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57화 (57/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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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경기의 피날레

하루가 지나 있었다.

자이언츠는 히어로즈와의 원정 경기를 모두 승리로 일궈낼 수 있었다.

타선의 집중력이 발휘된 점도 있고, 강호의 보이지 않는 활약이 팀 승리를 위한 주춧돌을 놓은 점도 있다.

일요일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은 구단 버스에 올라타 부산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내일인 월요일이 휴식일인 까닭에 버스를 타고 있는 선수들의 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였다.

"야, 뭘 그렇게 혼자 숨어서 맛있는 걸 먹고 있는 거야? 이 형님에게 맛 좀 보라는 말도 없이."

"아...좀 드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원정 기간 내내 벤치만 지키느라고 허기가 진다. 이 형님에게 상납해 봐."

"하하, 드십시오. 문표 선배님. 많이 있습니다."

문표는 버스 내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후배들과 사교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다.

그가 문득 버스의 한 쪽 구석에 쥐죽은듯이 누워있는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문표가 발견한 이는 강호였다.

진만에게 빌린 VR기를 얼굴에 쓴 채로 얌전히 앉아있는 강호.

그런데 양 손에 커다란 장갑을 끼고 있는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VR안경에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장갑, 수상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어이, 강호 후배. 이렇게 구석진 자리에서 무슨 음란한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강호에게 다가간 문표가 강호의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을 잡아당기며 귓속말을 한다.

그의 갑작스러운 장난에 강호가 몸을 떨어 보인다.

"선배님. 음란한 짓이라니요? 사람 많은 버스 안에서 제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강호는 대답과 함께 끼고 있던 커다란 벙어리장갑을 들어 눈을 가리던 VR기를 끌어 내린다.

그러자 문표가 검은 봉지에 든 땅콩 몇 개를 강호의 입에 쑤셔 넣는다.

문표를 탓하는 말을 하고 있었던 강호는 입속으로 들어온 땅콩에 '컥, 컥! 아, 선배님!'하고 타박하며 땅콩을 씹어 삼킨다.

"이 안경은 진만이거지? 나는 우리 순진한 후배님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좋은 장비가 생기면 핫한 일본 동영상이나 끈적한 미국 동영상을 다운 받아서 감상할 것이지, 뭐가 좋다고 쉬는 시간까지 공 던지는 사내놈을 보고 있는 거야?"

문표는 들고 있던 땅콩 봉지를 강호의 벙어리장갑에 올려놓으며 강호가 끼고 있던 VR기를 자신의 눈에 가져다 댄다.

VR안경으로 본 것은 키가 훤칠한 외국인 투수가 일정 간격으로 공을 던지는 영상이 재생되는 모습이다.

문표는 '역시'라고 말하며 VR안경을 강호의 목에 걸어주었다.

이제 그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강호의 벙어리장갑이 남아 있다.

장갑 위에 올려진 땅콩 봉지를 집어든 문표가 강호를 향해 묻는다.

"근데 이건 뭐야? 한 겨울도 아닌데 웬 벙어리장갑이야?"

문표의 표정은 재밌는 것을 발견한 아이의 표정에서 잔뜩 실망한 아이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혹시라도 강호의 은밀한 취미를 발견할까 기대했던 그는 역시나 쉬는 시간에도 훈련을 하고 있는 강호에게서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

왠지 벙어리장갑의 정체도 별로 재미없는 결과로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거 말입니까? 운동을 좀 하려는데 시끄러울 것 같아서 감아놓은 겁니다. 버스에서 자는 선수들도 많은데 소음이 발생하면 안 되잖아요."

대답과 함께 강호는 벙어리장갑의 손목부분에 감아놓은 테이프를 풀었다.

그러자 벙어리장갑에 가려진 강호의 손이 드러난다.

나일론으로 만들어진 GD그립 악력기를 힘껏 쥐고 있는 강호의 오른손.

강호는 이동 중인 선수단 버스에서도 훈련과 운동을 병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왼쪽도 풀어볼까요?"

강호는 들고 있던 악력기를 문표의 손에 건네며 왼손에 끼고 있던 벙어리장갑에 손을 가져간다.

그러자 문표가 땅콩 봉지를 흔들어대며 거절의 의사를 밝힌다.

"아니, 아니. 이 재미없는 인간아. 네 왼손에는 관심이 없어. 어떻게 고향 가는 버스 안에서 훈련을 하고 있을 수가 있어? 강호 후배. 이거 너무한 거 아냐?"

문표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강호를 나무란다.

재미있는 것을 기대했는데 재미없는 결과가 나왔다.

괜히 강호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재밌는 거 말입니까? 진만이 태블릿에 런닝맨 깔아놨다던데 그거라도 보여드릴까요?"

강호는 문표를 위해 제안을 한다.

영리한 강호는 문표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평소 TV를 잘 보지 않는 문표여서 런닝맨이 뭐하는 프로그램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문표는 콧잔등을 씰룩이며 거절의 말을 한다.

"됐어. 강호 후배. 너나 많이 보도록 하세요. 아아~왜 올해 루키들은 이렇게 재미가 없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1군 버스에 올라타는 건데. 아이고~"

문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강호의 곁에서 물러선다.

시범경기 동안은 1, 2군 선수 구분 없이 엔트리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 까닭으로 정식 경기에 비해 선수단을 태운 버스가 많았다.

문표는 자신이 탄 버스가 아직 인생의 재미를 모르는 어린애들만 탔다고 한탄하며 다른 자리로 이동해 농담을 건다.

"오올~ 대우 후배. 책 보고 있었네? 뭐 보냐? 재밌는 거야?"

"네, 재밌습니다. KBO에서 발간한 2019년 리그 규정집인데 말입니다. 보시겠습니까?"

"됐어. 너나 보세요. 너는 어떻게 이동 중인 버스에서 그런 걸 보고 있어? 멀미 안 해?"

"네, 저는 원래 멀미를 안 하는 체질이라 말입니다."

"아악! 재미없어. 너나 강호나 다들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 거야? 좀 재밌게 살면 안 되는 거야?"

"선배님. 규정집도 재밌습니다. 보크 규정에 올해 디테일한 세부 항목이 신설되었는데 읽어드릴까요?"

"닥쳐, 닥치라고! 이런 범생이 놈아!"

문표는 씹고 있던 땅콩을 침 튀기 듯 튀겨대며 거절의 의사를 명확히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더 이상 주변을 기웃거리는 행동은 재미가 없다. 그래서 잠이나 자려는 문표였다.

'그러게 진작 주무시지 그랬습니까? 편하게 잠을 자고 싶은 사람은 자는 곳이 선수단 버스 아니겠습니까?'

강호는 속으로 문표에게 못한 조언의 말을 건네며 피식 웃어 보인다.

문표나 다른 선수들의 수면에 방해되지 않도록 악력기를 쥔 손에 다시 벙어리장갑을 끼는 강호였다.

문표가 재미없다고 평가한 선수단 버스는 규정 속도를 준수하며 재미없게 부산으로 향한다.

재미없는 이동을 마치고 사직 구장에 도착한 자이언츠 구단 버스는 구장 근처에 선수들을 내려놓았다.

문표는 그제야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누구보다 먼저 버스에서 내린다.

"아! 이게 얼마만의 부산이야? 이제야 좀 살겠다."

문표의 말에 답하는 것은 뒤늦게 버스에서 내린 강호였다.

"3일 됐습니다. 누가 보면 원양어선이라도 타고 온 사람인줄 알겠습니다."

"나 같은 토박이한테는 3일 동안 고향 떠나 있는 것도 고역이라고. 우리 강호 후배는 섬세하지가 못해."

"선배님. 제가 알기로 선배님 고향은 부산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천안 북일고 출신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고향은 충청도..."

자신의 고향을 거론하는 강호의 말에 문표는 서운한 표정을 연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들고 있던 짐을 강호의 왼손에 슬쩍 옮겨 놓는다.

"아~ 이거 섭섭하게 왜 이러시나? 내가 자이언츠에 온 게 10년이 넘어. 10년 넘게 살았으면 토박이 아냐? 그리고 강호 후배. 내 짐 좀 들고 있어봐. 나는 주차해놨던 차 좀 가지고 올 테니까. 내가 오늘 기분이 좋아서 강호 후배 집까지 태워다 줄게~"

강호에게 자신의 짐을 떠넘긴 문표는 윙크를 해보이며 발랄하게 걸음을 옮긴다.

홀로 남은 강호는 그런 문표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친다.

"저희 집 사직동입니다! 여기서 걸어가도 20분도 안 걸린다고요!"

강호의 외침에 문표는 주차장을 향해 얼른 도주한다.

그렇게 문표의 차를 얻어 타고 사직동 집에 도착한 강호.

그가 내려선 곳은 김해의 숙소가 아닌 사직동에 위치한 친 형, 강수의 집이었다.

"강호야 수고 많았다. 이번 경기 때도 날아다니던데? 정말 잘했어. 타율이 4할 7푼이 넘더라. 그 정도 성적이면 개막전 라인업에 들어가는 건 일도 아니겠지?"

밝은 표정을 지으며 묻고 있는 강수.

그러면서도 얼굴 한 편에는 혹시라도 동생의 일이 잘못 되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담겨 있다.

동생인 강호가 본인이 가진 잠재력과 열정에 비해 너무 오랫동안 바닥에 머무르고 있어서 이런 기회가 왔을 때 힘차게 도약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형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개막전 라인업에는 포함되지 않을 거야. 형. 시범경기가 끝나는 대로 상동으로 가게 될 테니까."

"뭐?"

강수는 동생이 건넨 말에 인상을 잔뜩 찡그려 보인다.

당사자인 강호가 가장 답답한 심정인 것을 알지만, 자이언츠 구단에 대한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개막전에서 제외될 거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시범경기에서 4할 7푼을 때린 타자를 빼면 대체 개막전 엔트리에는 누가 들어가는 건데?"

강호의 대답에 강수는 분개하게 된다.

한바탕 구단 수뇌부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토해내던 강수는 자신의 말을 듣고만 있는 동생의 표정을 확인하게 된다.

강호의 표정은 의외로 침착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는 걸까? 강호 녀석의 상심이 가장 클 텐데. 구단에서 뭔가 언질이 있었구나!'

강호의 표정에서 상황을 유추해낸 강수가 분노를 가라앉히며 헛기침을 한다.

"흠흠. 형이 조금 흥분했네. 다 사정이 있는 거겠지? 네가 말할 수 없는 주제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밥은 챙겨 먹었어? 같이 저녁 먹으러 나갈래?"

강수는 동생이 자신의 말에 마음이 상했을까봐 얼른 주제를 전환한다.

그에 강호가 답했다.

"형. 지금 밤 열시야. 저녁은 당연히 먹었지. 이 시간에 어딜 나간다고 그래?"

강호는 대답한다. 벌서 밤 열시가 넘었다고.

문표와 함께 이미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강호였다.

'형, 미안하게 됐어. 지금은 모든 사정을 말할 수 없지만, 두번 다시 형을 실망시키지는 않을게.'

강호의 속내는 형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다.

과거 베어스 시절부터 형을 실망시키는 일이 많았었다.

내일은 1군에 등록될 수 있다고, 이번 달만큼은 1군 무대에 오를 수 있다고, 지키지 못할 말들로 형을 실망시켰다.

더 이상 장담할 수 없는 말로 형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1군 콜업이 확실시 되는 순간에 형에게 말을 할게. 더 이상 형에게 공수표를 남발하고 싶지는 않아.'

강호는 1군 콜 업이 확정되는 순간 말하고 싶었다.

이번 기회가 야구 선수로 살아오면서 가장 확실한 기회로 보이지만, 아직은 상황이 명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군 선수에 대한 콜 업은 어떤 사정으로든지 미루어질 수 있어. 괜히 기대했다가는 실망만 커지게 될 거야. 모든 것이 확정되고 나서 당당하게 말하고 싶어.'

강호는 끝내 말을 삼킨다.

손 감독이 자신에게 했던 약속. 개막전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하지만 4월 중순에는 1군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게 될 거라는 말.

그 말을 형에게 전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깝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는 절대로 놓칠 수가 없는 거야.'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사실을 두 형제 모두 잘 알고 있기에, 서로가 불편해질 수도 있는 말을 속으로 삼킨다.

형제가 서로를 배려하는 일요일과 휴식일이 지나고, 또 다시 하루가 흐른다.

날짜는 3월 26일 화요일.

시범 경기의 마지막 2연전이 예고되어 있는 수원으로 무대는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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