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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2번 타자
사직 구장이 축제 분위기에 빠져 있을 때, 같은 시각 자이언츠 구장 본부 역시 환호에 물든다.
평소 젠틀하다고 자부하는 지정만 사장은 협탁에 올라선 채 '그렇지! 바로 그거야!'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자신이 지시한 대로 사직 구장이 불꽃놀이 축포로 환하게 밝아지자 '그래! 일 잘하고 있어. 일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치켜세운다.
"지금 당장. 스포 티비에 연락 넣어! KBS, SBS, MBC 스포츠 채널 전부 다 연락 때리란 말이야. 허 실장, 뭐 하고 있어? 일 해라. 일! 계획대로 어서 움직이란 말이야!"
"아, 네. 지금 바로 전화 돌리겠습니다."
"전화만 해서 될 일이 아니잖아. 기획 팀에 준비하라고 일러둔 백강호 자료는 어떻게 됐어? 당장 팩스로 보내. 백강호를 더 부각시켜서 이번 기회에 '아~자이언츠하면 딱 백강호!' 이런 생각이 들게 이미지 마케팅을 하란 말이야!"
"네, 넵!"
"그리고 시상금 전달은 어떻게 됐어? 뭐 50만원, 100만원 이딴 금액이면 너 죽을 줄 알아! 적어도 오백은 때려 넣어서 '아, 자이언츠가 쓸 데는 쓰는구나!'라는 생각을 심어주란 말이야. 언론에 노출될 수 있게 시상금은 커다란 판넬로 금액을 써놓도록 하고. 얼른얼른 준비해!"
"아니, 그게 지금 경기 종료까지 시간이 조금 부족할 것 같습니다. 인쇄하는데 시간이...."
"인쇄가 안 되면 네가 손으로 써서 퀵으로 보내던가! 내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지시하려면 너처럼 실장을 했지. 왜 사장을 하겠어?!"
"네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현장 근처 인쇄소에 독촉해서 퀵으로 실어나르겠습니다."
"그래, 허 실장. 일해라 일! 일할 기회가 왔을 때 사공은 노를 젓는 거야. 어서 움직여!"
지 사장의 지시에 구단 수뇌부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날 강호의 데뷔 경기인 이글스 전에서 5타수 5안타, 사이클링히트까지 기록한 강호의 대활약으로 9대 6까지 쫓아왔던 이글스를 따돌리고 13대 7의 대승을 일궈내게 된다.
데뷔 무대를 팀의 승리로 일궈낸 강호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어 사직구장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코칭스태프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어~ 백 스타 아냐? 몸은 괜찮아? 뭐 이렇게 일찍 나온 거야? 조금 더 쉬다 나오지. 어제 TV나온 거 보니까 화면 빨 잘 받던데? 아주 연예인이야. 연예인. 너무 좋아~캬."
수비코치인 박한중이 다소 경망스러운 어조로 강호를 칭찬한다.
한 감독이나 김민철 수석 같은 사령탑이 출근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박한중 코치 같은 초보코치들은 일찍부터 경기장에 나와 있다.
선수들의 개인 훈련을 지도하기 위해서였다.
이른 시간에 경기장에 나온 코치는 박 코치 말고도 또 있었다.
"아니, 강호 아냐? 강호는 피곤하지도 않아? 어제 사이클링히트에다 인터뷰에다 시상금 행사까지. 많이 시달렸을텐데...아직 젊어서 회복이 빠른가보네. 역시 우리 강호! 철인이야!"
두 번째 만난 코치는 투수코치인 여민석 코치였다.
그는 양 쪽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내밀며 강호를 칭찬한다.
평소 여 코치가 과묵한 사람인 줄만 알았던 강호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제스쳐였다.
강호는 일찍 출근한 자신에게 쏟아지는 코치들의 관심과 우려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겉으로는 예의있게 대답한다.
코치들의 장난스런 칭찬에 너스레를 떨기에는 아직 자신의 위치가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신인은 신인의 태도로 코치들을 대해야한다는 것이 강호의 생각이다.
"훈련해야지요. 어제 경기는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강호는 겸양을 갖춘 말로 코치들의 칭찬에 대꾸했다.
그의 예의바른 대답에 특히나 감명을 받은 것은 여민석 투수코치였다.
"역시 우리 강호야. 좋아. 아주 좋아. 요즘 신인들이 강호처럼 됨됨이가 되면 얼마나 좋아~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 적당한 선에서만 몸을 풀도록 해. 어제 쌓인 피로도 있을 테니까."
여 코치의 충고에 강호는 '네!'라고 힘차게 대답한다.
그리고 지금의 분위기를 활용하고자하는 마음이 들게 된다.
개인훈련을 할 때 궁금했던 것들이나 평소 잘 풀리지 않았던 부분을 코치들에게 물으며 그들이 수십 년 동안 쌓은 노하우를 전수 받으려는 것이다.
특히 투수 코치인 여민석 코치에게 많은 지식과 노하우를 듣게 되었다.
"투수가 승부구를 던질 때는 역으로 생각한다는 게 일반적이야.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거든. 승부구 하면 떠오르는 게 뭐야? 코스를 찌르는 빠른 볼이나 타자 배트를 딸려오게 만드는 유인구잖아. 그런데 이걸 역으로 찌른다고 했을 때 투수가 느끼는 피로감이 상당한 거거든. 오히려 정석대로 나갔을 때 먹히는 경우도 있어. 그러니까 타자 입장에서는 생각을 쉽게 가져가는 게 오히려 타격 성공 확률이 높아지는 거야."
여민석 코치는 어제 강호의 활약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인지 강호가 묻지도 않은 많은 노하우들을 전수해 준다.
그에게서 타격 코치에게는 듣지 못했던 갖가지 지식들을 전수 받으며 강호는 새로운 기술과 방법 등을 터득한다.
2군에 머물 때는 생존하기에 바빠서 투수 코치와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여 코치의 노하우를 전수받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코치님. 완급조절이 가능한 투수를 상대할 때는 어떤 자세로 대비해야 합니까?"
강호는 이번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야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상대하기 어려웠던 투수 유형들에 대해 물으며 여 코치의 대답을 머릿속에 새긴다.
"완급조절을 하는 투수들은 보통 연차가 오래된 베테랑들이 많아. 그런 선수들은 타석에 선 타자의 배트 스피드나 스윙만으로 컨디션을 파악하는 편이거든. 배트 스피드가 좋아서 컨디션이 올라온 타자들은 빠른 볼에 자신감을 보이지. 그럴 때는 오히려 체인지업이나 슬로우 커브로 카운트를 뺏은 다음에 빠른 템포로 패스트볼을 던지는 거야. 여기서 완급조절이 들어가게 되는데 이미 베테랑 투수에게 생각을 읽혀버린 타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존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커트하는 것 밖에 없어. 그런데 이게 의외로 잘 먹히거든. 완급조절을 하는 투수들은 구속이나 구위에 의존하기보다는 제구력에 강점이 있는 투수들이잖아. 의표를 찌른 공이 커트되기 시작하면 아무리 베테랑 투수라도 감정 기복이 생기게 돼. 그 때 볼을 골라서 출루하거나 공 하나를 노리고 들어가는 거야. 어때? 쉽지?"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하며 쉽냐고 물어보고 있는 여 코치의 말. 강호는 생각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린다.
시즌은 길고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1군 무대에서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른다.
여 코치가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줄 마음을 가졌을 때 많은 것을 얻어내야만 했다.
"네, 쉽지는 않은데 대략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습니까?"
강호는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며 적극적으로 여 코치의 말을 경청한다.
그가 새로운 배움을 청하고 있을 무렵, 자이언츠 기사를 검색하는 팬들의 손길이 바빠진다.
[자이언츠의 괴물 타자! 백강호, 데뷔 경기 사이클링히트 달성!]
[데뷔 무대 사이클링히트 달성! 괴물이 탄생하다!]
[사이클링히트 달성, 백강호! 5타수 5안타로 팀을 승리로 이끌다!]
[KBO의 역사를 쓰다. 백강호 그는 누구인가?]
[자이언츠, 이글스 13대 7로 대파! 백강호의 사이클링히트가 승리의 징검다리를 놓다!]
인터넷에 강호의 데뷔 경기 사이클링히트 달성에 대한 기사가 넘쳐나고 있었다.
어제 자이언츠와 경기를 가졌던 이글스 팬들은 자신의 팀이 패했다는 사실에 분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기사를 검색해 본다.
자이언츠 팬이 아닌 야구팬이라면 기사를 슬쩍 검색해보고 지나쳤겠지만, 전국 각지에서 생활하는 자이언츠 팬들은 모든 기사들을 꼼꼼히 읽어보며 자신의 의견을 댓글로 표현한다.
이글스나 자이언츠를 제외한 일부 팬들도 기사를 확인하고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이언츠 팬들의 광적인 반응이 닮긴 댓글이었다.
그 댓글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와! 우와! 이게 진짜 자이언츠 기사가 맞는 건가? 어제 경기 직관갈 걸 그랬네. 완전 아쉬움."
"저는 직관 갔다왔는데 대박이었음. 백강호 완전 괴물임. 수비도 엄청 잘하던데 왜 2번에 놓고 쓰는지 모르겠음요."
"맞아맞아. 어제 한 경기만 봐도 딱 4번 타자감이던데. 그래도 발이 빨라서 테이블세터에 놓으면 도루나 출루는 끝내주겠더라. 최훈이 부상으로 빠졌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는데 그게 복이 됐네!"
"1회 때 때린 홈런도 대박이네. 거의 장외홈런 급이네. 이게 정녕 자이언츠 신인의 클라스인가? 덜덜덜."
"후덜덜. 어제 TV로 경기 보는데 6회에 백강호 2루타 장면에서 지릴 뻔했음. 완전 감동!"
"저는 조금 지렸음요. 지금도 재방 보면서 지리는 중입니다. 오늘도 백강호가 안타 치면 지릴 것 같은데 기저귀 대량 구매하실 분?"
"이것들이 똥, 오줌도 못 가리는 소리하고 있어? 그냥 나처럼 다 내려놓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경기 보면 되잖아."
"이런 선수가 진짜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야? 2군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던데."
"백강호 선수 2군 아닙니다. 원래 3군이었어요. 어제 스포티비에서 알려줬습니다."
"헐, 3군이라니. 대박이네."
"백강호, 원래 베어스 선수인데 방출을 당했다네요. 군대도 방출된 것 때문에 현역으로 다녀오고요."
"현역? 야구 선수가? 캬~ 어쩐지 다르다 했어. 역시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해. 역시 군필은 다르다니까!"
수많은 댓글들이 공감을 얻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댓글들이 양산되고 있었다.
댓글을 모두 읽는 데만도 족히 몇 시간 단위는 투자해야할 것 같은 많은 양이었다.
그 중 일부는 한 감독이나 구단 수뇌부의 선수기용을 칭찬하는 글도 존재했다.
"한 감독, 초반에 삽 푸더니 정신 좀 차린 모양이네. 그래도 팬들 의견 따라서 백강호를 기용했네요."
"감독보다는 구단에서 지시했다는 말이 있던데. 작년에 구단 사장이 지정만 사장으로 바뀌었다 던데 일을 제대로 하는 모양이네."
"어제 보니까 백강호 사이클링 기록할 때 바로 폭죽 터뜨리고, 전광판에 기록도 표시해주고 하던데. 이번 사장은 일을 잘 하는 모양이네요. 경기 끝나고 백강호 선수에게 상금으로 500만원도 주고, 올해 자이언츠 구단 운영은 마음에 듭니다. 이제 팀 성적만 좋으면 될 것 같아요."
사장실에서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하던 지 사장은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그는 평소에 칼같이 지키던 저녁 식사도 미루어 둔 채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내가 뭐라 그랬어? 허 실장. 일을 잘 하면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지?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지 사장의 호쾌한 목소리에 허 실장은 고개를 숙인다.
허 실장은 상사가 기분이 좋은 상황에서 허튼 소리를 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히 영리한 사람이다. 곧장 듣기 좋은 말로 아부의 말을 한다.
"네, 네. 역시 사장님이십니다. 기획하신 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네요. 오늘 기사에는 구단을 욕하는 기사가 전혀 없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언제 틀린 말 하는 거 봤어? 앞으로 나를 본받아서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도록 해. 알겠어?"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미 직원들에게도 일러 뒀습니다."
"그래야지. 일은 그렇게 하는 거야!"
지 사장은 허 실장의 보고에 만족하는 미소를 지으며 고급 체어에 몸을 기댄다.
그의 시야에는 끝없이 댓글을 양산중인 자이언츠 기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제 자신이 지시한 일로 모든 댓글들은 '백강호'라는 이름에 열광하는 모습이다.
구단에 대한 부정적인 관심을 돌리는데 성공한 지 사장. 그도 어느새 '백강호'라는 이름을 주목하게 된다.
지 사장과 팬들의 뜨거운 반응 속에 시간은 오후 6시 30분.
다시 경기의 막은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