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6 / 0335 ----------------------------------------------
강호, 날아오르다
이글스와의 사직 전 경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간. 경기 전 훈련에 나선 강호는 어깨가 경직된 상태였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이 무대에 오르게 되었구나.'
담담한 표정으로 훈련에 집중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 박동이 귀까지 들릴 정도로 잔뜩 흥분하고 있다.
"어?! 백강호다! 백강호 선수! 오늘 기대할게요!!"
"백강호! 첫 경기 잘해라! 다치면 안 돼!"
"백강호 선수, 무리하지 말고 안타하나만 쳐주세요!"
1루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팬들의 응원 소리가 귀에 닫지 않을 정도로 강호는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을 받고, 습관적으로 다음 야수에게 공을 송구한다.
오래된 훈련으로 몸이 반응을 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경기 전 연습에서 실수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침착하자. 백강호. 시범경기 때 사직에서 경기한 경험이 있잖아. 뭐가 다르다고 이렇게 얼어있는 거야? 오늘도 똑같은 경기일 뿐이야.'
강호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정신을 집중한다.
여태껏 바닥을 전전하며 고생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지금의 긴장을 떨쳐내려 한다.
자신을 버린 구형태 감독의 얼굴도 떠오르고, 베어스 시절 동료들의 얼굴도 보이는 듯하다.
자이언츠로 넘어와서는 문표 선배를 비롯해 한택근, 황인태, 권대우, 가진성, 오진만, 안민경 등 좋은 선수들과도 새로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올린 인물을 통해 잔뜩 요동치던 가슴이 진정됨을 느낀다.
"절대 멈추지 말거라. 네 야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힘 있는 목소리로 대만의 어두워진 경기장을 밝혔던 손 감독의 말.
강호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이를 악문다.
'맞습니다. 감독님. 제 야구는 지금 시작된 겁니다. 시작부터 떨어서야 감독님을 뵐 면목이 없겠지요. 감독님께서 믿어주신 만큼의 결과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강호는 손 감독의 얼굴을 떠올리며 위태롭던 마음을 빠르게 수습한다.
정신을 차린 강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상태창을 열어 스탯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손 감독뿐 아니라 프리마켓 시스템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평정심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강호(24)
포지션:2B
컨 택:74
파 워:60
선구안:56.1
주 력:75
수 비:76.9
송 구:65.6
멘 탈:80.2
시야에 뜨는 상태창을 보면서 강호의 마음은 완전히 안정된다.
데뷔전에서 부여받은 포지션은 강호가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2루수였다.
강호가 데뷔전 무대를 2루수로 시작하게 된 것은 모두 손 감독의 안배였다.
1군으로 승격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라 흘려들었던 손 감독의 말을 떠올려 본다.
-너에게 중견수 훈련을 시킨 건 사실 한 감독과의 약속에 의해서였다. 혹시라도 너를 휴고의 대체자로 사용하려는 한 감독의 의도를 따를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1군 무대에 올라가게 되면 외야수가 아닌 2루수로 기용될 거야. 그것을 위해서 상동으로 내려온 너를 2루 자리에 출전시킨 거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손 감독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상태창에서 자신의 수비 포지션을 확인하게 되자 그의 깊은 뜻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된다.
'여론을 조장하려 하신 거겠지. 한 감독은 나를 멀티 포지션으로 활용하려 했어. 어쩌면 휴고의 대체자로 우익수에 기용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손 감독님이 2군에 내린 나를 2루수로 기용함으로써 한 감독의 선택지를 막은 셈이야. 마침 최훈 선배가 빠진 2루수 자리가 공석이 되며 나를 외야가 아닌 내야로 올릴 당위성이 생긴 거야. 팬들의 여론 또한 나의 2루수 자리를 원하고 있으니까.'
자신의 자리를 확실히 만들어주기 위한 손 감독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느껴진다.
손 감독은 1군 무대에 오를 강호가 익숙하지 않은 외야 자리보다는 내야수로 기용되기를 바랐다.
그런 까닭에 허리부상을 참고 뛸 수 있는 최훈을 재활 군으로 내리는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강호를 위한 손 감독의 안배였다.
'손 감독님께서 어렵게 만들어주신 2루수자리인데. 첫 경기부터 망칠 수는 없어. 오늘 경기. 최고의 데뷔 경기로 만들겠어!'
불안했던 강호의 눈빛이 투지 넘치는 원래의 강렬함을 되찾는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 경기는 시작되었다.
터엉!
마운드에 오른 자이언츠 투수의 공이 포수의 미트를 파고 든다.
"스트라이크!"
코스를 절묘하게 파고드는 공에 주심은 투수의 초구를 스트라이크로 판정한다.
선발 투수인 박세준은 포수에게 공을 돌려받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스스로의 공에 만족스러움을 표시하는 세준의 습관이었다.
'세준이의 공이 좋아. 베어스 전에서 좋은 구위로 승리 투수가 되었는데 오늘도 감이 좋구나. 저런 공이라면 우리 팀이 이기는 것도 어렵지 않겠어.'
강호는 오늘 경기가 승리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그러 하겠지만, 특히나 강호는 오늘 경기를 반드시 승리로 일구고 싶었다.
'백업도 아니고, 선발 야수로 처음 오른 1군 무대야. 반드시 이기고 싶어!'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런 까닭에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치열함이 강호의 표정에 맴돌고 있었고,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투지에 덕 아웃에서 지켜보던 코칭스태프도 크게 만족한다.
아직 강호의 플레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경기를 대하는 자세만큼은 합격점을 주고 싶다.
"강호 녀석의 각오가 대단하네요. 1군에 처음 올라온 선수의 저런 눈빛을 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아니, 처음인 것 같은데요?"
김일군 작전코치의 말이었다.
그의 말에 팔짱을 낀 채 그라운드를 바라보던 김민철 수석이 대답했다.
"백강호니까. 근본부터 다른 선수야."
김 수석의 짧은 대답에서 그가 얼마나 강호를 높이 평가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코치들도 마찬가지였다.
강호의 진지한 태도에서 자신들의 선수시절을 되돌아보게 된다.
따악.
그 때 세준의 4구가 이글스 1번 타자에게 통타당한다.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노리고 친 잘 맞은 타구였다.
좌타자의 타구가 빨랫줄처럼 외야로 향한다. 너무도 잘 맞은 타구였기에 중계 카메라도 빠르게 외야를 향해 카메라를 돌린다.
터업!
갑작스런 소음에 외야로 앵글을 옮기던 중계카메라가 급히 멈춘다.
2루수인 강호가 빠르게 뻗어나가는 안타 성 타구를 중간에서 낚아챈 것이었다.
"우와! 뭐야? 잡은 거야?"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보지도 못했어."
너무 빠르게 지나간 장면에 카메라뿐 아니라 팬들 또한 어리둥절해한다.
1루심의 아웃 콜을 확인하고 나서야 강호가 라인드라이브 성 타구를 잡아낸 것을 알아차린다.
그제야 호수비를 펼친 강호에게 환호성이 들려온다.
"백강호 최고다!"
"역시 백강호!"
자신을 향한 함성을 들으며 강호는 글러브에 든 공을 야수들에게 돌린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방금 전의 호수비는 아이템 사용 없이 강호가 직접 판단해서 잡아낸 것이었다.
'출발이 좋아.'
조금 전의 수비로 경기에 대한 감각을 끌어올린다.
'강호, 좋은 수비다.'
마운드에서 정타를 얻어맞았던 세준은 강호가 잡아낸 뜻밖의 아웃카운트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강호는 세준에게 글러브를 들어 화답한 후, 다시 자세를 잡았다.
첫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호수비 덕분에 더욱 안정적인 투구를 하는 세준. 다음 두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빠르게 이닝을 지워버린다.
그 모습에 해설위원석에서 경기를 중계하던 캐스터가 곧장 입을 연다.
"스트라이크, 아웃! 박세준 투수, 연속 삼진으로 이닝을 3자 범퇴로 마무리 합니다."
경쾌한 목소리로 이닝 종료를 알리는 전용제 캐스터, 해설위원인 이효범 위원이 전 캐스터의 말을 받는다.
"아~지금 공은 타자 몸 쪽을 완벽하게 파고들었습니다. 박세준 투수는 오늘도 좋은 피칭으로 자이언츠 팬들을 안심시키네요."
이 위원은 세준의 투구를 칭찬한다.
이효범 위원의 말이 끝나자 전 캐스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화면에 표시되고 있는 라인업을 읽었다.
tv중계 화면에는 자이언츠의 타순이 그려지고 있었다.
"자이언츠의 타순을 살펴보겠습니다. 1번에는 전준오, 2번에는 백강호, 3번에는 휴고, 4번에 황제인, 5번에 캡틴인 강민수, 6번에는 지명타자 채중석, 7번에 김상훈, 8번에 오진택, 9번에는 김중호 선수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효범 위원께서는 오늘의 키 플레이어로 백강호 선수를 뽑아 주셨어요."
전 캐스터의 라인업 설명이 끝나자 기다리고 있던 이효범 위원이 말을 받는다.
"그렇습니다. 아직 정식 경기 기록이 없는 백강호 선수이지만, 2군 경기에서 4할대의 고 타율을 기록했었거든요. 시범경기 타율은 무려 5할 8리입니다. 자이언츠 타선은 2번 타순에 백강호 선수가 들어가는 것만으로 짜임새를 갖추게 되었어요. 오늘 경기에서는 2번 타순의 백강호 선수가 중심 타선에 어떤 식으로 기회를 연결해주는 지가 관전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효범 위원의 말이 끝나자 tv로 중계를 지켜보던 많은 팬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구에서 벌어졌던 라이온즈와의 원정 경기에서 2연패를 당하며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모든 팬들의 생각이었다.
때 마침 시기적절하게 1군으로 올라온 강호의 존재는 꽉 막혀 보이던 자이언츠 타선을 강타선으로 보이게 만드는 착시효과마저 들게 한다.
"그러네. 백강호가 2번에 있으니까 자이언츠 타선도 괜찮아 보이네. 오늘은 이겨야지. 시즌 초반부터 3연패를 해서야 되겠어?"
거제시장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황동철이 목소리를 높인다.
개막전 패배 후 자이언츠가 3연승을 달릴 때만해도 강호의 존재를 조금은 잊고 있던 동철이었다.
그런데 라이온즈와의 남은 경기를 내리 패하며 시즌 전적이 3승 3패가 되자 무시하고 있던 자이언츠의 빈약한 라인업에 눈이 가게 되었고, 강호의 부재를 실감하게 된다.
"백강호 하나 올린다고 경기가 달라지겠어? 요즘 자이언츠 하는 거 보면 3연패가 아니라 10연패도 가능할 거야."
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 최갑식이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로 자이언츠의 구단 운영을 성토한다.
"그래도 오늘 투수가 박세준이잖아. 세준이 정도면 연패는 끊어주겠지."
곁에서 또 다른 친구, 김현승이 자이언츠의 입장을 변호한다.
"근데 백강호가 오늘 1군 무대 처음 올라온 거라며? 괜히 긴장해서 공만 바라보다가 삼진 먹고 들어가는 거 아냐? 보통 신인들이 그렇잖아?"
갑식의 말이었다.
그는 며칠 보지 못했던 강호의 타격 능력을 잊은 것인지 강호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얌마, 백강호 시범경기 타율이 5할이야. 5할! 5할을 치던 선수가 안타 하나 못 때리겠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2군에 있었다지만, 2군 성적도 4할 4푼이나 된다잖아. 모르면 좀 가만히 라도 있어!"
이미 술이 꽤나 취한 동철은 친구의 답답한 말에 강호를 변호하고 나선다.
그 사이 선두 타자인 전준오가 상대 투수와의 8구 접전 끝에 볼넷을 얻어낸다.
선투 타자가 출루를 한 것이다.
타석에 선 강호는 자신을 향한 기류를 감지하게 된다.
응원의 목소리는 줄어들고, 묘한 기대감이 자신에게로 향한다.
그 시선은 1군 데뷔 첫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낼 것인가 하는 의문과 안타를 쳐서 팀의 기회를 살려냈으면 하는 바람이 합쳐진 시선들이었다.
강호는 많은 이들의 기대와 바람 속에 타석에 자리를 잡는다.
-주자 1루 상황입니다.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어김없이 시스템 메시지가 시야에 표시된다.
마음 같아서는 시스템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나 치기 어린 마음은 고이 접어두고 인벤토리에 보관되어 있는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든다.
'백강호. 초구에 타격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은 타자야. 시범경기 때의 기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초구는 유인구로 간다.'
한편 이글스 배터리는 타석에 들어선 강호의 시범경기 기록을 떠올리며 초구를 결정했다.
초구는 존 아래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다.
포수의 사인에 투수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세트포지션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던진 초구에 강호의 배트가 딸려 나온다.
따악!!
배트가 공을 때리는 타격음이 사직구장을 가득 채운다.
초구 체인지업에 강호가 당연히 헛스윙 할 거라 예상했던 이글스 포수는 황망한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투수는 차마 외야를 바라보지 못하며 고개를 숙인다.
홈런이었다.
강호의 1군 무대 첫 기록이 홈런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와아아아!!!"
강호는 쏟아지는 팬들의 함성 속에 1루를 향해 달린다.
문득 형이 경기를 보러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1루 쪽 관중석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그 때,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게 된다.
형이었다. 강수가 동생의 첫 홈런을 확인하고는 기쁜 표정으로 환호성을 내지르는 모습이 강호의 눈동자에 들어온다.
강호는 그런 형을 향해 오른손 검지를 곧게 뻗으며 자신의 프로 통산 1호 홈런을 자축해 본다.
이 홈런이 강호가 앞으로 만들어낼 대기록의 첫 신호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