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75화 (75/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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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감독의 실험

경기를 중계하는 중계석에서는 조금은 의외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먼저 서두를 뗀 것은 권 캐스터였다.

"지금 8구째예요. 백강호 타자와 최검강 투수의 승부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카운트는 여전히 2볼 2스트라이크."

권 캐스터의 말을 받아 이홍철 위원 역시 말을 더한다.

"요소요소마다 던져지는 최검강 투수의 공을 백강호 선수가 잘 대처해 내고 있습니다. 조금은 의외의 상황으로 보여 집니다. 백강호 타자는 한 타석에서 공을 세 개 이상 보지 않는 타자거든요. 백강호 선수의 타석 당 평균이 1.97개니까 상당히 공격적인 유형의 타자라는 말이 되거든요. 그런데 1번 타순으로 올라오자마자 대처 능력이라든지 타격 스타일을 바꾸는 모습이에요. 정말 좋은 타자입니다."

이홍철 위원은 말을 하는 중간에 '아~'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강호의 타격을 칭찬한다.

그러는 사이 하나의 공을 더 골라낸 강호의 볼 카운트가 3볼 2스트라이크 상황이 된다.

이제 강호에게 삼진을 잡기 위해서는 최검강 투수가 10구를 던져야하는 것이다.

"아~ 지금 공은 백강호 선수가 정말 잘 참았어요. 당겨 치는 유형의 타자는 욕심내볼만한 코스거든요. 볼이 되긴 했지만 최검강 투수가 아주 좋은 공을 던졌어요."

이홍철 위원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두 선수의 승부에 모두를 칭찬하는 말을 한다.

조금 전 최검강의 9구는 그전부터 이어지는 로케이션 투구로 바깥쪽, 바깥쪽으로 코스를 가져가던 최검강이 제대로 노리고 몸 쪽 공을 던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공에 강호가 배트를 절반 가까이 내밀었다가 급히 멈췄다. 포수는 1루심에게 강호의 스윙 여부를 확인했지만, 1루심은 세이프를 선언. 상황은 풀카운트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볼 카운트는 풀 카운트에서 최검강 투수의 10구가 뿌려집니다. 백강호 타격! 그러나 벗어나는 파울이 됩니다."

권 캐스터의 중계에 이어 이 위원의 해설이 이어진다.

"이번에도 잘 던진 공이에요. 낮은 쪽 코스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거든요. 그걸 백강호 선수가 걷어냅니다. 1회 초, 첫 타자부터 대단한 승부를 보게 되네요. 저는 이런 장면은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백강호 선수의 평소 타격 스타일대로 본다면 3구 안에 승부가 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1번 타순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타순에 맞는 전략을 잘 짠 것 같습니다."

이 위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권 캐스터.

그는 개인적으로 궁금한 질문 하나를 이 자리를 빌어 물어보고 싶었다.

"백강호 선수가 활약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보완점이 있어야 한다고 보세요?"

강호의 단점에 대해서 묻는 권 캐스터의 질문은 미리 이야기된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질문이어서 이 위원이 '으음'하는 말로 시간을 끌며 생각 끝에 답한다.

"아직 백강호라는 선수에 대한 데이터가 많은 편은 아니에요. 지금까지 제가 본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지금 타석에서와 같은 모습을 조금 더 키워내면 될 것 같습니다. 수비를 제외한 타자로서의 백강호 선수의 최대 장점은 타격 그 자체거든요. 그런데 타격 능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인지 공을 오래 보는 습관은 없는 편입니다. 선구안이 좋은 편은 아니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오늘 한동현 감독의 타순 변화로 백강호 선수의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위원은 강호의 최대 약점을 선구안으로 보았다.

특히 왼손 투수의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완급 조절 능력이 좋은 베테랑 투수의 공에 약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스스로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강호가 초구부터 승부에 들어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타석에 선 강호의 생각을 읽는, 타격 전문가다운 상당히 정확한 식견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지금 타석에서 대처하는 모습을 봐서는 선구안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요."

선구안이 문제라는 이 위원의 말에 권 캐스터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자 이 위원이 '허허'하고 웃으며 대답한다.

"백강호 선수가 1번 타순에 이렇게 적합한지는 몰랐습니다. 그동안 공격적인 타격에 선구안 능력이 가려져 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런 능력은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타고 나는 부분도 있어야 합니다."

이 위원은 끝끝내 강호의 선구안이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융통성 있는 말로 강호의 선구안도 나쁘지 않다는 견해를 내보이고 있다.

그런데 덕 아웃에서 강호의 승부를 지켜보는 한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호가 저런 면이 있었습니까? 선구안이 대단하네요. 벌써 15구째 승부예요."

약간은 신경질적인 목소리이지만, 지금은 기쁜 감정을 숨기지는 않는 목소리의 주인. 그는 바로 자이언츠의 한동현 감독이었다.

한 감독은 실험 삼아 이동시킨 강호의 1번 타순이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강호의 1번 타순 이동은 휴고를 빼고 유성철을 우익수로 기용한 비난을 피하기 위한 꼼수의 일종이었다.

'요즘 팬들에게 강호라는 이름은 면죄부와도 같아. 강호의 타순을 변경시키면 휴고를 라인업에서 뺀 거나 유성철을 선발 기용하는 논란은 크지 않을 거야. 강호가 1번으로 이동한 것에 대한 관심이 더 높을 테니까.'

우익수 보직을 변경하기 위한 한 감독의 꼼수는 대성공이었다.

1회 초부터 강호의 끈질긴 승부에 모든 팬들의 시선이 강호와 최검강의 대결에 집중되고 있었으니까.

전광판의 라인업을 확인하고, 휴고가 빠진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았다.

"말을 들어보니까 강호가 시범경기 때부터 선구안 훈련에 꽤나 공을 들였던 모양입니다. 개인훈련 시간이 나면 매일 선구안 훈련을 했다네요. 기특한 녀석입니다."

조금 떨어져 있던 타격코치, 정호종이 대답한다.

올 시즌 들어 정 코치와 한 감독의 대화는 많지 않았다.

부산고나 경남고 출신이 아닌 충북 청주의 세광고 출신인 정호종 코치는 딱히 어느 파벌에 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선수를 혹사시키는 한 감독의 선수기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한 감독의 말에 웃으며 대답하고 있는 이유는 온전히 강호에게 있었다.

"신인 선수들이 강호 녀석의 반만 노력해 줘도 선수 걱정은 안할 텐데요."

강호에 대한 칭찬을 쏟아내는 정호종 코치.

타격코치인 그의 입장에서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개인훈련을 자처하는 강호의 모습이 예뻐 보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실력 또한 뛰어나다.

사생활 관리도 깨끗하고, 훈련도 열심히 하고, 부지런하며, 예의 바른 선수가 실력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타격코치인 정 코치의 입장으로는 요즘 밥을 먹지 않아도 강호만 보고 있으면 배가 부를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감독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강호 녀석 선구안을 시험해보려는 기용 아닙니까?"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이 정 코치가 한 감독에게 묻고 있었다.

정 코치의 생각은 한 감독에게 뛰어난 안목이 있어서 강호를 1번 타순에 놓은 거라는 생각은 아니었다.

평소 한 감독의 선수기용만 보아도 그가 선수들을 소모품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강호의 1번 타순 기용은 한 감독이 어떤 생각에서 결정한 일인지 궁금한 마음에 돌려서 물어본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한 감독과 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겠지만, 백강호라는 좋은 선수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정호종 타격코치이기에 한 감독의 의중을 궁금해 한다.

"딱히 저런 모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기대 이상이네요."

정 코치의 물음에 한 감독은 웃으며 답을 한다.

정호종 코치가 흘낏 내려다 본 한 감독의 기록지에는 강호의 이름 옆에 시범경기 때의 출루율이 몇 번이나 동그라미 쳐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0.799. 무려 8할에 가까운 출루율을 기록한 강호에게 리드오프의 역할을 시험 삼아 맡긴 것이었다.

'허헐. 뭐야? 그럼 출루율만 보고 1번 타순으로 옮긴 거야? 선구안이나 다른 스탯을 본 게 아니었어? 이 양반도 영리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무대포 기질이 있단 말이야.'

한 감독의 의도를 알게 된 정호종 코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강호를 1번에 놓은 한 감독의 선택이 뜻밖의 좋은 결과를 이끌어낸 셈이다.

강호를 아끼게 된 정 코치 입장에서는 타석에서 상대 선발 투수에게 끈질기게 승부하는 강호에게 미안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타순 변경 이유였다.

'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으로 한 감독에게서 시선을 돌린 정 코치는 타석 위를 바라본다.

따악.

또 한 번의 타격음과 함께 강호의 끈질긴 승부는 18구째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타격은 타이밍이 잘 맞았어. 일부러 배트 컨트롤을 해서 오른 손을 놓은 거야. 1루 쪽으로 향하는 파울 타구가 나오게 말이야.'

정 코치는 조금 전, 강호의 타구를 일부러 만든 파울로 보았다.

투수의 투구 수를 늘리기 위한 강호의 계획된 파울인 것이다.

정 코치는 강호가 정타를 때려낼 수 있음에도 일부러 파울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강호의 타법이 투수의 패스트볼을 상대할 때는 뒤쪽으로 무게 중심을 두고, 변화구를 상대할 때는 앞쪽으로 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스윙이 아닌 구종마다 타법이 다르다는 것은 컨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강호야.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우리도 너의 또 다른 능력 하나를 알게 되었으니까 그만 안타를 치고 나가도록 해라. 한 감독에게 보여주는 무력시위는 그 정도면 충분 해.'

정 코치가 짐작하기로는 강호가 자신을 놓고 테스트를 하는 한 감독에 대한 실력행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실력행사가 강호의 입장에서는 필요하다는 사실을 납득하면서도 혹시나 아직 어린 강호의 멘탈이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든다.

"호오~ 또 파울이네요. 이제 곧 스무 개째입니다. 이러다 1회 때 최검강이 지치겠는데요?"

"오늘 경기도 강호 덕분에 쉽게 풀어가겠어요. 하하."

정 코치를 제외한 코치들은 강호가 투수의 공을 커트해낼 때마다 '와하~'하고 탄성을 내며 오늘 경기를 쉽게 풀어나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 백강호. 너의 능력을 충분히 보았으니 안타를 때려내 봐!'

한 감독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강호의 20구째 승부를 지켜본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글스와의 3연전을 스윕으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강호의 덕이 컸다.

강호가 2번 타순에서 활발한 타격을 보여줌으로써 중심타선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했다.

중심 타선이 침묵할 때는 강호 본인이 홈런으로 타점을 생산하면서 팀을 승리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경기에서 1번 타순에 세운 자신의 의도에 따라 1회 부터 지독할 정도로 상대 투수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제 한 감독이 원하는 것은 강호의 깔끔한 안타로 인한 출루였다.

따악!

최검강이 던진 20구째에 드디어 한 감독이 바라던 호쾌한 안타가 만들어진다.

2루수의 키를 훌쩍 넘긴 안타는 타구의 질은 좋았지만, 코스가 정직했던 이유로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단타가 만들어진다.

"하하하! 안타네, 안타!"

"강호가 제대로 한 방 쳐주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칭스태프가 크게 웃음 짓는 이유는 마운드에 선 최검강의 표정변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파울에 짜증이 나있던 최검강은 강호가 20구째를 밀어 쳐서 안타를 만들어내자 모자를 벗으면서 미간을 찡그린다.

신경질 적으로 오른 쪽 어깨를 돌리는 모습에서 그의 멘탈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1회 초, 아웃카운트가 하나도 올라가지 않은 상태에서 공을 20개나 던진 상대 팀 투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팀의 입장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출발은 없을 것이다.

"준오, 상훈! 상대 투수가 흔들리고 있다. 초구는 일단 지켜보고 패스트볼 위주로 상대해라! 강호에게 리드 폭을 넓히라고 할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최검강의 빠른 공을 노리는 거야!"

강호가 안타를 치고 출루하자 정호종 타격코치가 분주해진다.

지시를 받은 준오와 상훈이 '네'하고 답하자 정 코치는 팀의 중심 타선인 제인과 중석에게도 세부적인 지시를 내린다.

그러다 문득 정 코치의 시선이 1루 베이스를 밟고 선 강호에게로 향한다.

끈질긴 타석 승부 후에도 지치지 않은 것인지, 적극적으로 리드 폭을 넓히는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게 된다.

그는 강호가 들었으면 하는 칭찬의 말을 삼키며 남몰래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잘 했다! 백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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