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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날아오르다
쓰러져 있던 강호가 몸을 일으켜 덕 아웃으로 걸어 들어서자 1루 관중석의 누군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1루 관중석 그물망을 붙잡은 채 강호의 상태를 걱정하던 친 형, 강수였다.
'강호야 다치면 안 돼. 서두르지 말고, 다치지 말고. 기억하고 있지?'
강수는 강호가 힘들어할 때면 버릇처럼 말해 주었던 문장을 속으로 되뇐다.
부디 강호가 크게 다친 것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기도한다.
"와아~백강호 대단하네! 야구도 잘 하고, 몸도 강철 몸이네!"
"조금 전에 공 잡아내는 거 봤어? 여기가 메이저리그도 아니고, 저런 수비를 사직에서 보내."
"와, 죽인다. 죽여! 이글스 선수들 얼굴 표정 어두워지는 거 봤어? 오늘 경기는 우리가 이길 것 같아. 백강호가 저렇게까지 해주는데 경기를 지면 안 되는 거잖아?"
주변 팬들의 목소리가 이제야 강수의 귀에 들려온다.
강호를 걱정하는 마음에 팬들의 함성을 소음으로 여기고 있던 강수는 주변을 살펴본다.
거의 모두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홈팬들이 강호의 플레이를 칭찬하고, 환호하며, 박수를 보내주고 있다.
팬들은 이미 백강호라는 선수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저 정도 발이면 1번 타순에 놓는 게 좋지 않아? 시범경기 때 타율도 높았다며? 그럼 2번 보다는 1번이 낫지. 준오는 1번으로 두기에는 출루율이 너무 떨어져. 백강호 1번, 전준오 2번이 훨씬 좋아 보이네!"
"발 빠른 거 때문에 1번이면 휴고가 1번이지. 백강호 정도의 타격 능력이면 중심타선에 두고 써야지. 다리도 빠르고 머리도 좋으니까 3번이 좋겠네."
"아~~이 친구들. 한 경기만 보고 설레발을 치고 그러네. 2번 자리에 두고 쓰다가 몇 경기 지켜보고 판단해야지. 감독 자리가 무슨 동네 골목대장 자리인 줄 아나? 경기 하나보고 타순을 바꾸게?"
"그럼 너는 백강호를 2번에 두는 게 낫다고 보는 거야?"
"그건 아니지. 3, 4경기 지켜보다가 4번으로 써야지. 백강호 시범경기 득점권 타율이 7할이 넘는단 말이야. 전형적으로 찬스에 강한 유형이야! 발이 빠르다고 1번으로 쓰기에는 클러치 능력이 아깝단 말이야. 백강호는 무조건 4번으로 가야돼!"
자이언츠의 골수팬들은 벌써부터 강호의 타순을 놓고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강수는 뿌듯해진다.
사실 오늘 경기는 걱정이 많았다. 단 한 번도 1군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동생이 긴장해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까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동생은 자랑스럽게도 1회부터 홈런을 때려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이클링히트 가능하겠는데?"
"그건 좀 무리지. 조금 전에 허리 뒤틀리는 거 못 봤어? 다음 타선에는 빠질 거야. 저 정도 부상이면 못해도 일주일은 쉬어줘야 해."
"그래. 신인 선수를 너무 무리시키면 안 되지~ 앞길이 창창한 선순데. 푹 쉬게 해서 앞으로 우리 자이언츠의 중심타선으로 키워 내야지~”
강호가 6회 초 수비상황에서 쓰러지자 팬들은 사이클링히트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았던 강호의 송구 동작에서 무리한 동작으로 인한 허리 뒤틀림이 심각하다고 본 것이다.
대부분의 팬들이 아쉬워하면서 강호의 부상이 큰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강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강호 녀석이 제 발로 일어났다는 건 다음 타석 때도 타자로 오를 수 있다는 의미야. 웬만한 부상쯤은 웃으면서 참아내는 녀석이니까. 걸을 수 있을 정도면 타석에도 오를 수 있어!'
강수는 동생을 믿었다.
몸을 생각한다면 다음 타석에서 빠지는 게 맞겠지만, 그렇게 물러서기에는 묵묵히 견뎌낸 5년의 시간이 아깝다.
쓰러지더라도 2루타 하나는 더 때려내고 쓰러지는 것이 강호의 본 모습일 것이다.
강수는 속으로 강호의 부상이 심한 것이 아니기를 다시 기도한다.
'강호야. 너는 할 수 있어! 이렇게 쓰러지려고 5년을 견뎌낸 게 아니잖아. 다시 타석에 올라서 모두에게 보여 봐. 네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란 말이야!'
강수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동안 강호가 밟아온 처절했던 인고의 시간을 잘 알고 있는 강수. 고통의 세월을 이겨낸 강호라면 다음 타석에 오를 자격이 충분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생 강호가 다음 타석만큼은 올라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형에게 보여 다오. 강호야. 네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줘!'
강수는 동생이 일어나 아직 비어있는 타석에 들어서주기를 기다린다.
그의 눈동자는 강호의 것과 닮아있었다.
형이 마음속으로 외치는 응원의 목소리가 강렬한 에너지가 되어 퍼져나갈 무렵, 강호는 이미 배트를 집어 들고는 덕 아웃을 나서고 있었다.
'감이 좋아. 이번 타석에서는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아도 안타를 때려낼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
강호는 배트를 쥔 감각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타석에 오르려는 자신을 타격코치인 정호종이 불러 세워서 타격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있었지만, 귀에 들리지 않는다.
강호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한다.
'할 수 있어. 지금이라면 내가 5년 동안 쌓아올린 결과들을 보여줄 수 있을 거야.'
강호는 강한 자신감이 차오름을 느낀다.
이미 홈런과 3루타, 안타를 기록한 상태다. 아이템을 사용해 손쉽게 2루타만 기록한다면 데뷔경기 사이클링히트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올릴 수가 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아이템 없이도 안타를 때려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오른다.
'아니, 아니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기회야. 내가 99%확률로 2루타를 때려낼 자신이 있어도 확실한 100%의 아이템을 사용해야 하는 순간이야. 지금은 확실한 게 필요해. 이번 타석이 두고두고 회자되게 될 테니까.'
강호는 결국 아이템을 사용하기로 한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좋고, 좋은 기분도 들고 있었지만 확실한 것이 필요한 상황.
자신의 손으로 역사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지만, 냉정하게 판단을 내린다.
-주자가 없는 상황입니다.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시스템의 메시지가 마지막 결정을 고민하게 만든다.
이내 마음속 갈등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두어 차례 흔들고는 타격 자세를 취한다.
그라운드가 조용하게 가라앉는 게 느껴진다. 이상하리만치 경기장이 조용하다.
1군 무대 첫 데뷔전이라 강호의 응원가가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자이언츠의 응원단장과 치어리더는 아무런 응원 없이 팬들에게 침묵해질 것을 당부한다.
직전 수비 상황에서 부상이 염려되는 플레이를 했던 강호다.
어렵게 타석에 오른 만큼 조금만 더 집중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 경기장이 조용해졌습니다. 자이언츠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문화를 생각한다면 의외의 모습입니다."
중계석의 전 캐스터는 무겁게 가라앉은 경기장의 분위기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자 곁에 앉은 이효범 위원이 약간은 작아진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저까지도 긴장이 되는데요. 6회 초 수비상황에서 백강호 선수의 허리부상이 염려됐었거든요. 지금 타석에 오른 것은 기록을 의식해서 본인이 괜찮다고 주장을 한 것 같은데...허리가 좋지 못하면 스윙이 제대로 나오지를 않아요. 무리한 기록 욕심보다는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위원은 강호의 부상을 염려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왕이면 부상을 딛고 타석에 오른 강호가 KBO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달성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것은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팬들로서도 마찬가지여서 자이언츠 팬뿐만 아니라 이글스 팬들의 일부도 강호가 2루타를 때려내길 바라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가 긴장감 속에 경기를 지켜보는 가운데 투수의 초구가 던져진다.
"볼 원."
초구에 대한 주심의 판정을 볼이었다.
투수인 강기현이 강호의 기록 달성을 의식한 것인지 바깥쪽으로 벗어나는 변화구를 던지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2구 또한 크게 벗어나는 볼.
"우우우우~~!"
"장난치나? 똑바로 안 던질래?!"
1루 관중석에서는 일부러 승부를 피한다는 느낌을 받고는 야유를 쏟아낸다.
그동안 강호는 타석에서 반 발짝 물러나 배트의 끝부분을 바라보며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몇 초의 긴장된 시간이 다시 흐르고, 투수인 강기현과 타자인 강호가 준비 동작을 끝내고 서로를 노려본다.
강호는 상대 투수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잡아먹을 듯한 강렬한 눈빛으로 강기현 투수의 모든 것을 주시한다.
그 긴장되는 모습에 지켜보는 이들의 숨이 멎는다.
부웅.
긴장된 시간 끝에 와인드업을 마치 강기현의 손끝에서 공이 떠난다. 앞 선 두 개의 공에는 미동조차 없었던 강호는 그 순간, 눈빛을 빛내며 힘껏 끌어당겼던 배트를 내민다.
따악!
맞는 순간 정타임을 느끼게 하는 잘 맞은 타구가 이글스 내야수들의 키를 넘기고, 외야로 향한다.
"우와아아아!!"
"돌아, 돌아, 돌아!! 2루까지 돌아!"
강호의 안타에 침묵하고 있던 사직구장이 일순간 깨어난다.
홈팬들은 열성적인 목소리로 강호가 2루까지 달리기를 외치고 또 외친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모든 팬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진다.
"2루로!! 2루까지 달려!"
팬들은 한 목소리를 내며 강호의 2루타를 외친다.
정타로 뻗어나간 안타의 질은 좋았지만, 방향이 좋지 않았다.
한 번의 바운드 뒤에 좌익수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간 모습을 확인한다.
타구는 빨랐지만, 그 덕분에 단타로만 끝날 것 같은 정직한 코스.
"돌아, 돌아, 돌아!!"
그 코스에도 팬들은 강호가 2루까지 향해주기를 목 놓아 외친다.
강호역시 팬들과 생각이 같은 것인지 이미 1루 베이스를 밟은 후, 2루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좌익수의 손을 떠난 공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2루 베이스를 향해 빠르게 쏘아진다.
파학!
유격수의 미트에 공이 들어가는 소음과 함께 태그가 이루어진다.
강호는 이번에도 몸을 사리지 않는 강력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2루 베이스 위에 쓰러져 있다.
강호는 흙이 옷 속을 파고드는 불쾌한 느낌에 인상을 찡그리며 2루심을 향해 고개를 든다.
그의 모습이 부상을 당한 선수의 표정과 흡사하여 중계로 상황을 지켜보는 자이언츠 팬들의 걱정을 사게 된다.
하지만 부상 우려보다 더 큰 것은 바로 2루심의 판정이었다.
"세잎! 세이프!!"
2루심의 콜이 떨어진다.
그는 급박한 상황을 의식한 건지 두 번이나 콜을 하며 세이프를 확인시켜 준다.
순간 사직구장을 들썩이게 만드는 함성 소리와 함께 사직동 전체가 밝아진다.
구장의 외곽 쪽에서 쏘아올린 수많은 불꽃들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아 주었고, 몇 년 전에 교체한 LED전광판에는 세계 최초를 알리는 데뷔경기 사이클링히트 기록을 표기해주고 있었다.
장내 아나운서는 특유의 목소리로 환호하는 팬들에게 강호의 사이클링히트가 달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아아아~! 자이언츠 팬 여러분! 그리고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야구 팬 여러분! 지금 이곳 사직에서 야구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 달성 되었습니다! 백강호 선수의 데뷔경기 사이클링히트가 기록됩니다! 오늘 사직구장은 축제입니다!!"
중계석의 전 캐스터는 강호의 기록 달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빠른 속도로 말을 뱉어낸다.
그의 말과 내용, 그리고 중계 화면을 바라보는 자이언츠 팬들은 구단 역사를 넘어 KBO역사에 남을 기록 달성의 순간을 축하했고, 현장을 찾은 야구팬들은 흥분된 목소리로 ‘백강호’라는 이름 석 자를 있는 힘껏 외친다.
"백강호! 백강호! 백강호!!"
1만 5천명이 넘는 팬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자 고막을 때리는 엄청난 소리가 그라운드에 가득 울려 퍼진다.
모두가 강호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모두가 부르짖고 있는 이름의 주인은 정작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결국 사이클링을 기록했구나.
강호는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이 밟고 있는 2루 베이스를 내려다본다.
조금 전 타석에서 맞이하게 된 고민의 순간. 강호는 이성의 목소리를 따라 2루타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아직은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야. 확실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어.'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은 길었지만 결국 처음의 결정을 따르기로 한다.
아직 6회 말, 선두타자로 나선 상황이어서 혹시 이번 타석에서 2루타를 때려내지 못하더라도 8회에 기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선두타자가 아니라 2아웃 상황의 마지막 타자로 나왔었다면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이 맞았지만, 선두타자로 나온 상황이었기에 7,8회 공격이 모두 삼자범퇴로만 끝나지 않는다면 또 한 번의 타석이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강호의 마음은 대기록 달성 순간과는 어울리지 않게 침착했다.
마치 지금의 기록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강호는 철저하게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기록달성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팬들에게 내 진심을 보일 필요는 없겠지.'
2루 베이스 위로 올라선 강호는 세상에서 가장 기쁜 순간에, 극도로 감정이 절제된 얼굴로 주먹을 들어 올린다.
그러자 사직구장을 흔드는 함성 소리가 더욱 커진다.
"와아아아!!!"
팬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강호는 양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린다.
어두운 하늘을 밝히는 축포들, 전광판에 수놓아진 대기록 달성의 글자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 가운데 강호의 첫 경기는 그렇게 완성된다.
강호는 데뷔전을 통해서 한국야구 역사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