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93화 (9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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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스윙

윤근호의 초구를 받아친 스윙은 오늘 강호가 휘두른 수많은 스윙 중에 한 번이었다.

한 번의 스윙.

그것을 위해 스프링캠프 때부터 시범경기까지, 그리고 매 경기 때마다, 또 훈련 상황에서 수만 번의 스윙을 휘둘렀었다.

이 한 번의 스윙을 위해 수만 번의 노력들이 녹아나 완벽한 스윙을 만들어낸다.

"와아아!!"

"넘어갔어!"

원정 팬들의 함성 속에 강호의 발걸음이 1루 베이스를 밟는다.

강호는 빠르게 베이스를 돌며 세 타석 만에 때려낸 홈런의 여훈을 느끼고 있었다.

시범경기 때 스스로의 힘으로 홈런 하나를 기록한 이후로는 올 시즌 '홈런' 아이템을 쓰지 않고 기록한 첫 홈런이었다.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었다.

펜스를 간신히 넘어가는 타구가 아니라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비거리가 상당했다.

이제 자신이 이런 홈런을 때려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잘 했어, 강호!"

3루 베이스를 돌자 베이스 코치가 강호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칭찬해준다.

시끄러운 함성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3루 쪽 관중석과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들에게는 시즌 중 하나의 기록에 불과하겠지만, 강호에게는 의미가 남달랐다.

'내가 정규 시즌 1군 무대에서 내 스스로 때려낸 첫 홈런이야. 다른 사람들은 이 기쁨을 이해 할 수 없겠지.'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해도 기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남들에게는 강호가 기록한 시즌 5호, 솔로 홈런일지 모르지만, 강호로서는 1군 무대 정규 시즌에서는 처음 때려내는 홈런이었다.

그 기쁨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팀이 0대 0 살얼음 같은 승부를 이어나가는 가운데 승부의 균형을 깨버리는 홈런이다.

중계석에 있는 한 캐스터의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강호의 홈런으로 0대 0 균형이 무너지고, 자이언츠가 1대 0으로 앞서갑니다! 백강호 시즌 5호 홈런!"

한 캐스터의 말과 함께 강호가 홈을 밟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정범 위원이 해설의 말을 꺼낸다.

"백강호 선수가 세 번째 타석에서는 드디어 해내네요. 앞선 두 타석에서는 아깝게 범타로 물러났었거든요. 제가 봤을 때는 백강호 선수의 타격감이 나쁘지 않았어요. 지금도 마음먹고 휘두른 스윙에 공이 얻어걸린 거예요. 가끔씩 이런 홈런이 만들어지니까 타격 코치들이 타자들에게 자기 스윙을 요구하는 겁니다."

이 위원의 말대로 타격 코치는 자기 스윙을 할 줄 아는 타자들을 선호한다.

그것은 비단 타격 코치만이 아니라 많은 지도자들이 요구하는 타자의 자질이기도 했다.

컨택 위주의 타격을 하는 타자들은 1, 2번의 테이블세터에 두고, 자기 스윙을 타격으로 연결시킬 줄 아는 타자들은 중심타선이 된다.

야구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에도 변하지 않는 룰인 것이다.

"잘 했어! 오늘은 안타가 왜 이리 늦나 했다."

"그래. 그렇게 노려 치니까 호수비고 나발이고 그냥 넘겨버리잖아. 스윙 좋았어."

한 감독에 이어 정호종 타격코치가 손뼉을 마주치며 칭찬을 해온다.

강호는 그들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여 답례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홈런 아이템을 썼을 때 스윙을 흉내 냈어.'

강호는 조금 전 자신이 만들어낸 홈런을 떠올리고 있었다.

완벽한 몸의 회전에 이어진 부드러운 스윙, 손아귀와 손목, 하체를 제외하고는 상체에는 억지로 힘을 주지 않은 깨끗한 스윙이었다.

예전 몇 차례 홈런 아이템으로 때려낸 스윙을 실전 무대에서 써본 적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뜬공으로 범타 처리되며 물러나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홈런'아이템을 사용했을 때 자연스럽게 휘둘러지는 스윙을 거의 비슷하게 재연해 낸 것이었다.

'체중이 늘어나고 파워가 증가해서 가능해진 일이야. 이제 부드러운 스윙으로도 홈런을 때려낼 정도의 힘이 생겨난 거야!'

강호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제 자신도 홈런 스윙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예전에는 홈런을 때려낼 파워가 없어 홈런 스윙을 흉내 냈을 뿐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흉내낸 스윙으로도 홈런을 때려낼 신체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강호는 지금의 느낌을 머릿속으로 새기며 네 번째 타석을 기다린다.

상황은 빠르게 흘러 8회 초 2대 0으로 앞선 상황에서 네 번째 타석에 오른 강호.

위즈의 바뀐 불펜 투수 고경표와 마주하게 된다.

'앞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냈었지? 지금은 1사 상황이니까 여의치 않으면 거를 각오로 어렵게 승부하자.'

고경표는 침착하게 강호를 상대할 생각이었다.

이를 상대하는 강호 역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황을 읽어낸다.

'오늘 내가 때려낸 타구를 본 상대 배터리도 타격감이 좋다는 것을 파악했을 거야. 여차하면 거를 생각으로 투구 패턴을 가져갈 거야. 이번에는 바깥 쪽 공을 노린다!'

강호는 투수 고경표의 눈을 응시하며 연습 스윙을 가져간다.

마운드와 타석에 선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시작되고, 잠시 후 경표의 초구가 던져진다.

"볼."

주심의 초구 판정은 볼이었다.

언더핸드로 던져진 경표의 초구는 업슛을 흉내 낸 것 같은 슬라이더였다.

타석에 선 강호가 움찔했을 정도로 지저분한 무브먼트였다.

백 도어와 업슛의 중간 형태 정도로 보이는 초구 슬라이더에 타석에 한 발짝 걸친 채 생각에 잠긴다.

전형적인 언더핸드 투수인 경표는 공은 빠른 편이 아니었지만, 타자의 눈을 속이는 다양한 변화구 구종을 장착하고 있었다.

안일하게 대처했다가는 삼진으로 물러날 확률이 높아보인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2구 선언은 스트라이크였다.

강호가 타석에 들어선 후 곧장 던져진 2구는 변종 패스트볼 계열의 움직임이 작은 속구였지만, 낮은 코스의 코너웍이 좋아 건드렸다면 땅볼이 되었을 공이었다.

강호는 다시 한 번 타석에 반 발짝 물러나 3구를 가늠해보고는 곧장 타석에 오른다.

'구종이 다양한 투수라서 구종보다는 코스를 정하고 가는 것이 좋겠어. 존 아래쪽으로 걸치는 코스가 많으니까 떨어지는 공을 노리자.'

강호는 타격 자세에 약간의 변화를 준다.

무게 중심을 약간 오른쪽에 두어 변화구와 낮은 공에 어퍼 스윙으로 대처할 작정이었다.

예전의 강호는 어퍼 스윙을 하지 않은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스스로의 파워에 믿음이 생겨나면서 그동안 몰래 연습해두었던 어퍼 스윙을 실전에서 시험해보려 한다.

펄럭.

경표의 상의 유니폼 스치는 소리와 함께 3구가 던져진다.

마치 바닥에 붙어서 떠오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공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날아든다.

'이거야!'

강호는 위로 향하던 공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가라앉는 것을 확인한 후, 오른쪽 다리에 중심을 두고는 마치 골프 스윙을 하는 것처럼 배트를 크게 휘두른다.

따악!

호쾌한 타격음과 함께 경표의 체인지업을 제대로 노려친 강호의 타구가 외야로 뻗는다.

3번째 타석에 이어서 나온 또 하나의 큰 타구에 중계석이 흥분한다.

"3구, 쳤습니다! 좌익수 뜁니다. 넘어갈 것이냐? 잡힐 것이냐? 아! 좌익수 정민수가 펜스 앞에 자리를 잡습니다. 오! 이걸 잡습니다! 좌익수 정민수의 슈퍼 캐치!"

한 캐스터는 강호의 공이 펜스를 넘어가기 직전에 잡히는 상황을 현장감 있게 중계했다.

곁에 있던 이 위원은 아깝게 잡혀버린 강호의 타구를 설명한다.

"아...백강호 선수 오늘 아쉬운 타구가 자주 나오네요. 오늘 타구의 코스가 모두 좋았거든요. 6회에 기록한 홈런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즈 수비수들의 파인 플레이에 막혀버립니다. 아쉽겠어요."

이 위원의 말대로 강호는 2루 베이스 직전에 멈춰선 채 아쉬워했다.

또 다시 위즈 야수의 호수비에 타구가 잡혀버린 게 못내 아쉽다.

그보다 아쉬운 것은 타구가 20센티만 더 뻗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좌익수 정민수가 펜스에 등을 댄 채로 점프하고서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멀리 뻗은 타구였다.

아직은 어퍼 스윙으로 때린 타구가 펜스를 넘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쉬워해 본다.

"잘 했어. 그런 타구를 외야수가 잡아버리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그래도 강호 너는 홈런 하나 때렸잖아."

덕 아웃으로 들어서자 선배 선수들이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벤치에 앉은 강호.

오늘의 타석 기회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9회 초까지 별다른 상황 없이 진행되던 게임이 9회 말, 위즈의 공격 상황에서 밀어내기 볼넷으로 역전을 허용하게 되면서 경기는 3대 2. 위즈의 역전승으로 끝이 난다.

또 다시 자이언츠 마무리인 손명학의 블론 세이브가 나온 것이었다.

아직 4월이 다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기록되는 손명학의 4번째 블론 세이브였다.

"자이언츠 벤치는 고민이 깊겠습니다. 마무리인 손명학 투수가 부진에 빠지면서 이기고 있던 경기에 찬물을 끼얹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거든요. 송명학 투수뿐 아니라 자이언츠 불펜 전반적인 문제일 거예요. 빨리 불펜진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정범 위원은 그렇게 오늘의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의 말대로 자이언츠 불펜진의 불안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다음 경기에서도 6이닝 2실점으로 잘 던진 성수제 투수의 호투를 날려버리는 방화를 저질러버린 것이다.

이제 심규민, 윤길준, 손명학으로 이어지는 자이언츠의 필승 카드는 재앙이 되어 있었다.

3대 2로 앞서가던 게임을 7대 4로 내어주면서 자이언츠는 위즈에게 위닝 시리즈를 내어주고 만다.

두 경기 연속 역전패에 코칭스태프와 선수뿐 아니라 자이언츠 팬들 역시 멘붕에 빠지고 만다.

그들은 자이언츠 기사마다 욕설이 담긴 악플을 달며 한 감독의 선수기용과 구단을 욕했다.

단지 한 감독과 구단뿐 아니라 연패의 주역들인 불펜 투수들에 대해서는 전 방위적인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원정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마친 강호가 룸메이트인 대우에게 물었다.

대우는 평소 강호를 따라서 악력을 기르는 운동을 하거나 VR안경으로 구종 연구를 하는 등, 여가 시간을 개인 훈련으로 보내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스마트폰에 코를 박은 채 무언가를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중이었다.

"요즘 팬들 분위기가 험악하네요. 댓글로 감독님이나 몇몇 선배님들을 잡아먹을 기세인데요?"

대우는 팬들의 댓글을 강호에게 보여주며 대답했다.

연이어서 방화를 저지르는 다른 불펜 투수들과는 다르게 대우나 박상현 등 일부 투수들은 굳건히 자이언츠 불펜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팀을 전 방위적으로 욕하는 댓글에서도 이름이 거론되는 경우가 없었다.

혹시나 있는 댓글들은 대우와 상현, 홍성빈이 없으면 자이언츠 성적이 꼴찌일지도 모른다는 칭찬 일색이다.

"당연하지. 지금 연패 중이잖아. 게다가 2위까지 올라갔던 팀이 6위로 내려앉았는데 좋아할 팬이 어디 있겠어?"

강호는 대우가 내민 스마트폰을 슬쩍 바라보고는 이내 관심을 끊는다.

그에게 악성댓글을 읽어보는 취미는 없었다.

그럴 시간에 샤워로 젖은 머리를 말리는 것이 유익하다는 생각이었다.

"선배님 이름도 요즘 자주 나옵니다."

시선을 돌리는 강호에게 대우가 새로운 댓글들을 펼쳐서 보여준다.

강호는 스마트폰 화면에는 시선조차주지 않은 채 답한다.

"됐어. 나는 관심 없어. 그런 댓글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야구를 하겠어? 너도 적당히 보고 관심을 끄는 게 좋을 거야."

강호의 생각은 악성댓글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쪽이었다.

최근 3경기에서 13타수 3안타로 부진해 지면서 자신에 대해 거론하는 자이언츠 팬들이 생겼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대우가 확인한 댓글 속에서도 강호의 최근 부진이 타이거즈 전 사구로 인한 뇌진탕 때문은 아닐까하는 의견이 조심스레 주장되고 있었다.

실상은 아이템 사용을 자제하며 자신의 타격 데이터를 모아보려는 생각이었지만, 팬들이 거기까지 알수는 없다.

"그래도 좋으시겠습니다. 선배님에게 욕을 하는 댓글은 아직 없네요. 온통 걱정 투성이인데 이 정도면 요즘 우리 팀 기사에 달리는 댓글 치고는 완전 양호한 겁니다. 감독님에 대한 댓글은 욕밖에 없어요. 한 번 읽어드릴까요?"

"됐다니까 그러네. 감독님 욕하는 댓글 들어서 뭐하려고? 그럴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자던지 잠이 안 오면 이거나 읽어보던지."

강호는 자신의 침대에 놓아둔 위즈 팀 리포팅 자료를 대우에게 휙 하고 던져준다.

그러자 스마트폰에 시선을 두고 있던 대우가 '와악!'하고 놀라며 리포팅 자료를 받는다.

"뭔가 읽고 싶다면 그거나 읽어보다가 일찍 자도록 해. 요즘 분위기 봐서는 너 내일 경기도 등판할 것 같은데 푹 쉬는 게 좋을 거야."

강호의 말대로 대우는 요즘 매 경기마다 1이닝 이상은 꼭 출전을 하고 있었다.

불펜진이 무너진 상태에서 한 감독 입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덕분에 대우의 구속이 평균 2~3km정도 떨어진 상태이지만, 아직 본인은 크게 심각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

"제가 뭐 구속으로 승부하는 유형인가요? 구속 떨어지니까 변화구 각도가 더 살아나잖습니까? 하하, 이런 걸 보고 소 뒷걸음질로 쥐 잡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우는 오히려 피로 누적으로 인한 새로운 발견에 웃음 짓는다.

계속되는 연투로 힘이 떨어진 대우는 최대한 부드럽게 팔로 스로우(follow through)를 가져가려고 애쓰다보니 변화구의 각이 커지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최근 경기에서 실전을 통해 변화된 팔로 스로우를 익히고 있는 대우. 다른 투수들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홀로 활약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쨌든 내일 경기에서 이기려면 네 역할이 중요해."

"네,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강호 선배님."

대우는 강호의 당부에 웃는 낯으로 대답하며 그가 건넨 자료를 펼쳐든다.

강호의 우려 속에 시리즈 마지막 경기는 곧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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