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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을 치르다
"스트라이크!"
주심이 힘찬 목소리로 판정을 알린다.
에머리의 초구는 몸 쪽 가득 차는 속구였다.
일반적인 포심 궤적과는 조금 다른 속구의 볼 끝 변화에 강호의 표정이 굳어진다.
'이런 투심을, 이런 구속으로 던지는 투수가 왜 한국에 온 거야? 게다가 좌완이잖아.'
강호는 머릿속에 차오르는 의문을 떨쳐내기 위해 배터 박스에 발을 걸친 채 물러선다.
흘깃 전광판을 올려다보니 150km라고 찍혀있는 에머리의 구속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내 무대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무브먼트가 좋은 좌완 투수의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미리 리포팅 자료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투심이라는 확신도 가지지 못했을 정도다.
에머리의 초구 투심 패스트볼에 놀라게 된 강호, 놀란 것은 단지 강호만이 아니었다.
"아~~에머리 선수 투심이 정말 좋네요. 저 정도 공이면 메이저리그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국내 무대로 온 거죠?"
반은 진심을 담은 안경훈 위원의 말이 전파를 타고, 중계 tv로 전달된다.
그의 말과 함께 각자의 공간에서 중계를 지켜보는 팬들도 '공 쩌네, 와아, 저걸 어떻게 치냐'등의 감탄사로 에머리의 공에 놀라움을 표한다.
그리고 장소는 다시 중계석으로 돌아와 배성한 캐스터가 에머리에 대한 자료를 읽는다.
"에머리 선수, 메이저 무대에서는 통산 6승을 거둔 게 전부입니다. 거의 10년간을 트리플 A무대와 더블 A무대에서만 보냈어요. 올해로 한국 나이 서른 살인데요. 안경훈 위원께서 말씀하신대로 150km대의 투심패스트볼이 주 무기입니다. 변화구로는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장착하고 있고요. 전형적인 쓰리피치 투수라고 리포팅 자료에 나와 있습니다."
배 캐스터의 말에 안 위원이 고개를 내젓는다.
"저런 선수가 마이너에만 있었다고요? 무언가 멘탈적인 하자가 있거나, 다른 큰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메이저리그에 몽땅 괴물들만 있는 걸까요?"
안 위원의 말에 배 캐스터는 '하하'하고 웃음 지으며 답한다.
"저야 안 가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리포팅 자료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에머리 선수가 흥분을 잘 하는 성격이라고 하네요. 지난 번, 위즈와의 맞대결에서 심판의 볼 판정에 다소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줬었는데요. 오늘 경기에서는 그런 모습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멘탈적인 부분이네요. 메이저리그는 실력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선수의 자질이나 태도, 멘탈적인 부분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에머리 투수가 국내 무대에서만큼은 그런 모습을 자제해야 만이 본인의 기량을 100% 살릴 수 있을 거예요."
배 캐스터가 제공하는 몇 가지 정보를 통해 에머리의 멘탈적인 약점을 지적하는 안경훈 위원이었다.
그들의 대화가 오고가는 사이 어느새 에머리와 강호의 승부는 5구째로 이어진다.
"볼 투."
에머리의 5구는 주심에게 볼 판정을 받았다.
스트라이크 존을 터무니없이 벗어나는 공이라서 에머리도 주심의 판정에 불만을 내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타석에 선 강호가 미세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배 캐스터가 다시 입을 연다.
"지금 백강호 선수가 살짝 미소를 짓는데요? 에머리 투수의 체인지업에서 뭘 파악한 걸까요?"
배 캐스터의 말에 강호가 웃는 모습을 살피지 못한 안 위원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쎄요. 조금 전 에머리 투수의 공은 존을 크게 벗어나는 볼이었거든요. 백강호 선수 입장으로서는 에머리 투수의 체인지업 제구가 안 된다고 여기는 걸 수도 있어요. 쓰리피치 투수가 공 하나를 제구하지 못한다면 타자는 나머지 두 개의 공만 조심하면 되거든요. 백강호 선수가 그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강호의 생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안 위원은 그렇게 추측의 말로 해설을 대신한다.
그런데 타석에 선 강호의 생각은 안 위원과는 달랐다.
'체인지업을 던질 때 투구 폼이 달라. 투심과 슬라이더는 투구 폼을 구별할 수 없지만, 체인지업을 던질 때는 팔 각도가 조금 떨어진다. 에머리는 쓰리피치가 아니라 투피치인 셈이야.'
강호는 직접 마주하게 된 에머리에 대한 분석을 끝냈다.
리포팅 자료에는 체인지업을 던질 때 확인이 가능하다고 나와 있어서 삼진을 당할 각오로 체인지업을 지켜본 것인데 리포팅 자료가 맞은 것이다.
미세하기는 하지만, 체인지업을 던질 때 팔 각도가 떨어지는 점은 에머리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체인지업의 제구나 볼 끝도 좋은 편이 아니어서 빠른 공 타이밍으로 타격을 준비하다 체인지업 투구 폼을 확인하며 커트해내면 그만이었다.
티익.
강호는 그 확신을 에머리의 6구째에 실현시키며 또 다시 던져진 체인지업을 커트한다.
이번에는 존을 걸치고 들어오는 공이어서 커트할 필요가 있었다.
"강호가 오늘도 잘 해주는데요?"
덕 아웃에서 에머리와 강호의 대결을 지켜보던 타격코치 정호종이 흥미롭다는 듯이 입을 연다.
타격 코치인 그로서는 1번 타순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강호가 대견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에머리에게 여섯 개의 공을 던지게 하여 그의 단점을 파악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에머리의 체인지업이 좋지 않네요. 투구 폼도 살짝 다른 것 같고. 차라리 투심만 던지는 게 에머리 입장에서는 낫겠는데요?"
곁에 있던 여민석 코치가 정 코치의 말에 대답한다.
그는 1회 초, 제구가 흔들리는 박세준 투수로 인해 크게 고심했었지만, 지금은 평정심을 되찾은 상태다.
불펜에서 대기 중인 지터의 준비가 끝났고, 세준이 야수들의 도움을 받아 1회 초 수비를 삼자 범퇴로 돌려세운 것을 보고나서 한 시름 놓은 것이다.
가끔 투수가 흔들리는 날에 야수들의 수비 도움이 있다면 몇 이닝 정도는 선발 투수를 더 끌고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럼 타자들에게 에머리의 투심만 노리라고 하면 되겠네요."
에머리의 체인지업 문제를 지적한 여 코치의 말에 정 코치가 손뼉을 치며 대답한다.
그러자 여 코치의 시선이 정 코치를 향해 돌려진다.
"투심만 노린다고요?"
"네, 투심 타이밍에 맞춰서 타격을 하면 슬라이더 정도는 커트가 가능합니다. 체인지업 제구가 흔들리는 것 같으니까 체인지업 때는 아예 공을 기다리고, 투심만 노려 치는 겁니다."
정 코치의 말에 여 코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 코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하지만 정 코치님. 에머리의 투심은 노리고 친다고 해서 정타로 때려낼 수 있는 공이 아닙니다. 투심 하나만큼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먹히는 투수라고요."
여 코치의 말에 정 코치는 씨익 웃어 보인다.
"그게 바로 심리전 아니겠습니까? 쓰리피치 투수가 공 하나는 약점인 상태에요. 그럼 결국 투피치 아닙니까? 우리 팀 타자들이 투수 본인이 장점으로 여기는 투심만 노린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에머리같이 멘탈 약한 투수들이 흥분하지 않겠습니까?"
정 코치의 말이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졌다.
투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주 무기가 공략 당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투심 공략은 좀..."
여 코치는 의문을 표시한다.
하지만 이어진 정 코치의 말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라운드를 향해 손가락을 뻗어 보이는 정 코치.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에는 에머리의 투심을 받아쳐 기어코 안타를 만들어내는 강호의 모습이 보인다.
따악.
약간은 먹힌 소리가 들려온다.
배트가 밀려 잘 맞은 타구는 아니었지만, 운 좋게도 유격수 키를 살짝 넘기는 좌전 안타가 만들어졌다.
강호는 1루 베이스를 밟은 후 2루 베이스를 노리며 달렸지만 좌익수의 공이 곧장 2루로 향하자 몸을 돌려 1루로 안착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 코치가 기분 좋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저거 보십시오. 강호는 잘만 때려내지 않습니까? 투심 타이밍만 노리고 있으면 안타를 때려내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정 코치는 밝게 웃음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걸음을 옮겨 벤치에 앉아 있는 타자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여 코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 코치님. 저건 강호가 잘 때려낸 거지 절대 에머리의 투심이 치기 쉬워서 안타가 나온 게 아니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는 여 코치이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타자들에 대한 타격 주문은 타격코치인 정호종 코치의 역할이어서 자신이 나서는 것은 일종의 월권행위와도 같았다.
그래서 여 코치는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기로 한다.
한편 중계석에서 강호의 안타를 지켜 본 안 위원은 자신의 예상을 입 밖으로 꺼낸다.
"백강호 선수 도루할 확률이 높아요. 주력이 좋은 선수거든요. 에머리 투수가 좌완투수이기는 하지만, 뛸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요."
안 위원의 말에 배 캐스터가 가지고 있던 자료를 찾아 읽는다.
"백강호 선수 올해 11개의 도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루 성공률은 100%에요. 11번 뛰어서 11번 모두 성공시켰습니다. 안 위원 말씀대로라면 지금 상황에서 12개째 도루를 기록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두 사람의 말에 중계로 경기를 보고 있는 자이언츠 팬들의 기대가 높아진다.
팬들의 입장에서는 한 감독이 번트 작전을 내는 대신에 강호에게 도루 싸인을 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팬들의 바람대로 에머리가 2번 타자인 박철에게 초구를 던지는 것과 동시에 강호의 스타트가 끊어진다.
부웅.
타자인 박철이 포수 이재훈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헛스윙을 했지만, 이재훈은 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송구 동작에 나선다.
빠르게 이어진 연결 동작으로 2루 베이스를 향해 날아가는 공. 와이번스의 유격수 가메스가 베이스 쪽으로 달려와 글러브에 공을 담는다. 그리고 이어진 태그.
"세이프!"
2루심의 판정은 세이프였다.
그러자 강호의 몸을 태그한 가메스가 손가락으로 사각형을 그려보였고, 와이번스 덕 아웃에서는 가메스의 요구대로 비디오 판독을 요청한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 판독실에서 나선 심판이 판정 번복 없이 세이프를 선언하자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잘 했다. 백강호!"
"1회부터 점수내고 가자!"
이제 팬들에게 강호의 활약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강호의 안타나 도루에 놀라는 대신에 힘찬 환호성을 내지르게 된 팬들. 강호가 코칭스태프나 선수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팬들에게도 자이언츠의 주전 선수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 생각은 중계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메스 유격수가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지만, 원심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백강호의 12호 도루가 기록됩니다."
배 캐스터의 말 후에 곧장 안 위원이 해설을 더한다.
"잘 뛰네요. 에머리가 던진 공이 150대의 빠른 속구였거든요. 좌완 투수가 강속구를 던지고 있는데도 도루를 성공시키네요. 백강호 선수. 정말 빠릅니다. 이제 자이언츠의 1번 타순은 다른 선수가 대체할 수 없겠어요."
안 위원의 말은 자이언츠 팬들의 생각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강호가 다른 타순으로 이동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강호가 있는 1번 타순을 다른 선수로 대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만큼 강호가 1번 타순에서 제 역할 이상의 몫을 해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에머리의 4구째를 받아친 박철의 단타에 강호가 홈까지 파고들면서 그 생각은 확신이 된다.
따악.
강호와 비슷한 코스로 만들어진 박철의 안타는 강호가 홈으로 파고들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였다.
"뛰어, 뛰어, 뛰어!"
하지만 강호의 주력을 믿고 3루 베이스 코치가 강호의 홈 쇄도를 지시한다.
그것을 확인한 강호는 빠르게 3루를 돌아 홈으로 몸을 날린다.
촤아악!
홈 충돌방지규정을 의식한 듯 포수가 비워둔 홈 플레이트를 향해 날듯이 몸을 날린 강호.
그의 손이 홈을 훑고 지나간 것과 동시에 포수의 미트가 강호의 등을 태그했다.
모두의 시선이 주심에게로 향한다.
"세이프!"
주심의 판정은 세이프였다.
2루 도루에 이은 홈 쇄도로 자이언츠의 선취점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모습을 확인한 중계석에서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백강호 홈에서 세이프! 1점을 앞서나가는 자이언츠의 선취점이 백강호의 발로 만들어 집니다! 백강호 선수 올 시즌 26점째의 득점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득점으로 백강호 선수가 득점 1위로 올라서게 됩니다!"
배 캐스터의 선언과 함께 강호가 얻게 된 타이틀은 두 개가 된다.
타율 1위와 득점 1위.
4월 9일부터 1군에 합류한 강호로서는 상당한 활약임에 분명했다.
그 모습에 현장이나 tv로 중계를 지켜보는 자이언츠 팬들이 탄성을 내뱉게 된다.
"하아~ 득점도 1위야? 조만간 도루 1위도 따라잡고, 최다안타 기록도 따라 잡으면 4개 부분에서 1위를 먹는 거네?"
친구의 가게에서 tv로 중계를 보던 오진수가 감탄하며 말한다.
그의 말에 테이블을 닦다말고 tv에 시선을 뺏긴 진명이 대답했다.
"타점 1위까지 먹으면 5개 부분이지. 지금 백강호 타점이 21타점인데 1위하고 6점 차이밖에 안 나거든. 아마 다음 달 정도면 따라잡을 걸?"
"뭐? 타점도? 백강호는 1번이잖아. 어쩌다가 타점 1위까지 노리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대단한 거지. 중심타선도 아니고, 리드오프가 타점 1위까지 노리는 거잖아. 만약에 데뷔전 때부터 4번에 두고 썼으면 백강호가 타점 1위도 벌써 먹었을 거야."
친구의 말에 답하는 진명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강호를 놓고 대화하고 있는 두 친구의 시선을 받으며 강호의 활약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