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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날아오르다
강호의 리드 폭에 이글스 덕 아웃에 무거운 분위기가 감지 된다.
조금 전,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 1루 주자인 강호에게 분주하게 싸인을 보냈었다.
그 후 강호의 리드 폭이 더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 도루 싸인을 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자이언츠에서 도루 싸인을 낸 것 같은데요?"
분위기가 가라앉은 이글스 벤치에서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김재헌 타격코치였다.
김 코치는 자이언츠의 도루 사인이 도발의 의미라고 여긴 것인지 표정이 좋지 않다.
그의 말에 대답하는 상대 역시 미간을 찡그린다.
"도루할 수도 있겠지. 요즘은 불문율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있잖아."
대답하는 목소리는 임수빈 코치의 것이었다.
임 코치는 상대가 도루하는 것을 용납한다는 발언을 하면서도 기분이 좋지는 않은 것인지 콧잔등을 씰룩인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꽤나 큰 편이었다.
이글스의 사령탑인 김명근 감독이나 김광석 수석코치의 귀에 들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
원래 과묵한 편인 김명근 감독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그라운드를 응시하더니 곁에 서있던 김광석 수석에게 손짓한다.
김 수석은 감독의 부름에 감독석에 앉아있는 김 감독을 향해 상체를 숙인다.
"휴고는 거르라고 해."
의외의 지시였다.
김 수석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무사의 상황에서 발 빠른 주자인 강호가 1루에 있다. 마찬가지로 발 빠른 휴고를 거를 이유가 있을까.
휴고의 좋지 못한 타격감을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다.
"고의사구 말입니까?"
확인 차 물어보게 된다.
그러자 김 감독이 재차 입을 연다.
"아니, 고의사구 말고 볼넷. 백강호가 2루로 가고, 휴고가 1루에 출루하면 자이언츠에서 도루 싸인을 내진 않을 거야. 4번 타자 황제인은 요즘 스윙이 커져서 내야 뜬공 비율이 높아. 5번 타자인 강민수는 땅볼 비율이 높고."
김 감독은 그 정도 설명만으로 김 수석이 알아들을 거라 여겼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을 함께한 관계여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글스에서 김 감독이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더 이상 설명을 요구하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100% 납득된 것은 아니지만, 김 수석은 감독의 말에 대답하며 배터리 쪽에 싸인을 낸다.
'거르라고?
포수 차연목이 벤치의 사인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타석에 오른 타자는 휴고였다.
몸 쪽에서 떨어지는 유인구와 바깥쪽으로 높게 형성되는 패스트볼에 약한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타자다.
굳이 거를 필요가 없다고 보지만, 벤치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볼 넷. 베이스 온 볼."
휴고의 타석에서 주심의 볼넷 콜이 선언된다.
고의 사구는 아니었다.
김 감독의 의중을 대략 파악한 김 수석이 빠지는 공이나 유인구로 볼넷을 줄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무사 주자 1,2 루 상황. 4번 타자인 황제인이 타석에 들어선다.
'내 앞에서 타자를 걸러? 나를 뭘로 보고 이러는 거야?'
제인은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4번 타자인 자신의 앞에서 휴고가 고의 사구나 다를 바 없는 볼넷으로 걸러진 상황이다.
어떤 타자라 해도 기분 나쁠 것이다.
그 점을 중계석의 전 캐스터가 지적한다.
"아아, 지금 황제인 선수의 표정이 좋지 않아요. 휴고를 볼넷으로 내보낸 이글스 배터리의 결정이 어떻게 작용을 할 지 주목됩니다."
전 캐스터의 말이 끝나자 이효범 위원이 곧장 입을 연다.
"황제인 선수의 감정이 동요된 것 같아요. 황제인 선수 입장으로서는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침착해야 합니다. 지금은 큰 스윙보다는 컨택 위주의 스윙이 도움이 되는 상황이에요. 팀이 또 다 득점을 할 기회거든요. 이글스 배터리의 심리전에 걸려든다면 아웃카운트만 들리게 될 겁니다."
이 위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황제인이 상대 투수 초구에 스윙을 한다.
누가 봐도 장타를 노리는 풀 스윙에 공이 빗맞게 되고, 공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높이 떠오르게 된다.
황제인은 '하아'소리를 내며 탄식한 후 고개를 숙이고 1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몇 발자국 떼지 못하고, 걸음을 멈춘다.
이글스의 포수 차연목이 내야에 뜬공을 손쉽게 잡아냈기 때문이다.
타구가 내야 플라이로 잡히는 바람에 주자는 한 베이스도 진루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은 감정적인 스윙 같아 보입니다.
중계석의 이효범 위원이 황제인의 타격을 그렇게 평하고, 이어서 전 캐스터의 중계가 이어진다.
"황제인 선수의 내야 뜬공으로 주자는 움직이지 못한 채 아웃카운트 하나가 늘어납니다. 주자는 여전히 1, 2루에 1사 상황이 강민수 선수에게 주어집니다."
"강민수 선수 요즘 타격감이 좋지가 않아요. 배트 타이밍이 안 맞고 있거든요. 최근 며칠 사이 기록한 안타도 빗맞아서 만들어진 행운의 안타가 많았어요. 이번 타석에서 타격감을 끌어올려야 될 텐데요.”
이 위원이 타격 부진을 겪고 있는 민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의 해설을 들은 자이언츠 팬들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역시나 투수의 공을 제대로 타격하지 못한 민수의 타구가 유격수 방면으로 향한다.
"아아~!"
홈 팬들의 탄식 소리가 응원석을 채운다.
일부 팬들은 병살을 예감하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기도 한다.
스타트가 빠른 2루 주자 강호를 잡기는 무리였지만, 운이 좋다면 병살로도 연결할 수 있는 코스였다.
특히나 타자 주자인 민수의 발이 느린 편이어서 이글스의 유격수는 병살 플레이를 위해 포구를 서두른다.
투욱.
그런데 약간의 이변이 일어난다.
유격수가 빠른 포구를 위해 앞쪽으로 전진했을 때, 타구가 불규칙 바운드로 튀어 오른 것이다.
'어딜?'
그러나 이글스 유격수의 수비력이 좋은 편이어서 불규칙하게 튀어 오르는 타구를 가슴으로 받은 다음 떨어진 공을 주워 곧장 2루로 송구한다.
"아웃!"
유격수가 공을 더듬기는 했지만, 1루 주자였던 휴고를 아슬아슬하게나마 2루에서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1루 타이밍이 애매하다.
타구가 유격수 앞에서 튀어 오른 것을 확인한 타자 주자 강민수가 죽을힘을 다해 1루로 뛰고 있는 것이다.
포지션이 포수인 까닭에 발이 느린 민수였다. 하지만 병살을 만들 수 없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1루 베이스를 밟는다.
"세이프!"
1루심의 세이프가 선언되고 있었다.
1루수는 세이프 선언에 펄쩍 뛰며 아웃을 주장했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1루로 향한다.
그래서 이글스의 1루수는 미처 보지 못했다.
3루 베이스를 돈 강호가 홈으로 쇄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홈! 홈! 홈!!"
가까이에서 소리치는 투수 강기현의 목소리에 1루수가 급히 홈을 바라본다.
그의 시야에 이미 홈을 향해 절반 이상 달리고 있는 강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송구가 늦으면 세이프 판정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부옹.
급히 공을 던지자 자신의 옷깃 스치는 소리가 1루수 김태준의 귀를 때린다.
갑작스레 공을 던진 까닭에 어깨가 뻐근하지만, 지금은 홈으로 향하는 주자를 잡는 것이 먼저였다.
태준의 공이 포수 차연목의 미트로 향한다.
아슬아슬한 타이밍. 질주하던 강호가 몸을 던지다시피 하며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홈을 스친다.
"세이프!"
주심은 망설이지 않고 세이프를 외친다.
그러자 홈팬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크게 환호한다.
"와아아아!!"
"나이스 백강호!!"
"백강호 잘 했다!"
강호의 멋진 주루 플레이에 크게 환호하는 홈 팬들. 반대로 3루 쪽에 자리 잡은 이글스 팬들은 검지로 직사각형을 만들며 비디오 판독 시그널을 그린다.
"비디오, 비디오! 아웃 타이밍이잖아! 비디오 판독하란 말이야!"
3루 쪽 원정 팬들의 원성이 이글스 덕 아웃을 파고든다.
이미 이글스 덕 아웃에서도 발 빠르게 비디오 판독을 요청한 상태였다.
중계석에서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아~지금 조금 난해한 상황이 나왔습니다. 강민수 선수가 때린 유격수 땅볼이 2루에서 아웃되고, 1루에서 세잎 선언 됐거든요. 1루수인 김태준 선수가 심판 콜에 불복하는 사이 2루 주자인 백강호 선수가 홈으로 파고들었어요. 지금 보시는 것처럼 홈에서도 세잎이 됐고요."
전 캐스터가 상황을 설명하자 이효범 위원이 해설을 더한다.
"우선은 1루수 김태준 선수의 아쉬운 플레이를 지적할 수가 있겠네요. 아직 인플레이 상황이거든요. 병살타가 가정되는 상황에서 2루 주자인 백강호 선수가 홈으로 향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거예요. 세이프 선언과는 상관없이 홈을 보고 있었어야 해요. 조금은 아쉬운 장면이 나왔습니다."
이 위원은 이글스의 1루수, 김태준의 아쉬운 플레이를 말하면서 강호의 주력에 대해서도 입을 연다.
그러자 중계 화면에 강호가 홈으로 향하는 장면이 리플레이 되어 나온다.
"지금 백강호 선수의 홈 쇄도 장면이 나오고 있죠"
"정말 열심히 뛰네요. 하하. 역시 신인선수 답습니다."
리플레이 화면을 본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홈으로 달리는 강호를 칭찬한다.
얼굴 피부가 밀려날 정도로 빠르게 달리는 강호의 허슬은 홈 슬라이딩 장면에서도 이어졌다.
달려오는 탄력을 전혀 줄이지 않은 채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강호의 과감한 슬라이딩 모션에 전 캐스터가 놀란 목소리를 낸다.
"와아~~백강호 선수 정말 허슬이 대단합니다. 지금 허공에 몸을 완전히 날렸어요. 마치 영화 슈퍼맨을 보는 것 같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입니다. 허허."
"사실 저 정도 플레이는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습니다. 부상 위험이 크거든요. 2016년에 개정된 홈 주루 방해규정 덕분에 포수가 홈플레이트 옆으로 비켜나기는 하지만, 여전히 홈 주루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백강호 선수가 다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리플레이 되는 강호의 홈 슬라이딩 장면에 이 위원이 우려를 표한다. 그러나 곁에 앉은 전 캐스터는 오히려 강호의 허슬 플레이를 칭찬한다.
중계를 보고 있는 자이언츠 팬들은 이 위원의 말을 귀담아 듣기보다는 강호를 칭찬하는 전 캐스터의 말을 주목했다.
"와아~백강호. 저 선수 물건이네! 지금 거의 3미터는 날아간 것 같은데?"
"너는 백강호 선수 오늘 처음 보는가 보네? 백강호는 시범경기 때부터 저랬어. 원래 몸을 사리고 그러는 선수가 아니야. 저렇게 목숨걸고 야구하니까 시범경기 타율이 5할이나 나오지."
"내가 볼 때 5월 정도까지는 백강호의 타율이 4할 이상 나올 것 같은데? 지금도 3타수 3안타잖아?"
자이언츠 팬들은 새로운 대형 신인의 등장에 즐거운 마음으로 의견을 교환한다.
강호의 허슬 플레이가 잊고 있었던 자이언츠의 뜨거운 야구 혼을 불어넣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리플레이 되는 중계화면에서 1루 타자주자의 세잎 판정과 홈 세잎 판정에 대한 두 개의 비디오 판독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중계를 보는 자이언츠 팬들은 누구 하나 걱정을 하지 않는다.
강민수의 1루 상황은 누가 봐도 세이프로 보였고, 강호의 홈 상황도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세잎이 확실해 보였다.
"세이프. 앤 세이프."
긴 비디오 판독을 마치고 나온 주심이 1루를 가리키며 한 번의 세이프를, 그리고 홈을 가리키며 다시 세이프 콜을 선언한다.
그러자 현장과 TV중계로 경기를 보고 있는 모든 자이언츠 팬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낸다.
"와아아아!!"
"내가 세잎일 줄 알았어! 저게 어딜 봐서 아웃이야?"
"백강호 짱이다!"
홈팬들의 성원이 사직구장을 가득 채운다.
자칫 잘못하면 덕 아웃에서 나온 그린 라이트로 험악한 분위기에 빠질 뻔했던 4회 말의 상황은 최선을 다해 1루로 달렸던 캡틴 강민수의 주루와 몸을 사리지 않는 강호의 홈 쇄도로 1득점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양 팀 코칭스태프와 팬들이 걱정하던 도루로 인한 빈볼 상황은 이제 발생하지 않게 된 것이다.
"백강호! 잘 했어! 주루 플레이 좋았어! 나는 네가 2루로 도루하는지 알고 깜짝 놀랐잖아?"
1득점을 올리고 덕 아웃으로 들어온 강호에게 김 수석이 활짝 웃는 얼굴로 오른손을 내민다.
한 감독의 그린라이트 사인이 있었으니 지금 김 수석의 말은 한 감독의 생각과 반대되는 입장이 되지만, 김 수석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한 감독과의 관계를 회복하기에는 늦었다고 보고, 강호의 플레이를 칭찬하는 솔직한 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는 그런 김 수석과 손뼉을 마주치며 답한다.
"도루도 좋지만 자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벤치에서 주신 싸인이 주루 플레이에 신경을 쓰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강호의 대답이었다.
그 역시 한 감독과 나머지 코치들의 신경전을 알고 있었기에 양 쪽 진영 모두에게 자극이 되지 않는 말로 대답했다.
평소의 강호와 다르지 않은 영리한 답변이었다.
'녀석. 정말로 잘 했다. 너는 내가 본 신인 중에서 최고로 멋진 놈이야. 왜 손 감독님께서 너를 눈여겨보는지 알겠어. 단지 실력뿐만 아니라 머리나 인성도 수준급이야. 최고다. 백강호!'
김 수석은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자신의 감정을 손길에 담아 대견하다는 듯이 강호의 등을 두드린다.
강호의 섬세한 플레이 하나가 걱정 가득했던 자이언츠 덕 아웃을 웃음으로 가득 차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모두가 잊고 있었지만, 강호는 위대한 기록을 목전에 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