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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경기의 히어로
고척 구장의 해설위원석.
조 캐스터와 박재헌 위원은 강호의 번트 모션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아~백강호 선수가 번트모션을 취하는데요? 박재헌 위원, 어떻게 보십니까?"
조 캐스터가 묻는 이유가 있었다.
조금 전, 해설위원인 박재헌이 강호의 번트 확률을 낮게 보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박재헌 위원의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4할 대를 때려내고 있는 타자에게 번트를 지시해야 한다면, 팀 내에 그보다 더한 타격을 자랑하는 타자가 있든지 아니면 하나의 경우밖에 없을 것이다.
'감독의 정신이 나갔던지 말이야. 하지만 한동현 감독이 그렇게 어리석은 양반은 아니야. 오히려 머리가 좋은 편이지. 본인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선수기용 상의 실수가 많은 편이지만, 작전이나 경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은 평균 이상이야.'
박재헌 위원의 생각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에 비해 한동현 감독의 능력만큼은 인정을 하고 있었다.
다만 본인의 자리 보존을 위해 선수들을 혹사시키는 선수기용만큼은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조 캐스터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연다.
"제 생각에는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 작전인 것 같습니다. 백강호 선수는 자이언츠에서 타격감이 가장 좋고, 4할을 때려내는 타자거든요. 그런 타자에게 번트를 지시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예요. 투수의 투구가 시작되면 곧바로 타격 모션으로 전환할 거예요."
"그 말씀은 상대 배터리도 위장 번트에 대한 대처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박 위원의 말에 조호준 캐스터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위장 번트 작전을 상대팀인 히어로즈 배터리에서 모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순간 허를 찔린 박 위원은 '음'하는 소리를 내며 생각을 해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질문 하나에 말문이 막히기에는 그의 야구 경력도 만만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입니다. 히어로즈에서도 예측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 상황에서 히어로즈 배터리가 선택할 것은 변화구로 카운트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패스트볼을 선택해서 코너웍을 할 것인가 입니다. 카운트가 2스트라이크까지 몰리면 번트 작전은 실패하게 되는 겁니다. 괜히 4할 타자인 백강호 선수의 카운트만 깎아먹는 셈이에요. 지금부터가 승부예요."'
박재헌 위원의 자세한 설명에 조 캐스터가 '네, 그렇군요'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박 위원의 해설을 중계로 지켜보고 있는 자이언츠의 팬들도 '아,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 중 tv로 중계를 시청하고 있는 하윤주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이 토요일인 관계로 회사를 쉬게 된 윤주는 최근 응원하게 된 자이언츠의 중계를 관전하고 있었다.
"그럼 작전을 내지 말고 백강호 선수에게 맡기는 것이 좋은 거 아냐? 뭐하러 작전을 거는 거야? 잘못하면 카운트만 잡아먹게 될 텐데?"
박 위원의 해설을 들은 윤주는 의문이 들었다.
의문이 드는 것은 자신의 가게에서 중계를 지켜보는 김진명도 마찬가지였다.
"뭐 하러 작전을 내는 거야? 그냥 백강호가 타격을 하게 내버려 둬! 저러다가 괜히 볼 카운트만 깎아먹고 2스트라이크까지 몰리면 백강호도 삼진당할 확률이 높은 거잖아. 에잇, 멍청한 감독 같으니라고."
답답한 듯 억눌린 목소리로 한탄하는 진명.
그의 근처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말이라 친구의 가게에 놀러온 진명의 친구, 오진수였다.
"야, 그나저나 박재헌이 해설을 잘 하네. 운동선수 출신이라 해설이 별로일 줄 알았는데 머리가 좋은 가봐. 하드웨어는 리틀 쿠바인데 머리는 하버드인데?"
진수의 농담에 진명이 '큭'하고 웃음 짓는다.
"얌마, 프로야구팀 감독이나 코치들도 다 야구 선수 출신이야. 요즘 해설자들 대부분이 선수 출신이거나 프로팀 코칭스태프 출신이고. 머리 나쁘면 야구도 못해. 몸만 건장하다고 야구를 잘하는게 아니야.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아, 그래?"
진명에 비해 야구를 잘 알지 못하는 진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하게 된다.
"저거, 백강호한테 오히려 불리한 거 아냐? 박재헌이 말 들어보니까 히어로즈에서도 작전 눈치챈 거 같다잖아. 그냥 초구는 흘려보내고 다음 공부터는 타격하는게 낫지 않아?"
진수의 말이었다.
진명에 비해 상대적으로 야구를 모르기는 하지만, 그도 오랫동안 야구를 봐오던 야구팬이다.
기본적인 야구 상식은 가지고 있다.
"내가 볼 때 일단은 초구가 볼이 나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초구는 기다리고 두 번째 공부터는 정상 타격하는 게 백강호한테는 좋을 거야. 볼카운트가 1볼이 되면 투수보다는 백강호한테 더 유리하니까 말이야."
진명은 초구가 볼이 될 가능성을 높다고 보고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히어로즈 배터리가 결정한 초구는 강호의 몸 쪽으로 붙는 슬라이더.
번트 모션을 취하던 강호는 공이 존을 벗어나는 것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배트를 거둬들인다.
"볼."
주심의 판정은 볼이었고, 카운트는 원 볼이 된다.
진명의 추측이 적중한 것이다.
그러자 진명이 신이 나서 다음 예측을 또 해본다.
"내가 백강호면 공 하나를 더 지켜보겠어. 히어로즈 배터리에서는 좋은 공을 안주려고 할 거거든. 백강호가 4할 5푼을 때리는 타자니까 말이야. 만약 2구도 볼이 되면 카운트가 2볼이 되는 거잖아. 노 스트라이크 2볼 상황은 타자에게 아주 유리한 카운트야. 그렇게 되면 투수도 존안으로 공을 밀어 넣을 수밖에 없어. 지금 상황이 노아웃 상황이라 백강호를 볼넷으로 걸어 내보낼 수도 없으니까."
진명은 평소에 연마하던 해박한 지식을 토해낸다.
그의 해설에 진수가 '아'하는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로 수준있는 해설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예측은 빗나가고 만다.
진명의 말처럼 투수가 던진 2구가 스트라이크 존 외각을 걸치는 유인구 성 코스로 날아가고 있는데, 번트 모션을 취하고 있던 강호가 순식간에 타격 자세를 취하더니 타격을 한 것이다.
박재헌 위원이 말한 대로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 작전이 가동된 것이었다.
따악!
호쾌한 타격음이 스피커를 뚫고 두 사람의 청각에 전달된다.
"어?!"
"응?"
진명과 진수는 동시에 탄성을 내뱉게 된다.
번트 자세에서 갑자기 자세를 전환해 공을 때린 강호의 타구가 절묘한 코스로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 밖으로 빠져나가던 포심 패스트볼을 밀어치는 타격으로 1루 쪽으로 때려낸 강호.
계속되는 견제구로 1루 베이스에 바짝 붙어있던 1루수가 미처 잡을 수 없는 코스의 빠른 타구였다.
"와! 이건 2루타야. 어서 달려! 홈으로 달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진명은 흥분하며 소리친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잘못된 예측을 했다는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스타트를 끊은 1루 주자 전준오가 2루를 밟고 지나가는 모습과 우익수가 잡기에는 먼 거리로 굴러가는 야구공의 모습만 오버랩 된다.
"홈까지, 홈까지. 홈까지!"
진명은 테이블을 닦던 걸레를 힘껏 쥔 채로 전준오의 홈 쇄도를 부르짖고 있었다.
아직은 장사를 시작할 시간이 아니어서 가게 내에는 진명과 진수밖에 없다.
마음껏 소리쳐도 이상하게 볼 손님이 없는 상황.
두 친구는 목청 높여 전준오의 홈 쇄도를 부르짖었다.
"세이프!"
심판의 콜 사인이 떨어진다.
뒤늦게 공을 잡은 우익수가 공을 던진 곳은 전준오가 향하고 있는 홈이 아닌, 강호가 향하고 있던 2루 쪽.
하지만 이미 2루타를 예상하고 있던 강호의 빠른 발이 2루 베이스를 밟은 상태였고, 강호의 안타는 1타점 2루타로 기록되고 있었다.
"와~저걸 2루타로 만드네. 백강호 대단하다!"
진명이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를 낸다.
그의 옆에서 '홈 쇄도'를 부르짖던 진수 역시 동감하고 있었다.
"괜히 2번에 넣은 게 아니네. 작전수행능력이 엄청나. 백강호 오늘 3타수 3안타지?"
친구의 물음에 진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2루타 2개, 안타 하나. 하위타선에만 있다가 상위타선으로 넘어오니까 날아다니네. 백강호는 상위타선이 잘 맞는가 보다. 내가 보니까 1번 타순이나 3번 타순에 넣어도 괜찮겠어. 출루율도 높고, 타격도 좋고 하니까. 뭐 4번도 괜찮겠네."
"뭐야? 1,2,3,4 다 괜찮다는 거야? 자칭 야구 전문가 김진명이 너무 후한 거 아냐?"
"후해도 되지. 백강호잖아. 저거 안보여? 6대 6으로 동점된 거? 아직 1군 경험도 없는 선수가 저렇게까지 해주는데, 그깟 타순이 뭐가 중요해? 내가 감독이면 백강호가 달라는 타순도 내주겠다!"
강호를 극찬하는 진명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 시간, 2루 베이스를 밟고 선 강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황을 판단해 본다.
'6대 6. 이것으로 동점이 됐어. 분위기는 이미 우리 것으로 넘어왔어.'
강호는 빠르게 좌우를 살핀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양 팀 덕 아웃이다.
양 팀의 분위기를 살피려는 것이었다.
"워오~전준오! 잘했어. 우리 팀 리드오프답다."
"나이스, 기가 막힌 주루였어!"
밝은 목소리와 함께 손뼉 마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이언츠의 덕 아웃 분위기는 달아올라 있었다.
강호의 2루타로 1루 주자인 전준오가 홈에 들어오게 되었다.
작전이 걸린 상황에서 그것을 완수하고 돌아온 주자에게 코칭스태프는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분위기는 좋을 수밖에 없다.
강호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옮겨져 홈팀인 히어로즈의 덕 아웃으로 향한다.
"투수를 바꿔야 할까요?"
"무슨 소립니까? 아직 4회에요. 지금 바꾸면 세 번째 투수 교체란 말입니다.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합시다. 불펜 투수들도 준비를 해야 되니까요."
히어로즈 코칭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들의 얼굴 표정과 분위기만으로도 내용을 유추하게 된다.
강호는 자신의 예측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2루 베이스에서 발을 뗀다.
'내가 2루에 있을 때 3루 도루도 시도한다는 것을 히어로즈 쪽에서도 알고 있을 거야. 이렇게 리드 폭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상대 배터리를 흔들기에는 충분하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강호는 2루 베이스에서 리드 폭을 넓게 벌린다.
마치 3루 도루를 감행할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자이언츠의 다음 타자인 3번 타자 김중호가 타석에 들어서고, 세트 포지션을 취하던 상대팀 투수가 강호의 리드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린다.
'신경이 쓰일 거야. 2루 도루를 당하는 것과 3루 도루를 당하는 것은 데미지 자체가 다르니까 말이야. 어디 2루로 견제구를 던져 봐라. 그 때부터는 내 뜻대로 흐름이 넘어오게 될 테니까.'
강호는 생각을 마치며 상대 투수를 향해 날카로운 도발의 눈빛을 보낸다.
그러면서 자세를 낮게 잡고, 언제든지 뛸 수 있는 자세로 몸의 무게 중심을 좌우로 움직인다.
도루를 준비하는 주자들의 전형적인 준비동작이었다.
히어로즈 배터리 중 강호의 행동을 먼저 발견한 것은 포수였다.
'주자가 도루를 준비한다. 승욱아 2루를 봐라.'
포수의 사인에 투수인 문승욱이 즉시 견제구를 던진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강호는 빠르게 귀루했다.
"세이프.'
2루심은 큰 모션 없이 세이프를 선언했다.
강호의 발이 베이스를 밟고 나서야 도착한 공은 누가 봐도 세이프 타이밍으로 보인다.
그 후로도 투수인 문승욱이 여러 번 견제 모션을 취했지만, 강호를 잡을 수 없었다.
'신경 쓰이네.'
문승욱은 인상을 찡그린다.
주자인 강호를 묶어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투구를 해야 했다.
타석에 선 자이언츠의 3번 타자가 꽤나 긴 시간을 대기하고 있다.
승욱은 마지막으로 2루를 한 번 살핀 후, 포수의 사인에 따라 포심 그립으로 공을 던진다.
퍼억.
"큭!"
투구과 끝남과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온다.
승욱이 지나치게 주자를 신경 쓴 나머지 타자인 중호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져버린 것이다.
다행이 부상 위험이 적은 엉덩이에 맞아서인지 중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1루로 향한다.
이제 상황은 무사 1,2루가 되어 있었다.
'이게 다 백강호 놈 때문이야. 제길.'
문승욱이 강호를 또 한 번 흘낏 거리고는 마음을 잡아보려 한다.
다음 타자는 자이언츠의 4번 타자인 황제인이었다.
또 다시 정신이 팔린다면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 질수도 있다.
그래서 타자에게만 집중을 하려 했다.
하지만 또 다시 리드 폭을 가져가는 강호의 모습이 자꾸만 시야에 들어온다.
'저 놈이 또?'
문승욱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2루에 나간 주자가 대놓고 도루를 예고하고 있는데 어떤 투수가 편하게 투구를 하겠는가.
게다가 오늘은 패스트볼의 제구력이 좋지 못하다.
강호의 도루에 대비해 패스트볼만 던졌다가는 타자와 제대로 승부도 못해보고, 볼넷을 내어줄 확률이 높았다.
'타자가 황제인이다. 스트라이크를 잡겠다고 허술한 공을 던지다가는 또 다시 점수를 내주고 말거야.'
히어로즈 투수인 문승욱은 생각이 복잡해진다.
강호가 동점 타점을 기록하며 2루로 진루하면서 상황이 꼬이고만 있었다.
하필이면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자이언츠의 4번 타자인 황제인이었다.
강호와 더불어 자이언츠에서 가장 핫한 타격감을 자랑하는 타자인 것이다.
'상황이 좋지 못해. 벤치의 작전은 없는 거야?'
승욱은 벤치의 작전에 기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포수가 사인을 내기 전 자신이 먼저 사인을 낸다.
벤치의 사인이 없는가를 확인하는 수신호였다.
'승욱이가 흔들리는구나. 한 번 올라갔다 와야겠어.'
승욱의 수신호를 보게 된 포수 박도한은 주심에게 타임을 요청하고 마운드에 오른다.
그리고는 투수의 근처에 다가가서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넨다.
"괜찮아. 승욱아. 주자한테 흔들리지 마. 주자가 2루에 있던 3루에 있던 안타가 나오면 점수를 내주는 것은 매한가지야. 차라리 마음 편하게 점수를 내줄 각오로 던지도록 하자. 알겠지? 오늘은 포심 제구가 좋지 못하니까 슬라이더하고, 체인지업 사인만 낼게. 투 스트라이크 상황 후에나 포심 사인을 낼 테니까 카운트를 봐서 승부를 보도록 하자."
박도한은 승욱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을 건넨다.
도한에 비해 5년 후배인 승욱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경청한다.
'그래, 맞아. 황제인도 초구부터 변화구를 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을 거야. 이럴 때 허를 찔러서 초구 슬라이더를 던지면 카운트를 쉽게 가져갈 수가 있어.'
포수인 박도한이 등을 두들기고 마운드를 내려가자 승욱은 곧장 결정을 내린다.
초구 슬라이더를 던지려는 것이다.
타자인 황제인이 자신의 포심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체인지업.'
그런데 포수 박도한이 체인지업 사인을 낸다.
승욱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내저었고, 이번에도 도한은 로케이션만 바꾼 체인지업 사인을 낸다.
'도한 선배, 체인지업 그립도 좋지 않습니다. 황제인 타자에게는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야하니 슬라이더 사인을 주십시오.'
간절한 눈빛으로 포수 마스크 너머의 눈동자를 응시한다.
그러자 승욱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도한이 슬라이더 사인을 낸다.
'오케이, 카운트 하나 잡고 가는 거야.'
즉시 고개를 끄덕인 승욱이 세트포지션을 잡는다.
그러면서 흘깃 1루와 2루 쪽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여전히 과한 리드 폭으로 자신을 자극하고 있는 강호이지만, 견제구는 던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초구에 뛰지는 않을 거야. 도한 선배의 도루 저지율은 리그 최고 수준이야. 3루 도루는 어림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승욱이 과감히 공을 던진다.
그와 동시에 강호가 행동에 나선다.
'뛰자!'
투수가 공을 뿌린 직 후, 강호는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도루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상대팀 배터리를 긴장시켜볼 생각일 뿐. 타자인 제인이 타격을 하지 않는다면 곧장 2루로 귀루를 할 생각이었다.
대신 포수인 박도한이 2루로 공을 던지게 만들 작정이다.
'도루 모션을 취하면서 투수와 포수를 동시에 흔드는 거야. 그런 상태에서 제인 선배를 상대하려고 하면 실투가 나올 확률이 급속도로 높아진다. 제인 선배의 최근 타격감이라면 실투를 놓칠 리 없어.’
강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위장 도루였다.
페이크 런으로 상대 배터리의 판단에 혼란을 줄 계획인 것이다.
'이런! 도루다.'
포수인 박도한은 강호의 위장 도루에 몸을 움찔한다.
공을 받는 것과 동시에 송구하기 위해 자세를 일으킨다.
그런데 그의 의도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강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도한과 강호, 투수인 승욱. 세 사람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따악!
벼락같이 휘두른 황제인의 배트가 공을 쪼개버릴 듯이 강타한 것이다.
2루로 귀루하기 위해 발걸음을 멈췄던 강호는 자신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타구를 올려다본다.
'홈런이구나.'
강호는 허탈하게 웃어 보인다.
때로는 치열한 작전보다 타자의 강력한 한방이 상황을 해결할 때가 있다.
지금 제인이 때려낸 쓰리런 홈런이 그런 작용을 하고 있었다.
상대팀 배터리를 혼란시키려는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제인이 때려낸 홈런으로 자이언츠가 역전을 하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껴진다.
강호는 홈으로 향하기 위해 3루 베이스 쪽으로 발걸음을 뗀다.
그런데 그런 강호를 살피는 눈동자가 있었다.
'손 감독님의 말씀대로군. 강호 녀석은 야구 아이큐가 보통이 아니야. 조금 전 상황에서 분명 위장 도루 모션을 취했었어. 제인이가 타격을 했을 때 걸음을 멈췄던 것이 그 증거야.'
팔짱을 낀 채로 상황을 주시하는 사람은 자이언츠 수석 코치인 김민철이었다.
남들은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는 강호의 위장 도루를 간파하고 있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강호의 섬세하고 영특한 플레이는 웬만한 베테랑 선수들에게도 찾기 힘든 면이 있었다.
'아직 신인 급 선수가 저런 플레이를 한다?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야. 타고난 감각이 없으면 불가능한 플레이야. 손 감독님이 말씀하신대로 강호 녀석은 제대로야!'
민철은 강호를 평가했던 점수를 더욱 상향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가 덕 아웃에 또 있었다.
'백강호.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그동안 우리 팀에는 없었던 유형의 선수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한 녀석이네.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지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강호를 반드시 주전 자리에 앉히겠어!'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는 또 다른 인물, 그는 바로 한동현 감독이었다.
자이언츠 1군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의 동상이몽 속에 강호가 홈을 밟는다.
자이언츠의 역전을 알리는 득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