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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감독의 실험
무사 만루 상황에서 4번 타자인 황제인의 적시타로 홈을 밟은 강호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강호는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환영을 받으며 덕 아웃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잘 했어, 백강호! 오늘도 역시 날아다니네."
"1번 자리가 천직이네. 천직!"
코치들과 베테랑 선수들이 덕 아웃으로 돌아온 강호와 손뼉을 마주치며 첫 득점을 자축한다.
함께 들어온 다음 주자 전준오 역시 강호에 비해 덜하긴 했지만, 격한 환영을 받게 된다.
준오는 모든 선수들과 손뼉을 마주친 뒤, 구석 자리에 앉은 강호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을 건다.
"우리 슈퍼 루키. 덕분에 안타 하나 날로 먹었네. 고마워~"
준오는 평소 그답지 않은 유쾌한 목소리로 강호와 어깨동무를 한다.
강호로 인해 흔들린 최검강에게 덤으로 얻은 안타가 꽤나 기쁜 모양인지 어깨동무를 한 손으로 강호의 어깨를 안마해 준다.
그는 강한 억양의 경북 말투로 강호에게 계속 말을 건다.
"일부러 그렇게 한 거야? 공을 20개나 던지게 했잖아. 원래는 초구에 결과 보는 스타일 아니었어?"
대답할 시간 없이 말을 걸어오는 준오의 물음에 대답할 타이밍을 찾던 강호가 얼른 입을 연다.
"10구째까지는 타이밍이 안 맞아서 파울이 나왔습니다. 근데 한 15구째부터는 타이밍을 잡았는데, 어쩌다보니 20개째에 때려낸 것 같습니다."
강호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안타 아이템을 사용한 후 상대 투수에게 투구 수 테러를 하기 위해 작정하고 커트해낸 것이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준오는 15구째부터는 타이밍을 잡았다는 강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다.
그가 보기에도 승부가 진행되면서 타구 방향이 점점 파울라인에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였지만, 준오로서는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어쩐지 뒤로 갈수록 인필드로 가까워지더라. 하여튼 덕분에 오늘은 시작부터 안타를 때려내네. 다음 타석에도 기대할 테니 잘해보자."
준오는 기분 좋은 말로 강호를 격려하며 자신의 자리로 이동한다.
최근 들어 타격감이 많이 떨어져 있던 준오는 타격 슬럼프가 오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호가 만들어준 기회덕분에 정타를 때려내며, 약간의 감각을 되찾게 되었다.
사소한 타석 기회나 깨달음으로도 슬럼프에서 벗어나기도 하는 것이 프로선수이다.
방금 전, 강호에게 건넨 준오의 감사 인사는 슬럼프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준 것에 대한 특별한 감사를 건넨 것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강호로서는 '준오 선배도 괜찮은 사람이구나'라고 여기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다.
"백강호. 음료수 한 잔 마시면서 쉬어라."
그 때 누군가가 다가와 시원한 이온 음료 하나를 건넨다.
고개를 돌려보니 정호종 타격코치가 서있었다.
짙은 색의 고글에 가려 눈빛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환하게 벌어진 입가의 미소만으로도 정 코치가 호감을 가지고 다가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감사합니다."
강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으로 정 코치가 건넨 음료를 받으려 했다.
그런데 정 코치가 예의바르게 일어나려는 강호에게 '앉아있어. 네가 불편하면 내가 앉을 테니 앉아서 쉬어'라는 말로 다시 앉히고는 강호의 곁에 앉는다.
강호는 정 코치의 권유대로 자리에 앉은 채 정 코치가 건넨 음료를 마신다.
차가운 음료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온 몸에 청량감이 감돈다.
타석에서 20구나 되는 승부에, 상대 투수를 자극하는 주루플레이까지. 강호로서도 지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금 전에 준오하고 하는 말을 얼핏 들으니까 15구 정도부터 타이밍을 잡았다고? 내가 보기에는 타격감은 그 전부터 나쁘지 않아 보이던데?"
정곡을 찌르는 정 코치의 말에 음료수를 마시던 강호의 동작이 순간 멈추게 된다.
준오를 속일 수는 있어도 베테랑 타격코치인 정호종 코치를 속일 수는 없어보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강호가 음료수 병을 벤치에 내려놓고는 입을 연다.
어설픈 거짓말로는 정 코치를 납득시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정 부분 사실을 말하게 된다.
"사실대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사실대로? 사실은 뭐였는데?"
목소리를 줄이는 강호의 태도에 정 코치가 관심을 내보인다.
강호는 그런 정 코치에게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연다.
"사실 20구째에 때린 안타는 실수입니다. 커트하려고 한 것이 안타가 되 버렸습니다."
강호의 말은 진심이었다.
사실은 파울 타구를 조금 더 만들어서 최검강의 힘을 빠지게 만들 계획이었다.
그런데 20구째 걷어낸다고 밀어친 타구가 정타가 되면서 안타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타구가 정타가 됐을 때는 반드시 사용한 아이템의 효과가 발휘된다는 프리마켓 시스템이 적용된 것이었다.
'안타'아이템을 사용한 후 정타가 되면 어떤 타구를 때려내도 안타가 되고, '3루타'아이템을 사용한 후 정타가 되면 어떤 허술한 타구라도 3루타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프리마켓 타격 아이템이 가진 맹점이었다.
강호가 최검강의 투구 수를 20개까지 늘린 이면에는 프리마켓 시스템의 맹점을 이용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
정호종 코치는 강호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잠시 표정이 없다.
그러다가 피식하고 입을 벌리더니 이내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아무리 웃음을 참아내려고 해도 '큭큭'하고 새어나오는 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정 코치는 의문 섞인 강호의 눈빛에도 한참을 웃어 보이더니 이내 강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내가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걸작이었다. 파울을 치려고 한 게 안타가 되다니. 하하, 그래. 강호 너라면 가능한 일이야. 다음 타석에도 그렇게만 하면 돼. 잘 했어."
무엇이 재밌는 것인지 정 코치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웃음을 흘린다.
그는 강호에게 잘했다는 말을 반복하며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코칭스태프의 자리로 돌아간다.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약간은 과한 말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의외로 정 코치님께서 잘 넘어가 주시는구나. 그런데 대체 왜 저렇게 웃으시는 거야?'
강호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 코치의 뒷모습을 쫓는다.
정 코치는 코칭스태프 자리로 이동해서도 큭큭 대며 웃고 있는 모습이다.
그저 강호를 안심시키기 위한 행동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때로는 어설픈 거짓말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낫다는 소소한 깨달음을 얻으며 강호의 경기는 계속된다.
"허, 다이노스 벤치에서 최검강을 1회에 바꾸지는 않네요. 그래도 상태를 보니까 2회에는 다른 투수를 올릴 것 같은데요?"
여민석 투수코치의 말이었다.
자이언츠 덕 아웃의 기대대로 최검강이 1회에는 무너지지 않았지만, 아웃 카운트 세 개를 잡는동안 4실점을 내어주고 말았다.
투구 수는 무려 49개. 그 중 절반 가까이를 강호에게 던지며 체력을 소진한 최검강에게 2회는 돌아오지 않는다.
2회에는 불펜 투수로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이노스 벤치에서는 최검강의 멘탈이 심한 타격을 입었다고 판단했다.
"2회 부터는 다이노스의 마운드에 구창현 선수가 오릅니다. 다이노스에서 빠른 투수 교체를 감행합니다."
중계석에서 권 캐스터가 다이노스의 투수 교체를 알린다.
그의 말대로 중계화면에 비친 마운드에는 새로운 투수가 연습 피칭을 하고 있었다.
한 때는 선발 자원으로 분류되었던 23살의 루키 투수, 구창현이었다.
그리고 타석에는 선두 타자로 또 다시 강호가 나선다.
"자이언츠는 1회에 타자 일순하며 4득점을 얻어 냈습니다. 2회에도 선두 타자로 백강호 선수가 타석에 섭니다. 기대해 볼만한 타석인데요?"
권 캐스터는 상황 해석을 이홍철 위원에게 넘긴다.
기다리고 있던 이 위원이 말을 잇는다.
"1회에 자이언츠가 얻어낸 4득점은 결국 백강호 선수의 승부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백강호 선수가 20개의 공을 던지게 하고 안타를 얻어내면서 최검강의 페이스가 급격하게 나빠졌거든요. 여기에 이어지는 자이언츠의 중심 타선이 제 역할을 수행해 주면서, 쉽게 4점을 얻어낸 거예요. 자이언츠 입장에서는 지금의 타석도 기대를 걸어볼만 합니다."
이 홍철 위원의 해설과 동시에 바뀐 투수, 구창현의 초구가 던져진다.
구창현은 불펜에서 최검강과 강호의 1회 승부를 지켜보았기 때문에 여차하면 볼넷을 내줄 각오로 초구부터 유인구를 던지는 모습이다.
"볼."
주심의 초구 선언은 볼이 된다.
코스가 꽤 벗어나는 공이어서 강호는 배트를 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포수 역시 볼 판정에 수긍하며 곧장 투수에게 공을 돌려준다.
'뒤에서 지켜보니까 백강호의 타격 컨디션이 제대로 올라왔어. 1회 때의 승부에서도 분명 몇 개 정도는 일부러 파울 타구를 만든 거야. 차라리 거를 생각으로 승부하는 게 좋겠어.'
다이노스 포수인 김태건은 강호에게 볼넷을 내줄 각오로 2구에도 바깥쪽 코스의 유인구를 요구한다.
투수인 구창현 역시 태건의 생각과 다르지 않아, 곧장 와인드업 자세를 취한다.
부웅, 터업.
너무 벗어난 코스여서 따로 미트 질을 할 필요도 없이 빠져나가는 볼. 주심은 당연히 볼을 선언한다.
"볼 투."
두 개의 공을 지켜보며 강호는 상대 배터리의 의도를 알게 된다.
'여차하면 거를 생각으로 어렵게 승부하겠다는 말이구나.'
상황을 파악한 강호는 배트를 느슨하게 쥐었다.
1회 상황에서는 '안타'아이템으로 끈질긴 승부를 펼쳤지만, 이렇게 되면 손쉽게 출루가 가능해진다.
사실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에 타석에 들어서며 아이템 사용을 하지 않은 상태다.
거저 주는 볼넷을 마다할 생각은 없다.
"볼 넷."
주심은 결국 구창현이 강호에게 던진 5개의 공 중 4개를 볼로 선언한다.
하나의 스트라이크는 존에 걸치고 들어오는 패스트볼을 강호가 커트해낸 것이다.
혹시나 해서 던진 공에 강호가 즉각적으로 반응하자, 다이노스 배터리는 강호와의 승부를 완전히 회피하게 된다.
고의 사구나 다름없는 볼넷이었다.
"아, 지금은 볼넷으로 출루하네요. 2회에도 자이언츠의 선두 타자가 출루합니다."
중계석의 권 캐스터는 허무한 2회 초 승부에 탄식을 내뱉는다.
다이노스 배터리에서 조금은 적극적으로 승부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야구팬의 입장으로서는 투수와 타자의 피 말리는 승부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실 출루를 시켜준 것으로 봐야하는데, 그렇게 좋은 선택은 아닐 수가 있습니다. 백강호 선수는 1번 타자거든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검증된 빠른 발이 있어요. 제가 자이언츠 측에서 받은 자료로는 백강호 선수의 100미터 주력이 11초 5까지 가능하다고 나와 있거든요."
이홍철 위원의 말에 권 캐스터가 놀란 목소리를 낸다.
사실 그도 강호의 데이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연기를 해보인다.
"11초 5요? 야구 선수 중에 그 정도로 빠른 발이 있습니까? 하하, 육상을 해도 될 정도의 빠른 발입니다."
"그렇죠. 그런 선수가 팀의 1번 타순에 나섰으니 자이언츠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대가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백강호 선수는 발만 빠른 선수가 아니잖아요. 1회 때처럼 타격 능력도 뛰어나고, 조금 전처럼 출루를 이끌어내는 능력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자이언츠에서 보기 드문 리드오프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이홍철 위원의 말에 중계로 경기를 지켜보는 자이언츠 팬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들 역시 잘 알았다.
시범경기를 통해, 그리고 1군 데뷔전의 강력한 임팩트와 그 뒤로 이어지는 활약으로 인해. 단 몇 경기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백강호라는 선수를 알기에는 충분했다.
"백강호는 진짜배기야! 한, 두 경기 반짝하고 사라지는 선수가 아니란 말이야! 두고 봐! 백강호가 올해 신인왕을 받는다에 내 손 모가지를 건다!"
오늘도 거제시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술판을 벌인 동철은 백강호의 신인왕을 확신하는 발언을 한다.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자신의 손을 내거는 동철.
그의 목소리에 함께 있던 갑식이 핀잔을 준다.
"손모가지 날아가는 소리하지 말고 술이나 마셔. 이 친구는 맨날 백강호 얘기만 나오면 왜 이러는 거야? 우리도 백강호 대단한 거 알아. 아니까 술 잔 좀 그만 엎으란 말이야. 내 옷에 술 튀잖아."
"아니, 지금 자이언츠에서 신인왕이 나오게 생겼는데 그깟 바지가 중요한 거야? 바지저고리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에잉, 술 맛 떨어지게 시리."
두 친구가 다투는 사이, 한 편에 앉아있던 현승이 목소리를 높인다.
"가만, 조용히 좀 해봐. 도루할 거 같은데? 벌써 견제구가 2번이나 날아왔어."
현승의 말에 동철의 시선이 다시 TV화면으로 향한다.
그는 마치 현장의 팬인 것처럼 TV를 향해 소리친다.
"마! 견제구 던질 시간에 포수 미트를 보고 던지란 말이야! 강호가 도루한다면 하는 거야. 백강호, 도루해라!"
동철의 들뜬 목소리가 거제시장에 울려 퍼질 무렵.
마산 구장의 시선이 2루를 향해 달리는 강호에게로 향한다. 그가 이번 경기에서 시도하는 첫 번째 도루인 것이다.
1회 상황에서는 상대 배터리를 흔들기 위해 뛰는 시늉만 했지 도루를 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볼넷을 내준 상대 배터리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지!"
강호가 도루를 시도하자 자이언츠의 주루코치인 안준영이 목소리를 높인다.
팀이 4점 차로 앞서고 있지만, 정상급의 강타선을 보유한 다이노스에게는 언제든지 따라잡힐 수도 있는 점수 차다.
한 점이라도 더 낼 수 있을 때 기회를 만드는 것이 주자의 몫이었다. 강호가 그런 코칭스태프의 기대에 부응하는 도루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딜!'
강호의 도루를 확인하는 순간, 급히 몸을 일으킨 포수 김태건이 2루를 향해 힘껏 공을 뿌린다.
송구를 피하기 위해 투수인 구창현이 마운드에 주저앉았고, 공은 마운드를 지나 유격수의 미트로 빨려든다.
그와 동시에 강호의 손끝이 2루 베이스를 붙들었다.
"세이프!"
2루심의 판정은 세이프였다.
다이노스 코칭스태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2루수에게 시선을 준다. 그러자 2루수는 다이노스 덕 아웃을 향해 고개를 내젓는다.
태그를 한 2루수 자신이 보았을 때도 세이프라는 뜻이다.
"백강호 잘 뛰네!"
강호의 도루를 칭찬하는 원정 팬들의 목소리가 그라운드에 쏟아진다.
상의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2루 베이스에서 발을 떼는 강호.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1루 베이스에 있을 때보다 더욱 크게 리드를 벌린다.
강호의 질주본능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