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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을 치르다
2회 초, 자이언츠의 수비상황.
강호는 오른쪽으로 빠르게 내달리며 글러브를 뻗었다.
터업.
다행히도 빠른 주력 덕분에 빠져나갈 듯한 타구를 간신히 낚아챌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글러브 끝에 걸려든 공을 오른손으로 잡은 것과 동시에 2루 베이스를 향해 던진다.
"아웃!"
유격수 오진택이 강호가 던진 공을 잡는 것을 확인한 2루심이 아웃 판정을 내렸다.
진택은 콜을 확인할 여유도 없이 1루를 향해 공을 던진다.
"아웃!"
1루심 역시 아웃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 사이 3루에 있던 주자가 홈으로 파고들며 와이번스의 1득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제 양 팀 스코어는 2대 2동점 상황.
강호의 빠른 발과 4번 타자 황제인의 적시타로 2대 0, 자이언츠가 앞섰던 상황을 단 번에 뒤집는 와이번스였다.
포심 제구가 흔들리고 있는 세준의 변화구만을 노린 와이번스의 전략이 통한 것이었다.
'휴우~그래도 강호가 더블 플레이를 잡아준 덕분에 주자는 다 지웠구나.'
투수 박세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강호에게 고맙다는 신호를 보낸다.
강호는 세준의 감사인사에 글러브를 들어 답례하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세준이의 제구가 더 나빠졌어. 포심 제구만 안 되던 것이 이제 변화구도 제구가 흔들리잖아. 3이닝 이상을 버티기는 무리겠어.'
강호는 투수인 세준이 4회 이전에 강판될 것으로 보았다.
지금은 운 좋게 2실점으로 막아냈다고는 하지만, 5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으면서 세준이 내준 볼넷의 수가 3개였다.
여전히 세준의 제구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그가 5회까지 마운드를 지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강호의 생각대로 3회에는 세준을 대신해서 다른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점수는 이미 4대 2로 와이번스가 역전한 상황이었고, 바뀐 투수가 지금의 흐름을 끊어 줘야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마운드에 오르고 있었다.
"세상에."
"미친 거 아냐? 한 감독은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하지만 바뀐 투수를 확인한 관중석에서 경악석이 터져 나온다.
2군으로 내려간 지터가 1군에 다시 등록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팬들이 많았다.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아직 재역전의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지터를 올릴 줄은 몰랐던 팬들. 그들의 목소리가 분노로 달아오른다.
"아직 3회밖에 안 됐어! 한동현 감독 정신 차려! 벌써 경기를 포기하는 거야?!"
"장난치지 말고 권대우 올려! 권대우도 있는데 왜 지터 같은 투수를 올리는 거야?"
팬들의 성난 목소리가 그라운드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은 지터라는 투수는 개막전 경기를 완벽하게 말아먹고, 시범경기 경기에서조차 1승도 올리지 못한 막장 투수였다.
속구 구속이 130대 중반밖에 나오지 않는 투수를 어디에 쓴단 말인가. 그것이 팬들의 심정이었다.
팬들의 성난 목소리를 듣게 된 한 감독은 불안한 표정이 되어 투수코치 여민석에게 재차 확인한다.
"진짜 괜찮은 겁니까? 지터의 구속이 2군에서 조금 올라갔다는 말은 들었지만, 만약 이번 기용이 실패하면 지터를 다시는 1군 무대에 올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한 감독이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그 점이었다.
지터의 기용으로 자신의 평가가 더욱 나빠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 한 감독의 걱정에 여 코치가 눈썹을 씰룩인다.
'아니 그런 걸 걱정하는 사람이 왜 지터를 1군 엔트리에 넣은 거야? 아니지. 애초에 지터를 선택하지를 말았어야지. 구속도 구위도 엉망인 투수를 뭘 보고 데려온 거야? 로또 긁는 심정이었어?'
여 코치는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며 한 감독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을 꺼낸다.
싫으나 좋으나 지금은 한 감독이 총 사령탑으로 있다.
투수 코치인 자신의 입장으로는 크게 항변할 수 없었다.
"걱정마십시오. 혹시 몰라서 2군에서 같이 올라온 사준식에게 천천히 몸을 풀라고 해뒀습니다."
"사준식이요? 준식이는 부상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2군에서도 빠져서 재활 군에 있는 줄 알았는데요?"
사준식을 준비시킨다는 여 코치의 말에 한 감독이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자 여 코치가 얼른 대답했다.
"1주일 전에 회복이 끝나서 2군 경기에 불펜으로 몇 경기를 뛰었는데 성적이 좋습니다.
두 경기 동안 실점 없이 3이닝을 잘 막아냈어요. 구동진 코치의 말로는 1군에서도 2이닝 정도는 막아줄 수 있을 거라네요."
여 코치는 한 감독을 안심시키는 말로 그를 달랜다.
그가 거론한 구동진 코치는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의 이름이었다.
한 감독은 여 코치의 말에 '일단은 지켜봅시다'라는 말로 불안감을 감추고는 마운드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그 사이 와이번스의 7번 타자 박정건을 맞이한 지터의 초구가 뿌려진다.
퍼억.
타석을 가득 채우는 묵직한 소리에 불안한 표정으로 지터의 투구를 지켜보던 한 감독의 표정에 이채가 감돈다.
개막전까지 배팅 볼처럼 느껴지던 지터의 구위가 올라와 있었다.
저 정도 구위라면 140km대의 속구 구속만 나와 준다면 3이닝 정도는 충분히 막아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한 감독의 시선이 전광판으로 향한다.
"143km? 손성조 감독이 무슨 마술이라도 부렸답니까? 135도 안 되던 지터의 구속을 어떻게 143까지 올려놓은 거죠?"
한 감독은 놀란 목소리로 묻게 된다.
투수코치인 여민석 코치도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그저 2군에 있는 구동진 코치에게 지터의 구속과 구위가 괜찮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지터를 추천한 여 코치 본인도 경기 전 연습 피칭으로 로케이션과 컨디션이 괜찮다는 것 정도만 확인한 상태였다.
'허헐, 진짜로 지터의 구위가 살아났네? 올해 내에는 안 될줄 알았는데 말이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지터를 권한 것인데 이렇게 되면 괜히 한 감독 평판만 좋아지게 생겼네.'
여 코치는 속내를 숨기며 대답을 위해 입을 연다.
"지터의 구속이 떨어졌던 건 심리적인 요인이 컸던 것 같습니다. 상동에서 지내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올라오니까 이렇게 구속도 어느 정도는 나와 주네요. 당분간 불펜에 두고 계투로 활용해도 될 것 같습니다. 구위나 구속이 선발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계투로 1, 2이닝 정도는 채울 수 있지는 않을까요?"
여 코치의 말에 한 감독은 고개를 끄덕인다.
베테랑 불펜 투수들이 죄다 무너진 지금의 형국에 1, 2이닝 정도라도 막을 수 있는 투수가 있다면 투수 운용에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지터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된 한 감독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 사이 지터가 잡아낸 첫 번째 아웃카운트가 기록되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주심이 삼진을 선언하고 있었다.
지터의 로케이션 투구에 루킹 삼진을 당하고 만 와이번스 타자 박정건이 혀를 길게 빼물며 타석에서 물러선다.
그 다음 타석에 오른 타자는 와이번스의 중견수 김경민이었다.
기존 중견수인 이진석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베테랑 외야수인 김경민이 올 시즌 처음으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앞선 타석에서 깨끗한 안타를 기록할 정도로 타격감은 나쁘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그런 김경민 타자도 대오각성한 지터 앞에서는 고개를 내젓게 된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선언으로 볼 카운트가 순식간에 노 볼 2스트라이크 상황이 만들어진다.
타자에게 극도로 불리한 카운트로 몰리게 된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대충 들어오면 때리자.'
경민은 불리한 볼 카운트에서 컨택 위주의 타격을 하기로 작전을 변경하고는 지터의 3구째를 때려낸다.
따악.
약간은 빗맞은 타구가 투수 지터를 지나쳐 2루수 정면으로 굴러간다.
타구가 느린 편이어서 여유롭게 처리하다가는 세이프 판정이 날 수도 있는 땅볼 타구였다.
강호는 앞으로 대쉬하며 타구를 향해 글러브를 뻗었다.
포구 위치 직전에 불규칙 바운드가 만들어졌지만 많이 심하지는 않아서 어렵지 않게 포구할 수 있었다. 강호는 글러브에 들어온 공을 꺼내 1루수인 상훈에게 던진다.
"아웃!"
1루심은 아웃을 선언한다.
경기 전 개인 훈련에서 강호와 포구 훈련을 한 것이 도움이 된 것인지 위험한 송구에도 군더더기 없이 포구를 해내는 상훈이었다.
"나이스 캐치."
상훈은 강호의 수비를 칭찬하는 말을 전한다.
강호 역시 답례하며 상훈이 던지는 공을 글러브로 받았다.
중계석에서 두 사람의 안정된 수비를 지켜본 안경훈 위원이 입을 연다.
"지금은 자이언츠 수비의 승리에요. 백강호 선수가 대쉬해서 잡아내지 않았더라면 세이프 될 수도 있는 애매한 타구였어요."
안 위원의 말에 배 캐스터가 곧장 부연 설명을 한다.
"애매한 타구를 아웃카운트로 바꾸는 백강호 선수의 좋은 수비였습니다. 김상훈 선수의 포구도 좋았습니다. 느린 화면으로 보시는 것처럼 다소 오른쪽으로 치우친 백강호 선수의 송구에 다리를 찢다시피 하면서 잡아냈어요."
배 캐스터의 말에 tv로 중계를 지켜보던 몇몇 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타격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상훈이지만, 수비 능력은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그에 대한 평가였다.
그런데 배 캐스터의 설명을 듣게 되니 '원래 김상훈이 포구를 잘했었나?'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그 사이 다음 타자로 오른 이명규마저도 범타로 처리하며 깔끔하게 이닝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9번 타자 이명규 마저 1루수 땅볼로 물러나게 되면서 지터가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립니다!"
배 캐스터의 목소리와 함께 지터가 당당한 걸음으로 자이언츠 덕 아웃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지터는 좋은 수비를 보여준 강호와 상훈에게 연달아 글러브를 맞대며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직은 어설프게 느껴지는 한국말이 인상적인 지터.
"캉호, 쌍훈. 고마어."
감사를 표하는 지터의 말에 피식 웃음 지으며 강호가 덕 아웃으로 뛰어든다.
공교롭게도 3회 말 선두 타자로 나서야하는 강호.
얼른 모자와 글러브를 벗어놓고, 헬멧과 배트를 챙겨 타석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3회 말 자이언츠 공격은 1번 타순인 백강호 선수부터 시작되겠습니다. 자이언츠 입장에서는 점수 차를 좁힐 수 있는 기회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중계석의 배 캐스터가 자이언츠의 3회 말 공격이 찬스상황임을 알린다.
그러자 한동안 잠자코 있던 안 위원이 입을 열었다.
"지터 선수가 삼자 범퇴로 이닝을 막아내면서 분위기를 자이언츠 쪽으로 가져왔거든요. 여기서 선두 타자인 백강호 선수가 출루만 해준다면 자이언츠로서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백강호 선수의 출루가 중요합니다."
안 위원은 자이언츠의 3회 말 득점을 위해서는 강호의 출루가 우선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배 캐스터가 가지고 있던 기록지에서 강호의 기록을 찾아내며 읽어낸다.
"현재까지 백강호 선수의 출루율은 5할 9푼 7리입니다. 6할 대에 근접한 모습이에요. 열개의 타석 기회 중에 여섯 번은 출루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ops는 16할이네요. 기록만 놓고 보자면 출루 쪽에 무게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초구가 중요한데요. 여전히 마운드는 선발 투수 에머리 선수가 지키고 있고, 에머리 투수가 초구를 준비합니다."
배 캐스터의 빠른 설명대로 에머리가 강호를 상대할 초구 동작에 들어가고 있었다.
모션이 큰 와인드업에 이은 릴리스 동작으로 연결되는 강력한 구위의 투심이 뿌려진다.
퍼억.
마치 미트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 후, 곧장 주심의 판정이 이어진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판정에 입맛을 다시면서 강호는 배터 박스에서 반 발짝 물러선다.
살짝 멀어 보이는 코스인데 스트라이크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타자의 입장으로서는 아쉬울 수 있는 판정이다.
'완전히 빠져 보였는데 이런 게 스트라이크라니. 잘못하다가는 루킹 삼진당할 수도 있겠어. 조금 더 집중하자!'
강호는 늘 하던 습관대로 배트의 끝 부분을 노려보며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타격 자세를 취한다.
이어서 던져진 에머리의 2구는 초구와 비슷한 코스로 들어오는 빠른 공, 강호는 이대로 당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배트를 낸다.
부웅.
헛스윙이었다.
주심의 스윙 스트라이크가 선언된다.
공 2개 만에 노 볼 2스트라이크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1회 때 강호로 인해 살짝 흔들렸던 에머리의 투구가 3회에는 더 견고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투심은 안 되겠어.'
강호는 전략을 바꾼다.
1회 때 정타로 받아쳤던 투심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하고, 다른 구종을 노리기로 한다.
마음을 정한 강호가 다시 타격 자세를 취한 후, 에머리의 3구째 공이 손을 떠난다.
그리고 강호 역시 한껏 끌어당겼던 배트를 휘두른다.
따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