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89화 (89/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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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이 불다

자이언츠 팬들의 기대 속에 강호의 안타가 좌익 선상을 꿰뚫는다.

강호가 만든 2루타에 1루 주자였던 전준오가 홈까지 쇄도하는데 성공하고, 스코어는 다시 8대7. 챔피언스 필드에 다시 자이언츠 팬들의 목소리가 퍼져나간다.

"지금은 2루수 안치형 선수가 커트를 잘 했습니다. 나지환 선수의 송구가 홈으로 향했더라면 백강호 선수가 3루까지 갔을 수도 있거든요."

중계석의 양현준 위원은 강호가 2루에 머문 것이 다행일 정도로 좋은 안타였다고 평가한다.

"다음 타자는 4번 타자 황제인 선수입니다. 오늘 황제인 선수 타격감이 나쁘지 않습니다."

조 캐스터는 다음 타석에 들어서는 제인의 기록을 읽어내며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황제인 때리라!"

"넘겨라!"

팬들의 기대 속에 타석에 들어선 제인.

그는 타이거즈 마무리인 한기준과의 5구째 승부끝에 특유의 스윙으로 큼지막한 타구를 날려보낸다.

홈런이었다. 8회말 타이거즈의 역전을 한방에 되돌려 버리는 시원한 홈런을 황제인이 때려낸 것이다.

9대 8. 승기는 다시 자이언츠로 넘어오게 된다.

"와아~황제인 최고다!"

자이언츠 팬들은 황제인을 연호하며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9회 초가 종료되고, 9회 말 타이거즈가 공격에 들어서자 팬들의 확신은 깨지고 만다.

9회 말 2사 2루의 상황에서 4번 타자 나지환의 안타로 동점 득점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마운드에 오른 투수가 마무리 투수인 손명학이라는 사실이 자이언츠로서는 뼈아픈 사실이었다.

오늘 경기에서 양 팀 마무리 모두가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는 수난시대가 된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연장전.

경기는 결국 11회 말, 1사 1,2루 상황에서 우전 안타를 때려낸 타이거즈 5번 타자 이범화의 끝내기 안타로 격전은 끝이 난다.

경기 시간이 4시간 28분에 달할 정도로 치열했던 경기는 결국 10대 9. 타이거즈의 역전승으로 종료된 것이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병원에서 이 시간에도 MRI를 찍어주던가요?"

김 수석과 함께 전남대 병원을 다녀온 강호에게 숙소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우가 질문을 던진다.

강호는 '응'하고 대답하며 들고 있던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늦은 시간이라 MRI촬영을 하지 못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타이거즈 구단에서 미리 요청을 해둔 것인지 밤늦은 시간에도 MRI촬영을 할 수 있었고, 담당의에게 아무 이상 소견이 없다는 말과 소견서를 받아들고서야 김 수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강호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온다.

함께 동행했던 구단 직원과 강호는 김 수석이 사주는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뒤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확한 결과는 구단에서 알아보겠지."

강호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우의 질문에 대답한다.

자신의 상태가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프리마켓 시스템의 보호로 경기 중에는 부상을 입지 않는 자신이다.

단지 강호가 걱정하는 것은 타이거즈와의 2차전 선발 라인업에서는 제외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자이언츠 코칭스태프가 뒤늦게 비난여론을 의식해 강호에게 하루 정도의 휴식일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한 감독으로서는 해설위원인 양현준이 심한 비난을 할 줄을 예상하지 못했고, 또 그로 인한 비난 여론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치러진 타이거즈와의 2차전은 자이언츠의 5대 2 완패로 끝이 난다.

한 감독은 경기 후반부에 강호의 대타 카드를 꺼내려고 했지만, 항명을 각오한 김 수석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약간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치러진 3차전 경기마저 4대 1로 패하며 시리즈 스윕을 당한 자이언츠, 겨우 지키고 있던 3위 자리를 히어로즈에게 내어주며 5위까지 추락하고 만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지금 이 댓글들 보여? 구단 수뇌부를 보고 똥 대가리잖아. 구단 수뇌부면 사장인 나를 포함한 건데. 내가 똥 대가리야?! 아놔."

구단 본부 사장실에서 불만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목소리의 주인은 지정만 사장이었고, 그의 앞에는 고개 숙인 기획실장 허동준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내가 똥 대가리면 너도 똥 대가리야. 너도 구단 수뇌부잖아. 우리 구단이 왜 이렇게 욕을 먹는지 한 번 말해보라고."

속으로 '안 들린다. 안 들려'라고 주문을 외우고 있던 허 실장이 지 사장의 호통에 퍼뜩 고개를 든다.

속으로는 '아니, 그럼 구단 순위가 5위까지 떨어졌는데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일이죠'라고 항변하면서도 겉으로는 지 사장의 성난 기분을 잠재울 말을 꺼낸다.

"사장님.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팬들의 인식이 단번에 안 좋아진 이유가 분명 있을 겁니다. 즉시 간부회의를 열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낸 제안에 만족해하는 허 실장.

허 실장은 자기 혼자 독박 쓸 생각이 없었다.

단장 이하 모든 간부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혼자 먹을 욕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 허 실장. 네 말이 맞아. 지금 당장 똥 대가리들을 죄다 불러 모아. 30분 이내로 사장실로 다 오라고 그래. 단장, 본부장, 스타우트 총괄, 부장급 이상 간부 사원도 죄다 불러 모아! 내 이 똥 대가리 자식들에게 변명이라도 들어야겠어."

지 사장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간부인사들을 네티즌이 선사한 비속어 별명으로 지칭하며 비상대책위원회 소집을 명한다.

그렇게 마련된 회의가 시작되고, 지 사장은 대형 LED TV와 연결된 PPT 리모컨을 조작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린다.

"다들 이거 보이나? 주초에 벌어진 베어스 전까지만 해도 칭찬 일색이잖아."

지 사장은 그렇게 말한 후 리모컨으로 캡쳐 화면을 넘긴다.

기사마다 달린 댓글을 깔끔하게 캡쳐 해 파일화한 것은 지정만 사장 본인이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댓글에 달린 비속어와 욕설을 읽어내며 점점 언성을 높인다.

"그런데 타이거즈 전부터 여기 이 댓글 보여? 똥, 대, 가, 리. 구단 수뇌부들 모두 똥 대가리라잖아. 나 포함해서 당신들 전부 구단 수뇌부잖아. 여기 똥 대가리 아닌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지 사장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침묵에 빠진다.

대신 복잡한 생각들이 간부들의 머리를 스친다.

'오늘도 퇴근 일찍 하기는 글렀네. 와이프에게 오늘도 늦는다고 전화해 둬야겠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 나이가 몇 살인데 똥 대가리가 뭐야? 이 정도면 인격모독 아닌가?'

'안 들린다. 안 들려. 귀 닫고, 눈 가리고 가만히 앉아있다 나가자."

'이럴 때는 단장님이 나서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나 같은 부장급 사원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매번 간부회의 때마다 부르시는 거야? 단장님이 뭐라고 대답이라도 해보세요.'

복잡한 생각이 지나고,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시선이 이상현 단장에게로 쏠린다.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이 단장은 지난 번 회의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만다.

"흠흠."

헛기침 소리로 지 사장의 이목을 끌어버린 것이다.

'허?! 내가 또 무슨 짓을? 이런 젠장. 헛기침하는 버릇 좀 고치던지 해야지.'

이 단장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원 없이 '험험'거리며 헛기침을 해보이고는 천천히 입을 연다.

"이글스 전부터 시작된 4연승으로 팬들의 기대감이 커진 것은 사실입니다. 팀 순위가 2위까지 올라갔으니 기대할 만도 하고요. 지금 팬들의 분노는 성적 하락으로 인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이상현 단장의 말에 회의에 참가한 다른 간부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프로 스포츠는 승패의 결과와 순위에 팬심이 좌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막전 1패 이후 승리를 쌓아가던 팀이 타이거즈 전 스윕 패로 순식간에 상위권 싸움에서 이탈해 버리니 팬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였다.

간부 사원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일로 일희일비 한다면 시즌이 막바지에 도달했을 때는 신경 쇄약에 걸릴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지 사장의 분노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다는 입장이었다.

"오오~그럼. 이 단장의 말대로라면 우리 팀이 꼴찌로 떨어지면 팬들의 기대도 없으니 더 이상 비난의 댓글이 없을 거라는 소리야?"

이 단장의 말에 지 사장은 기괴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이상한 논리를 펼친다.

자신의 말을 잔뜩 비꼬는 지 사장의 태도에 이 단장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얼른 변명의 말을 꺼낸다.

"그 말씀이 아니라 성적 변동으로 인한 비난은 늘 있어왔다는 말씀입니다. 팀이 잘할 때도 욕하는 것이 팬들의 심리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이니 조금만 차분히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

이 단장의 의견은 기다리자는 쪽이었다.

어차피 팀이 자기 순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비난이 쏟아질 것이고, 그 비난에 일일이 대처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상현 단장이 예상하는 올해 팀 순위는 딱 5위. 그 이상을 기대하기에는 투자도 제대로 없었고, 2군 팀에 대한 지원도 평범한 편이다.

자이언츠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순위는 지금의 순위인 것이다.

"손 놓고 기다리자고? 그럼 이 단장이 생각하는 우리 자이언츠의 예상 순위는 어떻게 되나?"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물어오는 지 사장의 목소리에 이 단장은 하마터면 '5위요'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그렇게 답할 수는 없었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열렸던 수뇌부 회의에서 팀의 상위권 도약 달성을 위한 시즌 플랜이 떠오른 것이다.

그 프레젠테이션을 발표한 것은 다름아닌 이 단장 본인이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자신의 말을 바꿔버린다면 지 사장의 반응이란 뻔한 것이다.

"물론 상위권입니다만. 아직은 시즌 초반이지 않습니까? 휴고나 지터가 반등할 가능성도 있고요. 조금은 기다려 보시는 게..."

이 단장이 말하는 와중에 거론된 두 명의 이름으로 인해 지 사장의 눈이 번쩍 뜨여진다.

그는 곧장 이 단장의 말을 끊고 소리친다.

"바로 그거야! 휴고, 지터! 대체 그런 외인 선수를 누가 사오자고 한 거야? 에이스 역할을 해야 하는 지터가 2군으로 내려가고, 휴고가 헤롱헤롱 거리는데 팀 성적이 잘 나올 수가 있겠어? 백강호나 권대우 같은 신인 선수들이 활약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당신들 백강호, 권대우 연봉이 얼만 줄 알아? 고작 2천 9백만 원이야! 지터의 10분의 1밖에 안된단 말이야. 이게 무슨 말 같아?"

다시 목소리를 높이는 지 사장의 시선은 이 단장에게서 김석인 스카우트 총괄에게로 옮겨진다.

외국인 선수를 영입해오는 결정은 스카우트 팀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을 최종 결정하는 것은 스카우트 총괄의 역할이다.

물론 팀의 사령탑인 한동현 감독과 협의를 통해 사장과 단장의 결재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스카우트 팀에서 명단을 올린 선수들에 한해서만 선택된다.

당연히 휴고과 지터를 추천한 스카우트 총괄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아, 망했네! 왜 불똥이 내 쪽으로 튀는 거야? 이거 뭐라고 말해야 돼? 지금이라도 사도스키 스카우트가 추천한 용병으로 교체하자고 권해야 되나? 그럼 욕먹을 텐데. 에라, 모르겠다.'

외국인 선수에 대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스카우트 총괄은 일단은 자신에게 겨냥된 총알을 누군가의 이름으로 막아내고자 했다.

그가 꺼낸 이름은 한동현 감독이었다.

"그게 말입니다. 후보군 중에서 지터와 휴고를 선택한 것은 한동현 감독입니다. 제가 추천했던 최종 후보군은 투수 5명, 타자 5명이었는데 한 감독이 직접 휴고와 지터를 선택한 겁니다."

최종 결정권자는 결국 지정만 사장 본인이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김 총괄은 한 감독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에게 향할 비난을 조금은 줄여보고자 했다.

그러자 단장인 이상현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아, 왜 한 감독을 걸고 넘어져? 스카우트 총괄인 본인이 책임을 져야지?!'

이상현 단장은 왠지 불안해 졌다.

한 감독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된다면 그를 자이언츠 감독 자리에 앉힌 자신 역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사조치는 없겠지만, 한동안 발언권이 약해지는 것은 각오해야했다.

"한 감독? 그렇단 말이지."

지 사장은 한 감독이라는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곁에 있던 기획실장 허동준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 감독과 계약기간이 언제까지야?"

"네. 올해까지입니다. 2년 계약이니까 올 시즌이 끝나면 계약이 끝납니다."

"올해까지. 음~"

허 실장의 대답에 지 사장은 다시 생각에 잠긴다.

한 감독과 관련이 깊은 이상현 단장은 지 사장의 사소한 행동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좋아. 일단은 알겠어. 우선 휴고와 지터의 몸 상태를 다시 한 번 체크하고. 2군에서 올릴만한 선수가 있는지 검토하도록 해. 한 감독에게 알려서 팀 성적에 도움이 안 되는 선수는 망설임 없이 2군 선수와 교체하도록 지시하고."

지 사장은 웬일인지 정상적인 업무 지시로 회의를 마무리한다.

그런 지 사장의 업무용 PC에는 강호와 관련된 팬들의 댓글이 수백 장이나 캡쳐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채 회의를 끝내는 지 사장.

다시금 바빠지는 구단 수뇌부와 함께 지 사장의 움직임도 바빠진다.

회의가 끝나고, 간부들이 모두 사장실을 나서자 홀로 남은 지 사장은 인터폰의 버튼을 누르며 입을 연다.

"사도스키 스카우트한테 연락해서 화상 미팅 준비하라고 해. 2시간 정도 후에 시작할 테니까."

-네, 사장님.

비서 김유진의 대답과 함께 지 사장은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댄다.

그의 시선에는 한 감독의 전횡을 성토하는 비난의 댓글들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지 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인터폰의 버튼을 누른다.

"김 비서. 한 감독 인사내역서하고 구단 임원들 인사내역서, 죄다 프린트 해와."

-구단 임원들이면 어디까지 출력하면 될까요?

"부장급 이상, 간부 사원들부터 해서 내 아래로 이상현 단장 것까지 죄다!"

-알겠습니다. 30분 내로 출력해 가겠습니다.

"15분 줄게. 시간 잰다."

-....네. 15분이요.

비서에게 인터폰을 통한 업무 지시를 마친 후, 다시 의자에 기대는 지정만 사장.

그의 시선은 어느새 모니터 화면을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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