전율을, 자이언츠 팬들은 씁쓸함을 맛보게 된다.
5회 말, 황제인이 때려냈던 만루 홈런을 무위로 돌리는 데는 정의준의 한 방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와아, 내가 설마설마했다. 진짜. 저게 뭐하는 짓이야? 한동현 감독! 당장 투수교체 안 하나?"
"이렇게 중요할 때, 2군 투수를 올리면 어쩌자는 거야? 표성태가 뭐하는 놈인데 만루 상황에 올려가지고 만루 홈런을 얻어맞는 거야?!"
자이언츠 홈 팬들의 성난 목소리가 정의준이 때린 그랜드 슬램의 후폭풍이 되어 몰려든다.
표성태 투수의 2군 성적을 믿고 마운드에 올렸던 한동현 감독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된다.
"여 코치. 투수 바꾸세요. 권대우를 올리도록 하세요."
한 감독의 투수 교체 지시에 여민석 투수 코치는 멈칫했다.
대우를 올리게 되면 오늘로써 4연투가 된다.
'대우는 벌써 3연투를 했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네'하는 말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준식과 표성태를 올리자고 주장했던 것이 여 코치 본인이기 때문이다.
2군에서 올라온 지터의 성공에 고무되어 2군 투수들을 대거 기용한 결정이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권유한 여 코치의 입장으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성태다.
조용히 인터폰을 들어 불펜 코치에게 한 감독의 지시를 전달한다.
"권대우 투수 준비하라고 하세요."
인터폰의 수화기에 대고 말하고 있는 여 코치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리고 힘이 없는 것은 만루 홈런을 얻어맞은 당사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아...."
양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 있는 선수는 투수인 표성태였다.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버린 모습이 안타까울 정도다.
그 모습을 바로 뒤에서 지켜본 강호 역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성태 선배는 원래 속구 구속이 152km까지 나오는 강속구 투수야. 그런데 조금 전은 구속이 145km밖에 나오질 않았어. 오랜만에 올라온 1군 무대, 그것도 만루 상황의 등판이 부담이 되었던 거야. 홈런을 맞은 공도 불리한 볼 카운트에서 가운데로 몰린 실투였어. 제구력이 나쁘지 않은 성태 선배가 그런 공을 던졌다는 것은 긴장으로 어깨가 굳어있다는 거야.'
강호는 2군에서 갓 올라온 표성태 투수를 만루라는 긴박한 상황에 올린 한 감독을 속으로 욕하게 된다.
올 시즌 2군 무대에서 0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는 성태였다.
조금 더 여유로운 상황에서 시험 기용하다 자연스럽게 1군에 안착하게 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만약 지금의 경기가 표성태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1군 무대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면 표성태라는 좋은 투수가 1군 경기에서 빛을 볼 기회가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강호는 그 사실이 안타까웠다.
'성태 선배는 좋은 투수야. 이대로 사라지게 둘 수는 없어. 아직 다음 투수가 준비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성태 선배에게 이닝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어!'
강호는 시선을 돌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 덕 아웃과 자이언츠 불펜 대기실을 살핀다.
이제 막 대우가 몸을 풀기 시작한 모습이 보인다.
한 감독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대우를 등판시키려는 의도라면 표성태에게 한, 두 타자를 상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강호는 다음 타자로 타석에 오른 와이번스 5번 타자 최현에 대한 리포팅 자료를 떠올린다.
'최현. 한 때는 우리나라 최고의 3루수로 평가받던 강타자다. 지금은 컨택 위주의 스윙으로 홈런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매년 20홈런 이상은 때려내는 완성형 타자. 땅볼 형 타구 비율보다는 외야로 향하는 타구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유형의 타자야. 그런 타자의 공을 내야로 향하게 할 수는 없을까?'
최현의 공이 자신에게로 향한다면 '호수비'아이템을 사용해서라도 아웃을 잡아낼 생각이었다.
그것이 한 때 함께 2군에서 뛰었던 '마무리 투수 표성태'에 대한 예우라고 여겨진다.
최현의 타구를 내야로 오게 할 방안을 고민하던 강호는 문득 고개를 돌린 성태와 눈이 마주치게 된다.
강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에게 시선을 준 표성태에게 굳건한 눈동자로 마주 바라본다.
툭툭.
글러브를 들어 자신의 가슴을 두어 차례 두들기는 강호.
항상 투수들과 시선이 마주칠 때면 그가 하고는 했던 행동이었다.
2군에서 스프링캠프를 함께 했었던 성태가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씨익.
긴장과 절망감으로 범벅이 되었던 성태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오른다.
그 미소를 확인한 강호는 수비를 위해 자세를 낮췄다.
좀 전에 맞은 만루 홈런의 잔상은 잊기로 한 것인지 표성태의 힘찬 와인드업이 시작된 것이다.
퍼엉!
묵직한 소리가 포수 강민수의 미트에서 터져 나온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판정은 스트라이크였고, 순간 포수 강민수의 시선이 전광판으로 향한다.
'152km!'
민수가 올려다 본 전광판에 표시된 숫자였다.
2군을 호령했던 마무리 투수 표성태의 구속이 돌아와 있었다.
그 변화는 공을 직접 받은 강민수 포수가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담감을 내려놓고 자신의 공을 던지기 시작한 성태의 변화가 누구로 인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강호 녀석.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팀 동료들을 믿고 공을 던졌을 때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던질 수가 있는 거야. 네가 했던 사소한 행동 하나가 표성태를 살리는 제스쳐가 된 거야. 잘 했다. 백강호!'
민수는 자신의 수비 위치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고 있는 강호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얼굴을 가린 마스크로 인해 강호가 그 미소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 일로 캡틴 강민수가 강호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성태의 구위가 돌아왔으니 최현을 잡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야. 성태의 공으로 6회를 끝내자.'
다음 투수가 준비될 때까지 최현에게 볼넷을 내줄 각오로 어려운 승부를 하려했던 민수가 생각을 바꾸게 된다.
'승부다!'
민수는 눈빛을 빛내며 성태에게 싸인을 냈다.
싸인을 받은 투수 표성태는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곧장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부웅, 타악!
최현이 스윙을 크게 헛치고, 바닥을 원 바운드로 때린 성태의 공이 민수의 미트에 빨려든다.
"스윙 스트라이크!"
주심의 판정으로 볼 카운트가 순식간에 노 볼 2스트라이크가 만들어졌다.
포크볼을 요구한 민수의 작전이 유리한 볼 카운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쓰읍."
타석에 선 최현이 불편한 신음을 토한다.
그 사이 민수에게 새 공을 넘겨받은 성태, 민수의 세 번째 싸인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후 민수의 미트를 향해 곧장 공을 집어 던진다.
퍼엉!
민수의 미트를 파고드는 강력한 소리에 타자인 최현이 '아!'하는 아쉬운 탄성을 내뱉는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주심은 최현의 삼진을 선언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전광판을 올려다 본 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인다.
153km.
성태가 최현을 3구 삼진으로 돌려세운 마지막 공의 구속이었다.
'됐어! 성태 선배의 구위가 돌아왔어. 내게 오는 땅볼을 유도했으면 했는데 더 좋은 결과가 나왔어. 잘 됐다.'
강호는 돌아온 표성태의 구위를 확인하며 피식 웃음 짓는다.
2군에서 마무리로 활약한 성태의 구위는 와이번스의 강타선이라 해도 충분히 정면승부가 가능한 공이었다.
만루 홈런을 얻어맞은 정의준과의 승부도 도망가는 피칭이 아니라 정면 승부를 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뒤늦게라도 성태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겨진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주심의 삼진 판정과 함께 최현에 이어 6번 타자로 타석에 오른 이재훈마저 잡아낸 성태.
만루홈런을 허용하는 모습을 보고 성태를 맹비난하던 자이언츠 팬들의 목소리도 어느새 수그러들고 있었다.
이닝을 마무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오던 성태는 문득 덕 아웃으로 뛰어 들어가던 강호에게 글러브를 내민다.
"덕분에 잘 막았다. 강호야."
강호는 자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성태에게 고개를 돌린다.
"제 덕이라뇨? 제가 수비를 한 것도 아닌데요. 선배가 삼진으로 막은 거 아닙니까?"
강호는 성태가 무엇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지를 알고 있었지만, 괜한 민망함에 발뺌의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성태가 내민 글러브와 자신의 글러브를 마주치는 것을 잊지는 않는다.
투욱.
두 사람의 글러브가 맞부딪힌다.
그 후, 7회부터 마운드에 오른 대우의 호투로 7회는 깔끔하게 막을 수 있었다.
위기가 끝나고 7회 말 자이언츠의 공격에서 무사 2루의 기회가 강호에게 주어진다.
9번 타자인 김중호가 2루타를 치고 나가며 강호에게 득점권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
양 팀 점수 차는 여전히 8대 8의 동점 상황.
모두의 시선이 타석에 오른 강호에게 모이고 있었다.
중계석의 두 사람도 강호의 타석에 시선을 집중한다.
"무사 2루, 득점권 찬스에서 백강호 타자가 타석에 오르는 가운데, 와이번스의 투수가 교체됩니다."
와이번스의 투수교체를 알리는 배 캐스터의 말 후에 안 위원이 입을 연다.
"윤희석 선수죠. 와이번스의 덕 아웃에서도 지금 상황을 승부처로 보는 거예요. 백강호 선수를 볼넷으로 내보낼 수도 없고, 안타는 더더욱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 위기를 막아야 만이 와이번스가 승리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고, 반대로 자이언츠 입장에서는 백강호 선수가 찬스를 살려주기를 바라고 있을 거예요. 경기를 지켜보시는 팬 여러분들은 지금 대결을 주목하셔야겠습니다."
안 위원의 해설 이후 투수교체 타이밍동안 TV광고가 흘러 나갔고, 광고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팬들은 중계화면이 다시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배성한 캐스터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게 된다.
"아! 백강호 선수 초구 타격! 타구가 외야로 뻗습니다! 그리고 이 타구는 사직구장의 담장을 완전히 넘겨버리는 투런 홈런으로 기록 됩니다!!"
배 캐스터는 와이번스의 셋업투수 윤희석의 초구를 받아친 강호의 타구가 홈런임을 선언하고 있었다.
그의 열띤 목소리 속에 천천히 베이스를 돌고 있는 강호의 모습이 TV중계를 통해 그려진다.
"와아! 백강호가 한 건 해주네!"
"역시 백강호야!"
팬들은 결정적인 상황에 나와 준 강호의 투런포에 환호한다.
반면에 당사자인 강호는 큰 기복 없는 표정으로 베이스를 돈다.
'가급적이면 아이템을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하나 정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대우에게 승 하나를 선물하는 셈 치자.'
강호는 원정 때마다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 대우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만약 지금의 타점이 결승점으로 기록된다면 7회 초에 계투로 오른 대우가 오늘 경기의 승리 투수로 기록된다.
룸메이트인 대우에게 승리를 안겨주려는 강호의 바람은 이루어져 경기는 자이언츠의 10대 9 승리로 끝맺음 지을 수 있었다.
9회, 2군에 내려간 마무리 투수 손명학을 대신해 마무리로 오른 홍성빈이 1실점을 하기는 했지만, 야수들의 호수비 도움으로 간신히 팀의 승리를 지켜낸다.
이 날 경기에서 때려낸 투런포로 강호의 홈런 기록 하나가 더 추가되게 된다.
그리고 와이번스와의 경기는 다음 날도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