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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을 치르다
때로는 잘 맞은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향해 아웃처리 되기도 하고, 빗맞은 타구가 운좋게 안타가 되기도 한다.
지금 강호가 때린 타구가 바로 거기에 속했다.
에머리가 던진 투심에 배트를 회수하지 못해 빗겨 맞은 공이 투수와 1루수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강호는 타구 위치를 확인한 후 있는 힘을 다해 1루로 내달렸다.
"비켜, 1루로! 1루로!"
공을 잡으려던 투수 에머리는 1루수 박정건의 외침에 포구동작을 멈추고 1루 베이스를 향해 급히 걸음을 옮긴다.
이미 강호의 발걸음이 1루 베이스 직전에 도달해 있어서 늦는다면 세이프가 될 수 있는 상황.
에머리는 급한 마음에 1루 베이스를 향해 슬라이딩을 시도한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중계석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아...지금 상황은 뭔가요? 1루수 박정건이 타구를 잡는 사이에 베이스 커버를 위해 1루로 향했던 에머리 투수가 베이스로 레그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했어요. 덕분에 공을 놓칩니다."
배 캐스터의 지적에 안 위원이 '허헐'하고 웃어보인 후 해설의 말을 꺼낸다.
"지금은 박정건 선수의 송구가 빠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에요. 포수 이재훈 선수의 수비 센스가 돋보이네요. 저 무거운 몸으로 언제 저기까지 갔죠? 덕분에 백강호 선수를 1루에 묶을 수가 있었어요. 지금 상황은 실책으로 기록되지 않고 백강호 선수의 내야 안타로 기록되네요."
안 위원의 말대로 베이스 커버에 들어간 투수 에머리가 박정건의 느린 송구를 놓치자 급하게 달려온 포수 이재훈이 1루 베이스 뒤로 빠지는 공을 어렵게나마 낚아챘다.
그 덕에 강호의 발은 1루 베이스에 묶이게 된다.
상대 실책으로 2루까지 가려했던 강호로서는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미 출루를 한 상황이니 원래의 목적은 달성한 상태.
보호 장비를 받아주기 위해 강호의 곁으로 다가온 1루 베이스 코치가 귓속말을 해온다.
"강호야, 잘 알지? 번트는 없으니까 상황 봐서 뛰도록 해. 에머리가 견제구를 던져도 리드 폭 줄이지 말고."
베이스 코치가 건넨 말은 그린 라이트 지시였다.
한 감독은 작전을 내서 아웃카운트를 늘릴 바에 강호의 빠른 발을 믿고 주자에게 전권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다른 신인선수 같았으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강호는 '네'하고 짧게 답하며 주루용 장갑을 착용한다.
'또 뛰라는 말이지? 좋아. 이번에도 에머리의 멘탈을 탈탈 털어주겠어.'
강호는 속으로 미소지으며 마운드 위의 투수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시한다.
그 눈빛을 읽어낸 에머리, 강호의 도루 의도를 느낀 에머리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저 자식이 또?'
에머리는 속으로 분노를 삼켜보려 했다.
그런데 그가 좌완 투수인 까닭으로 세트 포지션을 잡다보니 큰 폭의 리드를 가져간 강호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무시하려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견제구를 던진다.
"세이프!"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세이프가 선언되고 있었다.
에머리의 견제구는 정확한 편이어서 하마터면 강호를 1루에서 견제사로 잡을 뻔 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에머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연달아 네 개의 견제구를 던진다.
그러자 자이언츠 홈팬들의 원성이 쏟아진다.
"마! 견제 그만하고 야구하자!"
"외국인인데 그렇게 해서 알아듣겠어? 헤이! 겟 아웃 히어! 겟 아웃 유어 타운!"
"뭔 개소리야? 요즘 외인 선수들은 그냥 한국말로 욕해도 알아들어. 우리나라 오면 욕부터 배운다잖아."
관중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에머리는 관중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다시 견제구를 던진다.
촤아악.
바닥 스치는 소리와 함께 강호의 손이 1루 베이스를 짚었다.
이번에도 역시 1루심의 선언은 세이프. 에머리가 연달아 다섯 개의 견제구를 던졌지만, 강호를 견제구로 잡을 수는 없었다.
'제길 낚였다. 일부러 견제구를 던지게 만든 거였구나.'
에머리는 혀를 길게 내밀며 자신이 강호의 심리전에 말려든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다섯 번의 슬라이딩으로 강호의 체력도 떨어졌겠지만, 투수인 자신도 만만치 않은 타격을 입은 셈이다.
다섯 개의 견제구를 던지며 정신력과 체력을 소진했다는 생각에 에머리는 주자인 강호를 무시하기로 한다.
그래도 도루를 허용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포수의 변화구 요구를 모두 무시하고, 투심으로 구종을 선택한다.
터업!
에머리의 강력한 투심 패스트볼이 포수 미트에 틀어박혔다.
그런데 주자인 강호를 너무 의식한 것인지 존에서 꽤나 벗어난 코스였다.
"볼 원."
주심의 선언은 당연히 볼이었고, 포수로부터 공을 돌려받은 에머리는 생각이 복잡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무너지면, 주자인 강호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다.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세트 포지션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곧장 공을 던진 에머리.
헌데 그가 공을 던진 방향은 포수 쪽이 아니라 이번에도 1루수 쪽이었다.
"세이프."
이번 판정은 꽤나 넉넉하게 느껴지는 세이프였는지 1루심의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이어서 던져진 두 개의 견제구에도 1루심의 목소리는 커지지 않는다.
중계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 캐스터가 '허'소리를 내며 입을 연다.
"또 견제구를 던집니다. 에머리 투수가 타자인 박철에게 하나의 볼을 던진 상태에서 백강호 주자에게는 여덟 개의 견제구를 던지고 있습니다."
배 캐스터의 말에 안경훈 위원이 낮은 어조로 말한다.
"지금같은 견제는 에머리 선수에게도 좋지 않아요. 견제구를 던지는 것도 체력이 소진되는 행위거든요. 같은 수 만큼 투구를 했다고 봐도 무방해요. 그런데 벌써 여덟 개의 견제구거든요. 에머리 투수는 주자에게 한 눈을 팔기보다는 포수를 믿고 정상적인 투구를 하는 게 좋습니다. 견제도 좋지만, 지나친 주자 견제는 타자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 있어요."
안 위원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실제로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는 에머리의 집중력이 떨어져 있다는 전제로 새로운 작전을 낸다.
타자인 박철과 주자인 강호는 벤치에서 나온 싸인을 확인하고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약간은 리드 폭을 줄이는 강호. 그 모습에 만족한 에머리가 곧장 포수를 향해 공을 던졌다.
따악.
벼락같이 휘두른 박철의 배트가 에머리가 던진 공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어서 그라운드 위의 누군가가 황망한 목소리를 낸다.
"왓?!"
목소리의 중인공은 와이번스의 유격수 가메스였다.
그는 2루로 스타트를 끊은 강호의 행동에 2루 베이스를 향해 발을 떼다가 자신의 원래 수비위치로 날아든 타구를 놓치고 말았다.
강호의 도루에 대응하라는 덕 아웃의 상황지시가 있었기에 한 행동이지만, 원 위치에 있었다면 더블 플레이로 연결 될 수도 있었던 타구 방향이었다.
하지만 그 타구는 가메스가 자리를 비우면서 안타로 기록된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런 앤 히트 작전으로 이미 2루 베이스에 도달한 강호의 발걸음이 3루를 향하고 있었다.
"슬라이딩! 슬라이딩!!"
와이번스 좌익수 김재영이 타구를 포구하는 것을 확인한 3루 베이스 코치가 강호에게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지시했다.
강호는 베이스 코치의 지시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베이스를 향해 몸을 날린다.
촤아악.
스스로의 몸이 지면을 스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강호의 손끝이 베이스를 향해 뻗어진다.
좌익수 김재영의 공이 3루수 최현의 글러브에 빨려들자 곧장 태그가 이루어졌다.
3루심은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판정을 내린다.
"세이프!"
3루심의 우렁찬 목소리에 환호하는 자이언츠 홈 팬들. 그런데 상황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좌익수 김재영의 송구 방향이 3루 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타자 주자 박철이 2루 베이스를 향해 뛰었고, 이미 그의 발은 2루 베이스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2루!"
와이번스 덕 아웃에서 나온 외침을 듣고는 3루수 최현이 얼른 2루를 향해 공을 던졌다.
하지만 늦은 송구였다.
"세이프!"
3루심에 이어 2루심의 판정 역시 세이프.
더블 플레이가 될 수 있었던 박철의 타구가 와이번스의 수비작전미스로 무사 2, 3루의 상황을 만들게 된 것이다.
"와아아아!"
자이언츠 팬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지고 있었고, 간만에 작적을 성공시킨 한동현 감독은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강호의 주루 능력도 좋았지만, 박철의 타격도 나쁘지 않네요. 벌써 2안타째죠?"
한 감독은 근처에 서있는 정호종 타격코치에게 물어본다.
그러자 정 코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철이가 2군에서 4할 대를 기록했다더니 사직에 와서도 좋은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 번 정도 기회를 주면서 1군 무대에 잘 적응하는지를 확인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 코치는 박철에게 기회를 줄 것을 권유했다.
2군에서 올라온 강호가 엄청난 포텐을 터뜨리면서 최근 들어 2군 타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정 코치였다.
그가 보기엔 강호만큼은 아니었지만, 박철 또한 상당한 재능을 가진 타자로 보였다.
잘만 키운다면 자이언츠의 차세대 외야수로 성장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박철의 나이가 올해로 22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박철의 원래 포지션이 우익수라고 했지요?"
한 감독은 박철의 타격보다는 수비 포지션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그의 물음에 정 코치가 '네'하고 답하자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이는 한 감독.
두 사람이 박철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사이, 3번 타자인 전준오가 내야 땅볼로 물러나게 된다.
그 사이 홈으로 파고든 강호로 인해 점수 차는 3대 4. 한 점 차로 좁혀진다.
"강호, 잘 했어."
"이번에도 한 건 해주는구나!"
선배들의 환영을 받으며 덕 아웃으로 들어온 강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따악.
이어서 타석에 선 4번 타자 황제인이 적시타를 때려냈고, 박철이 득점 하나를 추가하면서 4대 4, 동점 상황이 만들어진다.
"오늘은 양 팀이 초반부터 치열한 접전을 펼칩니다. 이렇게 되면 와이번스 벤치에서도 투수교체 타이밍이 고민이겠어요. 자이언츠에서는 3회 부터 불펜을 가동했거든요?"
중계석의 배 캐스터가 투수교체에 대해 거론하자 안 위원은 '으음'하고 소리를 낸 후 특유의 목소리로 대답한다.
"글쎄요. 아직 에머리 투수의 투구 수가 50개를 넘지 않았거든요. 구위나 제구력에는 큰 문제가 없고요. 4실점 상황도 에머리가 못 던졌다기보다는 자이언츠 타자들이 잘 친 느낌이에요. 일단은 3회까지는 그대로 갈 것 같습니다."
안 위원의 말대로 와이번스 덕 아웃에서는 아직 투수 교체를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와이번스 투수 코치가 통역을 대동하고 마운드 위로 오르기는 했지만, 몇 마디 격려의 말을 했을 뿐, 투수교체는 없었다.
에머리는 그런 와이번스 덕 아웃의 기대에 보답하는 피칭으로 나머지 2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고, 3회 말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4회 말에도 마운드에 올라 좋은 모습을 보여준 에머리, 그러나 그의 좋은 투구도 4회까지 였다.
5회 말, 9번 타자 김중호에게 볼넷, 1번 타자인 강호에게는 몸에 맞는 공을 던지며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고, 2번 타자인 박철마저 볼넷으로 출루시키며 1사 만루의 위기 상황을 자처하고 말았다.
"수고했다."
급히 마운드에 오른 투수코치가 에머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불펜 투수를 마운드에 올렸지만, 결과적으로 늦은 결정이었다.
따악!
경기장을 가르는 호쾌한 타격음이 모두의 숨을 멎게 만든다.
3번 타자 전준오는 삼진으로 돌려세운 교체 투수 박성배가 이닝 종료까지 카운트 하나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4번 타자 황제인에게 큼지막한 타구를 허용하고 만 것이었다.
중계석의 배 캐스터는 황제인의 타구가 떨어지는 위치를 확인하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황제인 그랜드슬램! 5회 말 2사 만루 상황에서 자이언츠의 4번 타자 황제인의 만루 홈런이 터집니다! 이 홈런은 자이언츠가 8대 4로 역전을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한방으로 기록됩니다!"
배 캐스터의 우렁찬 목소리로 황제인의 만루 홈런이 선언된다.
"와아!!"
"황제인 죽이네!"
"오늘은 이기겠다!!"
사직 구장이 황제인의 이름을 외치는 자이언츠 팬들의 함성 소리에 묻혀버린다.
이때까지만 해도 팬들은 자이언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희열에 가득 찼던 팬들의 표정은 6회 초가 되면서 전혀 다른 얼굴로 뒤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