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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을 치르다
하루가 지나고, 장소는 구단 본부 사장실로 옮겨진다.
지정만 사장은 아침 일찍부터 출근해 몇 가지 보고서를 검토 중에 있었다.
그의 곁에 선 기획실장 허동준은 약간은 긴장된 얼굴로 지 사장의 반응을 기다린다.
보고서의 내용을 확인한 지 사장이 분개할 것을 예측해서 미리 청심환 하나를 먹어둔 허 실장이었다.
보고서를 모두 살핀 지 사장이 침음을 토해내며 의자에 기댄다.
그런데 허 실장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화를 내지는 않고 있었다.
"으음."
길게 침음을 토해내는 지 사장의 시선은 책상에 내려놓은 보고서를 향하고 있었다.
지 사장은 시선을 그대로 유지한 채 허 실장에게 묻는다.
"이게 전부야? 다른 내용은 없고?"
지 사장은 또 다른 내용이 없는지를 추궁하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허 실장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다.
"네, 그게 전부입니다."
허 실장의 대답은 짧았다.
지 사장은 다시 '으음'하고 침음하며 의자에 눕듯이 기댄다.
그가 생각에 잠겼을 때 하는 습관 중에 하나였다.
"이 단장과 한 감독이 고등학교, 대학교 선, 후배 관계인 건 그렇다 치자. 이 단장과 최 본부장이 사돈 지간이고, 또 최 본부장의 아들이 한 감독 고교 감독 시절에 선수로 뛰었다는 이 내용이 진짜 맞는 소리야?"
지 사장은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물어본다.
그가 조금 전에 확인한 보고서에는 한 감독과 이상현 단장, 최 본부장과의 연관성을 정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기획실에서 작성한 문건은 '한동현 감독, 이상현 단장, 최치열 본부장. 이상 세 명이 연관성 있음'이라고 최종 결론을 짓고 있었다.
며칠 전, 김 비서가 뽑아다준 임원명부를 보며 한동현 감독과 이상현 단장이 동문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확인한 지 사장이 기획실장인 허동준에게 두 사람의 연결고리를 파헤쳐보라는 지시가 이런 결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네. 그리고 한 감독을 자이언츠 감독으로 추천한 것이 최치열 운영본부장이고, 그걸 승인한게 이상현 단장입니다. 전임 사장님께서는 이 단장의 추천에 도장만 찍은 셈입니다."
허 실장은 1년 전에서 있었던 감독 임용 상황을 떠올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선택을 할 수가 있었다.
보고서 내역을 조작하여 이상현 단장과 거래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구단의 실세로 자리 잡은 이 단장과 밀월 관계를 유지한다면 앞으로 더 올라갈 자리가 있을 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잠시 해봤던 허 실장이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라인을 타려면 단장보다는 사장이지. 이상현 단장이나 최치열 본부장에게 집중된 권력이 약해지면 내가 구단 내에서 파고들 틈이 생기는 거야.'
그것이 허 실장의 생각이었다.
구단 내의 권력 순위를 보자면 사장인 지정만이 단연 1위였고, 그 다음이 이상현 단장, 최치열 본부장, 김석인 총괄 순이었다.
허 실장 본인의 순위는 대략 대여섯 번째 정도이지 않을까 예상이 된다.
그런데 만약 이 단장과 최 본부장이 이번 일로 타격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허 실장은 김석인 스카우트 총괄을 찾아갔었다.
"당연히 사실대로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더불어서 감독 임용 때는 묻혔던 한동현 감독의 고교시절 비리도 파헤쳐야지요. 그게 사장님이 원하는 바이지 않을까요?"
김 총괄은 단호한 목소리로 허 실장에게 주장했다.
구단 서열 4순위로 밀려나 있던 김 총괄은 이번 기회에 권력 구도에서 급부상하려는 야욕을 내비친다.
김 총괄은 그것을 위해 장시간에 걸쳐서 허 실장을 설득했고, 결국 그의 논리에 설득당한 허 실장은 모든 사실을 파헤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물이 지 사장의 책상에 놓여있었다.
"이것 참.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명망 있는 기업에 소속된 프로스포츠 팀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인사 청탁이라니. 요즘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참 나."
지 사장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더욱 몸을 파묻는다.
아무런 인적 인트라 없이 본사 이사진의 자리에 오른 지정만 사장이다.
결국 본사 사장 자리를 놓고 맞붙은 임원심사에 밀린 것도 그 놈의 인맥 때문이었다.
오직 실력만으로 승부를 보기에는 그물망처럼 이어진 본사의 인적 네트워크를 깨고 입성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 사장은 프로야구 현장의 감독 자리까지 인맥으로 임명된다는 사실이 못마땅하다.
지 사장의 가슴에 천천히 분노가 끌어 오르기 시작한다.
"보고서에 보니까 말이야. 한동현 감독의 고교비리가 결국 무혐의로 처분을 받았잖아. 그거 확실한 거야? 누가 뒤를 봐줘서 무혐의가 된 건 아니고?"
지 사장은 허 실장에게 시선을 돌리며 묻고 있었다.
이제 한 감독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 지정만 사장. 그의 서슬 퍼런 칼날이 한 감독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한 감독에 대해서 조금 더 조사를 해볼까요?"
허 실장은 지 사장의 심사를 읽어내고는 즉시 답한다.
그의 질문에 지 사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지금 당장. 고교시절 비리부터 해서 중등부 감독을 할 때와 모든 아마추어 지도자 시절 내용을 다 털어봐. 또 한 감독과 최 본부장, 그리고 이상현 단장의 커넥션에 불법적인 정황이 있는 건 아닌지 모두 캐봐."
지 사장의 지시에 허 실장은 고개를 끄덕인다.
즉시 지시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다.
"그런데 이 단장 쪽에서 가만히 있을까요?"
만약의 경우를 염려한 허 실장이 묻고 있었다.
그 물음에 지 사장은 씨익 하고 웃음 보인다.
"아, 내가 말을 안했네. 이상현 단장하고 최치열 본부장은 내일부터 시작될 카네기 리더쉽 세미나에 2박 3일 동안 참가하게 될 거야. 장소는 서울이니까 두 사람이 구단의 일에 참견할 수는 없지 않겠어?"
지 사장은 이미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혹시라도 있을 이 단장의 반격을 차단하기 위해 두 사람의 서울 출장 일정을 잡아놓은 것이다.
그 치밀함에 허 실장은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러니까 내 말 잘 알아들었지? 3일이야. 3일 동안 한 감독의 과거를 죄다 털어와. 흥신소에 의뢰를 맡기던, 사립 탐정을 쓰던, 기획실 직원들을 총 동원해서 이것들의 비리를 모두 알아오란 말이야!"
지 사장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이미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지 사장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출입문을 검지로 가리킨다.
"지금 당장! 내가 일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싶으면 어떻게 하라고 했어?!"
"넵! 일을 잘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허 실장은 즉시 대답하고는 출입문 밖으로 뛰쳐나간다.
홀로 남게 된 지 사장은 다시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흥분되었던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의 머리는 어느새 어제 상동에서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여태까지 거절했는데 이제 와서 감독 자리를 수락하는 것도 웃기지 않겠습니까?"
어제 손성조 감독은 그렇게 반문했었다.
혹시나 1군 사령탑 자리에 욕심이 있는지 흘러가는 질문으로 던진 말에 대한 손 감독의 대답이었다.
지 사장은 '역시나'하는 생각으로 주제를 전환하려 했었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진 손 감독의 말에 생각이 깊어진다.
"무엇보다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잘 하고 있는 한동현 감독이 있는데 저 같은 늙은이는 2군 자리를 지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손성조 감독은 그렇게 말을 덧붙였다.
오랜 사내 정치를 경험한 지 사장은 손 감독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는 않았다.
'그럼 명분이 있다면 1군 사령탑의 자리도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지 사장은 그동안 세간에 떠돌던 소문이 어쩌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1군 감독 자리에 욕심이 없다던 손 감독.
자신이 직접 만나본 손성조 감독의 눈동자에는 한 줄기 이루지 못한 미련의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 감정의 정체를 읽어낸 지 사장은 하나씩 계획을 세우게 된다.
"4할이 넘는 선수가 네 명이나 있다니. 재밌는 일이야, 손성조 감독. 야구계에서 왜 당신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거지?"
지 사장은 홀로 남은 사장실에서 어제 못한 질문을 던져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각종 자료들이 빽빽이 표시된 모니터 화면이었다.
모니터에는 그동안 자이언츠 2군에서 키워낸 주전 선수들의 자료와 손성조 감독이 직접 키워낸 2군 선수들에 대한 기록들이 나타나 있었다.
특히나 눈에 뛰는 점은 자이언츠 2군이 강팀인 상무를 밀어내고 올 시즌 2군 무대에서 뛰는 12개의 팀 중에 당당히 2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위인 경찰청과도 반 게임 차밖에 나지 않고 있어서 언제든 1위 자리를 노려볼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난 활약이었다.
"손성조 감독. 어쩌면 말이야. 당신 같은 원로가 필요할 때가 곧 올 것 같은데.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
지 사장은 또 다시 대답 없는 물음을 던진다.
모니터 화면에 비치는 지 사장의 얼굴은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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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에서 열리는 와이번스와의 시즌 첫 시리즈가 열리는 날.
강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이른 시간에 출근해 개인 훈련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가 훈련을 하고 있는 곳은 체력 단련실이나 실내 훈련장이 아닌 그라운드였다.
"강호야, 이제 롱 토스로 한 번 가볼까?"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은 자이언츠의 1루수인 김상훈 선수다.
그는 최근 들어 심화되고 있는 1루수 주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홈경기가 있는 날에는 항상 일찍 출근하는 강호보다 더 빨리 경기장에 도착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네, 아예 외야 쪽으로 나갈까요?"
"외야? 그래, 그것도 괜찮겠네. 좌익수 위치 정도에서 한 번 롱 토스 해봐."
강호의 제안을 승낙하는 상훈, 그는 강호에게 롱 토스로 공을 송구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의 요구에 강호는 '네'하고 답하며 외야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상훈 선배하고 송구 훈련을 하게 될 줄이야.'
강호는 부지런히 외야로 걸음을 옮기며 피식 웃음 짓는다.
처음에 상훈의 부탁을 들었을 때는 잠시 망설였었다.
선구안 훈련과 근력 운동에 집중하고 있는 자신에게 포구 훈련을 도와달라고 청한 상훈.
그의 부탁에 잠시 망설였던 강호는 흔쾌히 수락의 말을 전한다.
"마침 잘 됐습니다. 저도 송구 훈련을 좀 해야할 것 같았는데 상훈 선배님하고 같이 하면 되겠네요."
"진짜? 아, 강호야. 네가 그렇게 말해주면 나는 고맙지. 많이도 안 바랄게. 하루에 2시간만 연습하면 될 것 같아. 내가 나중에 제대로 한 번 쏠게. 고맙다. 강호야."
상훈은 포구 훈련을 도와달라는 자신의 말을 흔쾌히 수락하는 강호의 태도에 고마움을 느꼈다.
후배인 강호에게 고개를 숙일 정도로 간절했던 상훈.
항상 불안에 쫓겨 보이던 그의 표정이 예전의 밝았던 표정으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의 훈련은 시작이 되었다.
상훈에게는 1루수 포구 훈련, 강호에게는 전 포지션에 유용한 송구 훈련이었다.
강호는 이 기회에 다른 스탯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송구 능력을 끌어올리려는 생각을 가진다.
'선구안 훈련을 마무리하는 대로 송구 훈련을 하려 했는데 순서를 조금 바꿔도 큰 상관은 없겠지.'
강호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훈도 도울 겸 훈련 순서를 약간 바꾸기로 한다.
본인에게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이 정도 일로 베테랑 내야수와 친분을 쌓을 기회를 높치고 싶지 않았다.
최훈이 2군으로 내려가게 되면서 내야 자리에서 만큼은 3루수인 황제인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상훈이었다.
2016년부터 주전 1루수가 되었으니 연륜도 적지 않다.
선배들 중에는 박상현 투수나 유성철을 제외하고는 크게 친해지지 못한 강호로서는 이번 기회에 상훈과 친해지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 상훈이 요구한 대로 좌익수 자리에 서서 송구를 준비한다. 그에 앞서 자신의 스탯창을 한 번 확인해 본다.
백강호(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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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하다시피 가장 낮은 스탯인 선구안 다음으로 낮은 것이 송구능력이었다.
한 때는 강호의 자랑이었던 송구 능력이 단점으로 작용했었던 파워 스탯과 수치가 같아져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하고, 웃기는 일이기도 했다.
'내 파워가 송구 능력과 같아졌다니. 기가 막힌 노릇이네. 이 기회에 송구 능력을 확실히 키워둬야겠는데?'
강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롱 토스 훈련에 들어간다.
그가 던진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상훈의 미트에 틀어박힌다.
"나이스! 이 정도 각도로 던져주면 될 것 같아!"
거리가 꽤나 떨어져 있어서 상훈은 목소리를 높여 강호에게 자신의 요구를 전달한다.
그러면서 미트에 박힌 공을 꺼내 다시 강호에게 던진다.
터업.
강호는 그 공을 받으며 다시금 1루 베이스를 향해 공을 던졌다.
그렇게 두 사람의 훈련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시간은 흘러 와이번스와의 시즌 첫 시리즈 경기의 막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