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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이 불다
일요일까지 타이거즈와의 3연전을 치르고 돌아온 선수들은 월요일 달콤한 휴식일을 맞이한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휴식 일에는 여가를 즐기지만, 주전 경쟁이 심한 포지션의 선수들은 휴식 일에도 구장에 나와 개인 훈련을 하곤 했다.
딱히 주전 경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호 역시 구장에 나와 개인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강호, 오늘은 들어가서 쉬는 게 어때?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기구 벤치에 앉아 구슬땀을 흘리는 강호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건다.
고개를 돌려보니 주전 1루수인 김상훈의 얼굴이 보였다.
상훈은 원래도 휴식 일에 구장에 나와 개인 훈련을 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누구보다 일찍 나와서 개인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타이거즈 전에서 선발에서 제외된 것이 그에게는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2군에서 올라온 1루수 이인호의 활약에 개인 훈련에 전념하던 그가 관심을 가질 정도로 강호의 안색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강호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평소에 비해 안색이 어두워 보였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몸이 조금 무겁기는 한데 잠을 못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잠을 못 잤다고? 진짜 잠 때문이야?"
수면 부족을 탓하는 강호의 말에 상훈이 눈썹을 씰룩인다.
그도 타이거즈 전에서 강호가 몸에 공을 맞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다행이도 MRI촬영 결과 뇌출혈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약간의 뇌진탕 증세는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그 날의 경기에서 한 감독이 강호를 병원으로 보내지 않는 것을 보고 상훈을 포함한 많은 선배 선수들이 분개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당사자인 강호가 휴식 일에도 구장에 나와 태연하게 개인 훈련을 하고 있으니 상훈으로서는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상훈 선배도 그 이야기인가? 그 날 이후에 한 감독에 대한 여론이 더욱 안 좋아지기는 했지. 내가 그 날 괜한 고집을 피웠구나.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선배들 입장에서는 그렇지가 않은 거겠지.'
강호 본인은 경기에 대한 열정이라 스스로 여기고 있었지만, 선배들의 입장은 또 다른 것 같았다.
스스로의 경솔함을 탓하며 잡고 있던 기구를 놓는다.
'광주에서 일이 많아서 그런지 조금 피곤하기는 하네. 상훈 선배의 말대로 운동은 적당히 하고 집에 돌아가서 쉬는 게 좋겠어.'
강호는 자신을 향해 걱정스레 쉴 것을 권하는 상훈에게 '그래야 겠습니다'라고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상훈은 자신의 권유를 따라주는 강호의 행동에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고는 어깨를 두드려준다.
자신이 걱정하는 바를 강호가 수용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마저 느끼는 상훈이다.
"그래. 오늘은 이만 들어가 봐라. 내가 입구까지 같이 가줄테니까. 이만 나가자."
상훈 본인의 개인 훈련도 바쁠 텐데 체력 단련장 입구까지 강호를 바래다줄 정도였다.
그렇게 함께 출입구로 나온 두 사람.
그곳에는 한 선수의 안내를 받으며 단련실로 걸어오는 초로의 신사가 보였다.
안내를 하는 쪽은 개인 훈련을 위해 구장에 출근한 권대우 투수였고, 안내를 받는 쪽은 강호가 익숙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강호가 놀란 듯 입을 연다.
"손 감독님!"
사직구장 체력 단련실을 방문한 사람은 2군 감독인 손성조 감독이었다.
손 감독은 근처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지 반듯한 정장을 갖춰 입은 모습이다.
그의 등장에 단련실에서 운동을 하던 모든 선수들이 입구로 나와 손 감독에게 깍듯하게 인사한다.
"다들 휴식 일에도 훈련을 하고 있었구나. 열심히 운동하는 것도 좋지만 휴식 일에 잘 쉬는 것도 프로의 자질이야. 모두 몸 관리 잘 하도록 해. 무리하지 말고."
손 감독은 휴실 일에도 땀 흘리는 선수들의 몸이 상할까 걱정스레 당부의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상훈과 강호를 포함한 선수들은 진심이 느껴지는 손 감독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는다.
왠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당부였다.
그리고 손 감독의 당부대로 휴식 일에도 잘 쉬면서 컨디션 관리를 하는 것이 땀 흘려 운동하는 것만큼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감독님. 그런데 사직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십니까?"
선수들을 대신해서 상훈이 손 감독에게 말을 붙여본다.
지금 단련실에서 운동하고 있는 선수들 중에서는 89년생인 상훈이 가장 선배였던 까닭이다.
손 감독은 '근처에 일이 있어 잠시 들렀다'라고 대답하며 강호에게 손짓한다.
"강호야. 주차장까지 짐을 좀 들어다오. 혼자 들고 가려니 조금 무겁구나."
손 감독은 강호를 부르며 손에 들고 있던 짐 하나를 주차장까지 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곁에 있던 대우가 '감독님, 제가 들겠습니다'라고 몇 번을 권유했지만, 대우에게는 '됐다'는 말로 사양하던 손 감독.
그제야 대우는 손 감독이 강호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 발짝 물러선다.
"네, 알겠습니다."
강호는 손 감독의 부탁에 얼른 짐을 건네받는다.
그런데 손 감독이 건넨 짐을 들어보니 생각보다는 훨씬 가벼웠다.
굳이 자신이 들지 않아도 손 감독 스스로 들고 갈 수 있는 무게였다.
칠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젊은 선수들 못지않은 근력을 자랑하던 손 감독이지 않은가.
강호는 짐이 가볍다는 점에서 대우와 같은 예상을 하게 된다.
'감독님께서 내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구나.'
그 점을 깨달은 강호는 손 감독과 나란히 걸음을 옮긴다.
"감독님. 들어가십시오!"
등 뒤에서 상훈과 선수들이 손 감독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그들도 눈치는 있어서 굳이 손 감독을 배웅하지는 않았다.
단련실에서 나와 복도를 한참 걸어 나갈 동안 말이 없던 손 감독은 문득 강호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며 묻는다.
"머리는 괜찮은 거야? MRI결과는 이상 없고?"
손 감독의 첫 질문은 강호의 부상여부였다.
그 역시도 타이거즈 전 경기를 본 것인지 강호의 MRI검사 결과부터 묻고 있다.
강호는 '네,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무 이상 없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며 손 감독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자 손 감독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연다.
"그럼 네 녀석이 염려할 짓을 안 하면 되는 거야. 왜 염려할 짓을 해서 늙은이를 자꾸 오게 만드는 거야?"
"네?"
손 감독의 질타에 강호가 눈을 크게 뜬다.
약간은 언짢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손 감독.
그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며 강호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앞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는 손 감독의 이어진 목소리가 강호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다치지 말거라. 너무 네 실력을 과신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잘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선수니까."
자신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지만, 손 감독의 목소리는 따뜻함을 담고 있었다.
그는 강호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단지 감독과 선수의 관계를 떠나 마치 가족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네...그러겠습니다."
강호는 괜히 죄스러운 마음에 목소리가 잦아든다.
걸음을 멈춘 채 답하는 강호, 손 감독 또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본다.
"체력 관리 잘 해두거라. 그렇게 몸 사리지 않다가는 여름도 되기 전에 퍼지고 말게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다치지 말고, 천천히 하거라."
강호는 손 감독의 말에서 형인 강수가 힘들 때마다 해주었던 마술 같은 문장을 떠올리게 된다.
"강호야 알겠지? 서두르지 말고, 다치지 말고."
형은 강호가 좌절하고 힘들 때마다 따뜻한 목소리로 이 말을 들려주곤 했다.
그 마술 같은 말은 불 꺼진 바다에서 비치는 등대 불처럼 강호가 시련의 순간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형의 말과 비슷한 내용의 말을 손 감독의 입에서 듣게 되자 더 큰 울림이 느껴진다.
순간 울컥한 강호는 길게 대답하지 못하고 '그러겠습니다'라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손 감독은 그런 강호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강호는 그런 손 감독의 뒤를 따른다.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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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했던 하루의 휴식일이 지나고.
자이언츠 선수단은 다음 시리즈를 위해 원정길에 오른다.
이번 시리즈 경기는 개막전 이후 처음으로 맞붙게 되는 위즈였다. 역시나 원정 경기인 까닭에 피로가 누적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어제가 휴식 일이어서 선수들의 얼굴은 좋아보였다.
특히나 얼굴이 좋아 보이는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강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손 감독과의 만남 이후로 남은 월요일 하루를 편하게 쉰 강호는 몸 상태가 아주 좋았다.
'휴식 일에 충분히 쉬는 것도 프로의 자질이라는 손 감독님의 말씀이 옳아. 제대로 휴식하고 나니까 컨디션이 이렇게 좋네.'
강호는 스스로의 몸 상태에 만족하며 미리 구단에 요청해 두었던 위즈 팀의 리포팅 자료를 들어 올린다.
두꺼운 자료는 왼손으로 받쳐 든 채 강호의 오른손은 커다란 주방용 장갑 안에서 연신 꿈틀거리는 모습이다.
이제 1군 선수들과도 꽤나 친분이 쌓여서 악력 운동 정도는 원정 버스에서도 해도 될 것 같았다.
"강호, 뭐하고 있어? 아까부터 오른손에 감고 있던 게 그거야? 너도 참 독한 놈이야."
그 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박상현 선수가 강호를 향해 말을 붙인다.
아직은 버스가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꽤 많은 선수들이 잠들지 않은 상태였고, 그 중 뒤편에 앉아있던 캡틴 강민수 선수가 상현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진다.
"강호 오른 손에 뭐가 있는데요? 뭔데, 뭔데? 응? 웬 벙어리장갑이야? 장갑 안에 뭐가 들었어?"
민수는 강호가 낀 주방용 장갑을 보여 달라고 재촉한다.
강호는 별 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장갑을 감고 있던 테이프를 풀었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악력기를 쥐고 있는 손이었다.
"제가 악력이 조금 약한 편이어서 요즘 악력 운동을 조금 하고 있습니다."
"크흐. 너도 참 별나네. 악력 운동을 하려면 그냥 하면 되지. 뭐 하러 이렇게 꽁꽁 싸매고 있어?"
"선배님들 주무시는데 시끄러울까봐 감아뒀습니다."
"하하. 하긴 버스에서 잠 좀 자려는데 악력기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신경 쓰이기는 하겠네. 강호, 완전 센스쟁인데?"
웃으면서 말하는 민수의 태도에 강호 역시 따라서 웃는다.
주장인 민수가 저렇게 말한다면 원정 버스 내에서 악력 운동을 흠 잡을 선수는 없을 것이다.
투수조 고참인 상현과 친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데 한 몫 한 것 같았다.
"근데 무릎에 올려둔 그건 또 뭐야? 자료 같은 거야?"
민수가 이번에는 강호가 보고 있던 리포팅 자료에 관심을 가진다.
'여기 한 번 보십시오'라 말하며 강호가 건넨 자료는 포수인 민수로서도 상당히 익숙한 자료였다.
"위즈 팀 리포팅 자료네. 근데 왜 타자들 걸 보고 있어? 상대 투수들 전력분석을 하려면 투수 자료를 읽어야지."
민수의 물음에 강호는 상대 타자들의 타구를 분석해서 수비를 쉽게 하려는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말에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수비율 1위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열심히 해'라고 말하며 자신의 자리로 물러난다.
그러자 곧 곁에 있던 상현이 강호를 향해 묻는다.
"강호야. 그런데 차 안에서 이렇게 읽고 있으면 멀미 안 해? 버스 안에서 무슨 이렇게 작은 글자를 읽고 있는 거야? 나는 잠깐 봤는데도 멀미할 것 같네."
상현은 유머러스한 표정으로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해 보인다.
그의 태도에 강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태생적으로 멀미를 안 합니다."
"허허, 대우도 멀미 안 한다고 하더니 너도 그래? 좋겠다. 나는 장거리 버스 탈 때마다 멀미약 먹고 타는데."
"선배님이요? 그럼 프로 생활 20년 동안 멀미약을 드셨다고요?"
"아니 20년 동안 먹은 건 아니고, 최근 몇 년 전부터지 아마. 처음에는 키미테를 붙였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별로 효과가 없네. 아, 멀미하는 것도 서러운데 나이까지 먹고 있네."
한탄하며 말하는 상현의 모습에 강호는 잠시 웃게 된다.
강호는 때때로 상현과 대화를 나누면서 리포팅 자료를 읽는데 대부분의 이동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면서도 악력기에 힘을 주는 오른손은 쉬지 않았다.
강호와 선수들을 태운 원정 버스는 어느새 수원시로 들어서고 있었고, 먼저 숙소로 지정된 호텔에 여장을 푼 선수단은 잠시 후 경기장을 향해 움직인다.
팀 전적 9승 9패. 순위 5위로 내려앉게 된 자이언츠가 상대하게 된 팀은 5승 12패로 팀 순위 9위에 머물고 있는 위즈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경기는 수원 위즈 파크에서 열리는 위즈와 자이언츠 간의 시리즈 첫 경기입니다. 저는 캐스터 한명진, 해설에는 이정범 위원이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6시 15분부터 중계에 들어간 중계석에서는 현장의 분위기와 양 팀 선수들의 컨디션 등을 설명하며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캐스터가 경기 전 중계에서 이 위원에게 재밌는 말은 전한다.
"그런데 이정범 위원님. 그거 알고 계십니까? 요즘 자이언츠에 가장 핫한 타자가 이 위원님의 현역 시절과 많이 비견되고 있다면서요?"
이정범 위원은 한 캐스터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하하'하고 웃으며 모른 채한다.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그런가요? 어떤 선수가 저하고 비교되고 있습니까?"
모른 척 물어보는 이 위원의 질문에 한 캐스터는 여훈을 남기는 말로 급히 상황을 정리한다.
노련한 캐스터의 노련한 중계였다.
"그 말씀은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는 대로 이어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애국가는 유명한 CCM 가수인 수향 씨가 불러주시겠습니다."
한명진 캐스터의 말이 끝난 후 초청 가수의 애국가 제창이 이어졌고, 곧 경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