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85화 (85/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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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전략을 세우다

원정숙소로 정해진 호텔에 짐을 푼 자이언츠 팀에게 약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경기 시간보다 5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이유로 숙소 내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낼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원정 숙소라고 해서 외출 금지령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외출 할 선수들은 호텔 밖으로 나가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딱히 외출하는 선수들은 없었다.

괜히 지리도 익숙하지 않은 광주에서 밖으로 나가 어떤 일에 휘말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두가 프로 선수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라도 외출을 자제하는 모습이다.

똑똑똑. 똑.

강호는 자신의 숙소 방을 두들기는 노크소리에 '들어오세요'라고 답하며 익숙한 얼굴을 기다린다.

원정숙소에서 저렇게 이상한 리듬으로 노크하는 인물은 한 명밖에 없다.

곧 최근 들어 급 친해진 박상현 투수의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강호의 곁에 얌전히 앉아있던 대우가 자리에 일어서서 공손히 인사한다.

강호 역시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려는데 상현이 그것을 만류한다.

"아, 안 일어나도 돼. 앉아 있어. 방 주인이 편하게 있어야지. 안 그래?"

웃으며 만류하는 상현의 말에 대우가 '저도 이 방 주인인데 말입니다?'라는 표정을 잠시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미처 대우의 얼굴표정을 읽지 못한 상현의 시선은 강호에게로 향한다.

"강호, 너 타순 변경됐던데, 알고 있어?"

상현의 말에 강호의 눈썹이 씰룩인다.

1번 타순에서 잘하고 있는 자신의 자리를 또 다시 이동할 이유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은 고민에 앞서 한참 선배인 상현의 말에 답하기로 한다.

"몰랐습니다."

몰랐다는 강호의 대답에 상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혀를 찬다.

"쯧쯧. 내가 혹시나 해서 와본 건데. 역시나였네. 너 타이거즈 전부터 타순 바뀌더라. 3번 타순으로."

잠시 인상을 찡그렸던 강호는 상현의 말에 반색한다.

3번 타선은 중심타선의 시작점이었다.

자신을 3번 자리로 이동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타격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3번 말입니까?"

강호는 확인 차 다시 물어본다.

"그래. 3번. 내가 볼 때는 말이야. 강호, 네 타순 변경은 페이크야. 9번에 있던 중호를 1번으로 올리고, 원래 3번에 있던 김상훈을 라인업에서 빼버렸어. 1루 자리에는 2군에서 올라온 그 이름이 뭐더라...아! 이인호. 이인호를 1루수에 선발 기용했다더라. 야수들 타순을 대대적으로 움직이면서 너를 중심 타선에 놓는 기용으로 팬들의 이목을 속이려는 거야. 한 감독이 무리하게 라인업을 변경할 때마다 사용하는 전형적인 행태지."

상현은 한 감독의 선수기용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여러 차례 눈썹을 씰룩이며 불퉁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강호가 상현의 말에 생각에 잠긴 사이 대우가 대신 입을 연다.

"선배님. 아무리 그래도 팀의 중심타선인데 페이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감독님께서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거 아닙니까? 라인업을 그 정도로 바꿨으면 코칭스태프 회의 정도는 했을 텐데 다른 코치님들 의견이 반영된 걸 수도 있잖습니까?"

대우의 반론은 나름의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만약 다른 팀이었다면 대우의 발언에 신빙성이 더해졌겠지만, 팀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상현에게는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얘가 뭘 모르네. 코칭스태프 회의 없이 한 감독 독단으로 라인업을 구성한 게 언제적 얘기인데 그런 소릴 해? 지금 자이언츠는 한동현 자이언츠로 봐도 될 정도라니까."

"그 정도입니까?"

"그렇다니까. 내가 여민석 투수코치님께 직접 들은 이야긴데 틀린 이야기겠어? 시범경기 때까지는 그래도 코칭스태프 회의로 라인업 구성을 했었는데 이젠 아니야. 한 감독 독단으로 라인업 짠지 2주가 훌쩍 지났다고."

투수코치인 여민석에게 들은 정보라고 하니 상현의 말에 무게가 더해진다.

그 때 잠자코 있던 강호가 상현을 향해 물어 본다.

"라인업 얘기도 여 코치님이 말씀하신 겁니까?"

강호는 오늘 경기 라인업 변경 사실을 상현에게 알려준 출처를 궁금해 했다.

지금 강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타순 이동이었다.

한 감독의 전횡은 진작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어서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응? 그렇지. 라인업도 여 코치님께 들은 얘기야. 오늘 나를 붙잡고 한탄을 하시더라니까. 단지 타자들 타순만이 아니라 투수조 라인업도 대대적으로 손 본 모양이던데?"

상현의 말에 대우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투수조 라인업까지 변경이 되었다면 2군에서 올라온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대우는 다급한 목소리로 상현에게 질문을 던진다.

"투수조도 말입니까? 저는 어떻게 됐습니까? 혹시 2군으로 빠지는 건 아니지 말입니다?"

대우의 걱정스런 얼굴에 상현은 순간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그가 '흐음~'하고 무게를 잡자 대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울상을 지어보이는 대우. 강호는 피식 웃으면서 그런 대우의 정수리를 가볍게 두드린다.

"상현 선배님이 장난치시는 거잖아. 지금 불펜조에서 너를 2군으로 내리면 투수조 운영을 어떻게 하겠어? 선발 투수들이 수시로 무너지는데 롱릴리프 자원인 너를 2군으로 내릴 감독이 있겠어?"

웃으며 말하는 강호의 말에 대우는 순간 상현을 불손한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그의 찌릿한 눈빛에는 '그런 겁니까? 선배님'이라는 물음이 담겨 있었다.

감히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선배에게 따져 묻지는 못하고, 눈빛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대우.

상현은 그런 대우에게 '힝, 속았지?'라고 느껴지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속은 네가 바보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대우 너나 나나, 성빈이가 불펜에서 빠지면 투수조가 제대로 유지되기나 하겠어? 마무리인 명학이도 흔들리는 판국에 우리 세 명을 라인업에서 빼버리면 답이 없는 거야. 생각을 좀 하고 살라고. 어리석은 후배님아."

"아....네. 잘 알았습니다."

상현의 타박에 대우가 콧잔등을 씰룩이며 고개를 숙인다.

한참 선배인 상현과 논쟁을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또 한 번 깨닫게 되는 대우였다.

지금부터는 상현의 낚시질에 걸려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입술을 굳게 다문다.

그런 대우의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상현이 '풋'하고 웃어 보이며 대우에게 한 마디 더 건네려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강호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그건 뭐야? 무슨 시험이라도 보는 거야? 자료들이 이렇게 많아?"

상현이 관심을 가진 것은 강호가 앉은 책상위에 가득 쌓여 있는 자료들이었다.

강호가 '각 팀 자료들입니다'라고 말하며 건넨 리포팅 자료를 받아든 상현.

그의 눈에 복잡한 그래프와 각종 수식으로 도배된 수백 장의 리포팅 자료들이 들어온다.

사실을 말하자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프로 생활 20년 동안 이렇게 구체적인 리포링 자료를 본 적이 없었던 상현이기에 놀라게 된다.

"뭐야? 이거 어디서 난 거야? 돈 주고 산거야?"

"아니요. 운영팀에 요청하니까 주던데 말입니다. 잘 찾아보면 인트라넷에도 자료가 올라와 있습니다. 프린터할 파일이 많으니까 그냥 구단 운영팀에 요청하는 게 빠를 겁니다."

강호는 친절하게도 자신이 보고 있는 리포팅 자료들이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지 친절히 알려준다.

딱히 비밀스러운 일도 아니었고, 구단에서도 자신들이 분석한 리포팅 자료를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를 바랐기에 미리 요청만 한다면 이런 식으로 방대한 양의 자료도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실 강호도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운영팀이 보유한 각 구단 선수들에 대한 상세 리포팅 자료는 지정만 사장의 작품이었다.

팀 성적과 구단 매출을 올리기 위한 모든 일을 구단에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지 사장의 생각이었기에 외부 전문가들과 구단 내 스카우트 팀 인력을 동원하여 몇 달 동안 모은 자료인 것이다.

지금도 매주 단위로 자료가 갱신되고 있어서 팀의 일원이라면 손쉽게 다른 팀 선수들의 성향과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를 읽을 수준이 되어야만 한다.

"대체 이걸 어떻게 읽으라는 거야?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네. 이 밑에 파란 그래프랑 빨간 그래프는 대체 뭔데?"

상현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료들을 노려본다.

그러자 강호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쉽게 답한다.

"그거 말입니까? 선수들 타구 분석 그래프입니다. 지금 보고 계신 거는 타이거즈 6번 타자인 안치형 선수 건데 인 플라이 타구가 좌측으로 가느냐 우측으로 가느냐를 그래프 화 한 자료입니다. 빨간 게 우측이고요. 파란 게 좌측입니다. 지금보시면 우측 방면보다는 좌측 방면이 두 배 정도 비율이 높아서 2루수 보다는 유격수나 3루수가 수비 시에 경계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외야도 당연히 좌익수가 신경을 많이 써야지요."

강호의 설명에 이제야 그래프가 뜻하는 바를 이해하게 된 상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도 의문이 드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설명은 그냥 말로 해주면 되지. 뭐 하러 이런 복잡한 그래프로 만드는 거야? 봐도 뭔 소린지 모르겠네. 이런 자료는 우리 같은 선수들이 아니라 코칭스태프가 해석을 해서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코치들이 괜히 있는 거냐고?"

상현은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리포팅 자료를 강호에게 되돌려 준다.

그로서도 챙길 일이 많은 코치들이 이런 방대한 자료를 일일이 읽어본다는 게 얼마나 무리인 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이런 복잡한 자료들을 직접 해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런 자료를 매주 확인하면서 야구를 할 바에는 포수가 요구하는 싸인대로만 공을 던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수비 상황에서의 수비 가담률이 적은 투수로서는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강호는 달랐다.

"재밌는 자료도 많습니다. 상대팀 수비 시프트 자료나 감독의 선수기용 성향도 나와 있어요. 또 상대팀 투수의 투구 성향도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만 미리 읽어보면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반은 먹고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강호는 다시 수백 장의 자료를 상현에게 건넨다.

이번에 강호가 건넨 자료들은 타이거즈 투수들의 성향 분석과 경기 내용, 구질, 구종, 변화구 비율, 로케이션, 위기 상황의 결정구 선택 등등. 1군에 등록된 선수뿐 아니라 2군에서 뛰고 있는 타이거즈 투수들의 모든 데이터가 집대성된 자료였다.

상현은 강호가 건넨 자료를 마다하며 고개를 내젓는다.

"투수인 내가 상대팀 투수 자료를 봐서 뭐하겠어? 강호 같은 타자들이나 많이 보세요. 야구가 언제부터 학문이 되 버린 거야? 야구는 스포츠라고. 머리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운동이야. 머리를 쓰는 건 코칭스태프나 전문가들 몫이지 우리 같은 선수들은 훈련하고 경기에만 집중하면 되는 거야."

공부라면 진저리를 치는 상현은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도 현대 야구에서 데이터 분석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와 훈련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선수들이 이런 자료들까지 공부해야 한다면 잠 잘 시간도 없이 살아가야할 것 같았다.

아직도 옛날 방식의 야구를 하고 있는 상현에게는 사양하고 싶은 일이다.

"아무튼 준비들 잘 하라고. 강호는 3번 타순에 설 전략 잘 짜두고. 대우는 롱릴리프 준비를 미리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여 코치님 말씀 들어보니까 오늘 선발 예정된 라일리의 릴리스 포인트가 안 맞는다더라. 조기에 강판될 가능성도 있으니까, 대우 너랑 나는 미리 준비를 좀 해둬야 돼."

"네, 알겠습니다."

대우는 두 사람의 대화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선발 투수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씩씩하게 대답한다.

2군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는 그였기에 기회가 주어지면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아 타선이 언더핸드 투수의 공을 잘 공략한다고 해도, 강호와 함께 미리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의 대처 방안을 구상해 둔다면 마냥 얻어맞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강호 선배가 이렇게 머리 좋은 사람인지는 몰랐네. 어려운 수식이나 자료도 금방 해석하고 말이야. 덕분에 타이거즈 타자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대충이나마 알겠어.'

대우는 강호를 다시 보게 된다.

물론 반나절 밖에 안 되는 자료 분석으로 타이거즈 타자들을 압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만, 야구는 멘탈 스포츠다.

마운드에 오를 자신이 타이거즈 타자들에 대해 잘 안다는 생각으로 마운드에 오른다면 그렇지 못한 것에 비해 확연히 다른 투구 내용을 보여줄 수가 있을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승부를 피할 상황에도 상대 타자의 약점을 떠올리며 승부를 벌일 수도 있다.

투수에게 자신감은 곧 생명과도 같은 것이니까.

"나는 그럼 내 방으로 가련다. 수고들 하라고."

"네, 들어가십시오. 경기 때 뵙겠습니다."

상현이 숙소의 문을 닫고 나가자 남은 두 사람은 다시 방대한 자료에 고개를 파묻는다.

강호는 오늘 선발로 나서는 타이거즈 투수 스티븐의 자료와 불펜 투수들의 자료, 그리고 타이거즈 타선의 타구 방향을 확인하며 머릿속에 정보를 입력한다.

그리고 곁에 앉은 대우는 강호의 자료 해석 설명을 들으며 타이거즈 타선을 공략할 나름의 대안을 찾게 된다.

'이제부터는 매 상황마다 아이템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야구를 만들어가야 해. 더 치열하게 분석하고 준비해서 타석에 선다!'

강호는 타이거즈 전을 기점으로 자신만의 야구 방식을 만들어보려는 생각을 가진다.

그렇게 두 사람의 휴식 시간은 훌쩍 흘러가고, 곧 타이거즈와의 시즌 첫 맞대결 경기의 막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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