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7 / 0335 ----------------------------------------------
강호, 전략을 세우다
강호와 제인이 눈빛으로 의견교환을 하고 있을 무렵, 지시를 해야하는 자이언츠 수뇌부들은 다른 일로 정신이 없었다.
"지금 내려야 됩니다! 분명 머리에 제대로 맞았다고요. 멀쩡할 리가 없잖습니까? 당장 전대 병원으로 데려가서 MRI를 찍어봐야 된다고요!"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은 쓰러져 있던 강호를 직접 확인한 김민철 수석이었다.
불편한 목소리로 건의를 하는 그의 말에 주변 코칭스태프들이 조용히 입을 다문다.
지금은 TV로 중계되고 있는 정식 경기. 괜히 덕 아웃에서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것은 없다.
그 점을 의식한 김 수석도 목소리는 한껏 고조되어 있었지만, 얼굴 표정만큼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가끔 중계 카메라가 덕 아웃을 잡더라도 얼굴 표정은 잡을 수 있을지언정 오디오까지 함께 담지는 않기 때문이다.
"강호 본인이 괜찮다지 않습니까? 김 수석은 직접 확인을 했으면서도 자꾸 그러십니까? 강호가 지금 사지 멀쩡하게 1루에 출루해 있잖아요. 지금 3번 타순에서 강호를 빼면 오늘 경기를 내주자는 말입니까?"
김 수석의 질타를 받은 한 감독은 무척이나 불편한 목소리로 따져 묻는다.
그러면서도 중계 카메라를 의식하여 얼굴에는 미소를 담은 상태였다.
김 수석 역시 카메라를 의식한 미소로 한 감독의 말에 반박한다.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공 맞을 때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퍽 소리가 났다고요! 변화구도 아니고 153짜리 강속구를 머리에 맞았습니다. 선수가 멀쩡히 일어났다고 해도 당연히 병원으로 일단 데려가야지요. 지금은 뇌진탕 증상이 없어 보여도, 머리 안에 출혈이라도 있으면 며칠 후에 뇌출혈로 쓰러질 겁니다! 제가 당장 병원에 데려가겠습니다."
한 감독에게 따져 말하는 김 수석의 태도에 근처에 물러나 있던 코칭스태프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외상으로 인한 뇌출혈은 당장 증상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시간이 경과하게 되면 더 큰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강호 본인이 괜찮다지만, 뇌로 인한 출혈은 통증이 없다.
아프지 않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닌 셈이다.
"우리 운영팀에 요청하면 타이거즈 구단 지정 전대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강호를 대주자로 교체하고, 이송 요청 하겠습니다."
김 수석은 병원 이송 절차까지 거론하며 한 감독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한 감독은 김 수석의 말에 곱게 따를 생각은 없었다.
지금 결정을 되돌리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코칭스태프에게 나약한 감독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이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제가 절차를 몰라서 이러는지 아십니까? 강호 본인이 괜찮다잖아요. 정 그렇게 걱정되시면 경기가 끝난 후에 병원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
결국 한 감독은 김 수석의 요청을 절반만 수용해서, 경기가 끝난 후 강호를 지정 병원에 보내기로 한다.
김 수석은 계속해서 사태의 시급함을 알리고, 강호를 교체해줄 것을 건의했지만 한 감독 역시 더 이상은 물러나지 않았다.
'별 수 없구나. 경기가 끝나는 대로 강호를 내 차에 태워서라도 병원으로 데려가야겠어.'
김 수석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한 감독과의 논쟁을 멈추고, 시선을 강호에게로 돌린다.
그렇게 두 사람의 논쟁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하지만 중계석에서 벌어지는 대화에 대해서는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 알 길이 없었다.
"아아...지금 머리를 제대로 맞았어요! 백강호 선수가 스티븐에게 헤드샷을 맞고 쓰러집니다."
강호가 스티븐의 공을 맞고 쓰러졌던 순간, 중계석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온다.
공이 머리 쪽으로 날아가는 아찔한 장면에 이어 급하게 몸을 튼 강호의 헬멧 뒤쪽을 강타하는 강속구.
충격이 얼마나 강했던 것인지 공이 닿자마자 헬멧은 벗겨지고, 강호는 타석에 쓰러진다.
이 모습에 양현준 위원은 '아아'하는 탄식을 토해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저 정도 공이면 뇌출혈이 올 수도 있거든요?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는 곧바로 앰뷸런스를 요청해서 병원으로 후송을 해야 합니다. 이런 부상은 선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에요. 절대!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현역 시절에 머리에 맞는 공을 경험해본 양 위원이었기에 지금 강호가 맞은 헤드샷이 얼마나 위험한 공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금 백강호 선수가 몸을 일으키는데요?"
조 캐스터가 강호의 상태를 알리자 곧바로 양 위원의 말이 이어진다.
"자력으로 일어난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닙니다.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야 해요. 어?! 지금 뭐하는 겁니까? 지금은 출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백강호 선수의 부상을 먼저 염려해야 되요. 코칭스태프가 강제로라도 선수를 데리고 내려가야죠. 저렇게 출루하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
양 위원은 한 감독이 김 수석을 끌고 덕 아웃으로 들어가고, 강호가 1루 베이스를 향해 걸음을 떼자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지탄의 말을 한다.
곁에서 중계를 해야 하는 조 캐스터는 흥분한 양 위원을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담당 PD가 해설위원 전용 모니터에 '진정하세요. 양현준 위원님'이라고 타이핑을 했음에도 양 위원은 고조된 목소리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자이언츠는 2,000년에 2루 베이스에서 쓰러진 임수현 선수를 잊은 겁니까? 지금 영상을 보세요. 153km짜리 강속구가 머리를 제대로 맞혔어요! 당장 눈에 보이는 증상이 없더라도 갑자기 정신을 잃을 수도 있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1루에 출루해 있는 백강호 선수를 빼고, 대주자를 기용해야 됩니다.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보고 괜찮다고 하면 그 때에나 선수를 다시 기용하는 거지, 이런 식은 아니지 않나요?"
양 위원은 오랜 기억 하나를 떠올리고는 더욱 분개하여 언성을 높인다.
그가 거론한 이름은 임수현이라는 오래된 선수였다.
한 때는 마림포로 불리며 자이언츠의 거포로서 활약했었지만, 2루 베이스 위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면서 많은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현장에서 제대로 된 응급처치만 있었더라면 임수현 선수가 식물인간까지 되는 일도 없었고, 10년 후 사망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입을 모으곤 한다.
양 위원이 임수현 선수의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가 양 위원과 동갑내기 친구였던 까닭이었다.
"저는 이런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선수 본인이 괜찮다고 해도 감독이나 코치들이 선수를 보호해 줘야죠. 경기 중에 병원에 데려갈 게 아니라면 경기가 끝나고 나서라도 반드시 병원에 가 봐야할 것 같아요. 백강호 선수, 아무 이상 없기를 바랍니다."
양 위원은 어렵게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그렇게 결론을 낸다.
더 이상 발언이 길어지면 자이언츠 구단 측에서도 불편할 수 있는 일이라 이미 늦은 면이 있었지만, 분노를 이쯤에서 가라앉히기로 한다.
"자아. 그럼 다음 타석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양현준 위원이 겨우 진정을 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조 캐스터가 얼른 중계를 이어나가며 분위기를 전환한다.
이 때 이들은 알지 못했다.
흥분된 어조로 열을 올린 양현준 위원이나 조 캐스터. 그리고 덕 아웃에서 언성을 높이던 한 감독과 김 수석.
그리고 tv중계를 보며 한 감독을 욕하던 팬들 또한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들이 시간이 지나 어떠한 후폭풍으로 자이언츠 팀에 휘몰아칠 지는 이때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시간이 꽤 지난 후의 일이었고, 지금은 다가올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한 채 경기에 전념하게 된다.
자신에 대해 어떤 말들이 오고가는지 알지 못하는 강호는 바뀐 투수를 노려보며 2루로 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뛰겠다는 거야? 잘 됐네. 아직 투구 준비도 안 됬는데 견제구나 던지면서 시간이나 끌면 되겠어.'
바뀐 투수 김일환은 세트포지션 자세를 취하다가 강호의 리드 폭을 확인하고는 얼른 견제구를 던진다.
급히 불펜에서 몸을 풀고, 마운드에 올라서도 연습구를 던졌지만 릴리스 포인트가 전혀 맞지 않았다.
이대로 투구에 들어가 봐야 볼넷을 남발하다가 교체될 뿐이다.
"세이프."
1루심의 세이프 판정과 함께 강호가 몸을 일으킨다.
상의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다시 리드폭을 깊게 가져가는 강호. 그에게 또 다시 견제구가 날아들었다.
"세이프."
이번 역시 세이프.
강호는 두 번의 견제구를 통해 김일환 투수의 의도를 파악하게 된다.
'견제구를 던지면서 시간을 끌겠다는 거야. 뜻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지.'
강호는 즉시 전략을 바꾼다.
리드폭을 대폭 줄여서 더 이상 견제구를 던지지 못하게 했다.
기존에 비해 1/3밖에 되지 않는 강호의 짧은 리드에 김일환 투수도 더 이상 견제구를 던지지 못했다.
두 발짝만 귀루해도 베이스를 밟을 수 있는 주자에게 견제구를 던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쳇, 눈치 한 번 빠르네.'
결국 견제구를 포기한 일환은 초구를 던지기 위해 포수 싸인을 확인한다.
포수의 초구 싸인은 포심 패스트볼.
아직 릴리스 포인트가 맞지 않는 김일환 투수를 배려한 싸인이었다.
일환도 그런 포수의 의견에 동의하며 곧장 세트포지션에 들어간다.
그리고 초구를 던지려는 사이 리드 폭을 줄인 강호가 2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따악!
그와 동시에 타자인 제인이 가운데로 몰리는 일환의 타구를 좌중간으로 당겨 쳤다.
강호의 도루를 발견하고는 2루 쪽으로 자리를 비운 유격수. 제인이 때린 공은 유격수가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깔끔한 좌전 안타로 만들어진다.
이미 스타트를 끊었던 강호는 리드 폭을 적게 가져갔음에도 불구하고 2루 베이스를 밟은 후 3루를 향한다.
'안타가 짧아. 홈은 무리야.'
강호는 공을 잡은 좌익수가 3루를 향해 공을 던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속도를 더욱 높인다.
3루 주루코치가 3루를 향해 슬라이딩하라고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의 신호에 따라 3루를 향해 미끄러져 들어간다.
"세이프!"
3루심의 판정은 세이프였다.
4번 타자 황제인의 안타로 2사 상황에서 주자 1, 3루 찬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강호는 흙이 묻어 엉망이 된 유니폼을 털어내며 3루 코치의 지시를 듣는다.
"강호, 더블 스틸이야. 벤치 싸인 잘 보고 있어. 제인이가 2루로 뛸 때, 포수가 2루로 공을 던지면 곧 바로 홈으로 뛰도록 해."
혹시 타이거즈의 3루수가 들을까봐 귓속말로 지시를 내리는 3루 베이스 코치.
강호는 그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 작전이 실패해도 1회 2사의 상황이라 큰 손해는 아니었고, 작전이 성공하게 되면 상대 배터리를 완전히 뒤흔들 수 있는 득점이 될 것이다.
강호는 혹시라도 상대 배터리가 더블 스틸 작전을 눈치챌까봐 이번만큼은 리드 폭을 평범하게 가져간다.
1루 주자인 제인 역시 크지 않은 리드 폭으로 강호와 눈빛을 교환한다.
'강호, 이번에는 제대로 뛰어줘야 돼.'
제인의 눈빛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강호는 제인의 주문에 또렷한 눈빛으로 응수한다.
'제가 언제 대충 뛰는 거 보셨습니까? 2루로 시선만 묶어 주십시오.'
강호는 제인에게 짧은 신호를 보낸 후 투구에 들어간 투수를 응시한다.
초구는 초점이 맞지 않는 포심 패스트볼. 주심의 판정은 볼이 된다.
이어서 하나의 공을 더 지켜보며 이제 카운트는 1볼 1스트라이크.
어렵사리 스트라이크를 잡은 김일환 투수가 안심하며 3구를 던지는 순간, 제인이 2루를 향해 달린다.
"2루!"
누군가의 외침에 포수 이용구가 재빨리 몸을 일으킨다.
그러나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송구를 망설이고는 3루 쪽으로 몸을 튼다.
이용구가 던진 공은 제인이 뛰고 있는 2루가 아니라 강호가 있는 3루로 던져진 것이다.
그 상황을 파악한 강호가 즉시 몸을 돌린다.
"세이프."
3루심의 선언은 이번에도 세이프였다.
김일환 투수의 투구 동작과 포수 이용구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던 강호는 어렵지 않게 3루로 귀루 할 수 있었다.
포수 이용구의 센스로 더블 스틸은 실패했지만, 상황은 2사 2, 3루로 바뀌게 된다.
여기에 볼 카운트는 2볼 1스트라이크.
김일환 투수는 여전히 제구가 잡히지 않는 공을 던지며 타자 강민수가 볼넷으로 출루한다.
이제 상황은 2사 만루. 타이거즈 덕 아웃에서 투수 코치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투수 교체로구나.'
강호는 타이거즈의 투수 교체를 예견하고는 3루 베이스를 밟은 채 허리를 편다.
강호와 제인의 센스 있는 플레이로 어느새 상황은 2사 만루 상황에서 타이거즈의 세 번째 투수가 마운드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