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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경기의 히어로
강호가 스스로의 길을 정립해가고 있을 무렵, 다른 장소에서는 그의 소식을 접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감독님. 기분 좋으신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자이언츠 3군 총괄인 양용민 코치였다.
그가 말을 걸고 있는 인물은 손성조 2군 감독이었다.
"선수들이 사직으로 다 가버린 마당에 감독인 내가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는 거지.”
양 코치의 말에 손 감독은 부정의 말을 한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말과는 달라보였다.
여전히 희미하게 짓고 있는 미소가 양 코치로 하여금 한 번 더 묻게 만든다.
"혹시 고척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있는 겁니까?"
양 코치의 질문이었다.
현재 자이언츠 선수단은 시범경기를 치루기 위해 고척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면 고척에서 손 감독이 좋아할만한 소식이 전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양 코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 소식이 있기는 하지. 양 코치도 한 번 읽어볼 텐가? 강호는 자네가 키워낸 선수가 아닌가?"
양 코치는 손 감독이 서류 다발을 건네며 말한 '강호'라는 이름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강호는 최근 들어 손 감독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아, 강호에 대한 데이터를 받으신 거구나. 강호의 소식이라면 손 감독님이 기뻐하실 만도 하지. 아무리 시범경기라지만 4할을 때려내고 있는 타자가 아닌가?'
시범경기에서 활약하고 있는 강호를 떠올리자 양 코치 역시 미소를 짓게 된다.
손 감독의 말대로 양 코치, 본인이 지도한 선수이기는 했다.
하지만 키워냈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어 보인다.
양 코치가 강호를 지도한 것은 고작 한 달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키웠다기보다는 저절로 성장했다고 봐야지. 우리 자이언츠의 입장에서는 횡재를 한 거나 다름없어. 베어스에서 강호를 방출해준 덕분에 우리 팀에 입단하게 되었으니까 말야.'
양 코치로서도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코치들이 강압적으로 훈련을 시키지 않아도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잠재력을 폭발시켜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가능성이 상당히 드문 경우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강호의 활약이 즐거운 것이다.
양 코치는 기분 좋게 웃음 지으며 손 감독이 건넨 서류에 시선을 옮긴다.
"응?"
자료를 확인한 양 코치의 눈이 커진다.
4할 대의 타율이나 타점, 득점, 출루율 등의 지표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구단 인트라넷에 선수들의 시범경기 기록이 매일 업데이트되고 있었기에 낯선 내용은 아니었다.
양 코치가 놀란 부분은 기록지가 아니라 강호의 신체변화에 있었다.
"11초 6이요? 이 정도면 상당히 빠른 거 아닙니까? 보통 발 빠른 선수라 해봐야 12초대 정돈데 말입니다."
"그래. 빠른 게 맞아. 2군 선수들을 기준으로 한다면 강호 녀석보다 빠른 녀석은 아마 없을 게야. 1군 선수를 기준으로 둔다면 외인 선수인 휴고 정도나 있을까?"
손 감독의 대답에 양 코치가 고개를 끄덕인다.
휴고는 스프링캠프의 타격 부진으로 시범경기가 시작된 후 2주간 상동에 머물러 있었다.
프랑코 코치의 지도를 받기 위함이었다.
그 때 측정했었던 휴고의 주력 역시 11초대의 빠른 기록이었다.
당시의 양 코치는 '역시 흑인이라 빠르구나'라고 여겼던 기억이 난다.
"허어, 휴고는 키가 거의 2미터에 가깝지 않습니까? 국내 선수가 11초대라니요. 이 정도면 전국체전에 나가도 될 것 같습니다."
양 코치는 강호의 주력을 휴고와 견주며 문표와 다를 것 없는 농담을 하고 있었다.
전국체전을 논하는 양 코치의 말에 손 감독이 크게 웃어보인다.
"파하하, 자네 농담하는 건가? 11초대의 주력으로 전국체전에 어떻게 나가나? 소년체전이면 몰라도. 요즘 육상부 녀석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11초대의 기록이 나온다네. 여자 초등부도 12초는 찍어. 강호가 야구 선수이니까 돋보이는 주력이지 육상 선수에게 비할 바는 아니야."
양 코치의 말이 재미있었는지 손 감독은 허리까지 숙여 보이며 크게 웃어 보인다.
그의 행동에 양 코치 역시 따라 웃어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가진다.
'농담으로 한 말 맞습니다. 그게 그렇게 웃을 일입니까?'
양 코치는 왠지 억울해진다.
농담으로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손 감독의 행동에 뭐라 말을 하지도 못한 채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
손 감독의 광소에 양 코치가 민망해하고 있을 때, 같은 시간 고척에서의 경기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 오늘 양 팀 경기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지금까지 역전에 재역전에 재재 역전까지 나왔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해설위원석에 앉은 캐스터는 조호준이었다.
그는 전용제 캐스터와는 다른 방송사의 대표 캐스터로 자리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말을 받는 해설위원 또한 이효범이 아니었다.
해설위원의 이름은 박재헌, 지금은 사라진 유니콘스 출신으로 96년에 입단한 그는 한 때는 호타준족의 대명사로 명성을 떨치던 대표적인 거포형 타자였다.
올해로 47살이 되니 벌써 은퇴한지가 10년이 다 되가는 야구계의 중진이라 할 수 있었다.
"말씀하신대로 현재까지 양 팀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6대 5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1점을 앞서고 있기는 하지만, 히어로즈는 쫓기는 입장이고요. 반대로 자이언츠는 쫓아가는 입장입니다. 양 팀 모두 벌써 두 번째 투수가 오른 상황이거든요. 양 팀 타자들은 상대팀 불펜을 어떻게 공략할 지가 관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tv중계에 광고가 나가는 동안 미리 할 말을 준비하고 있던 박재헌 위원은 캐스터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을 해낸다.
그의 발언이 끝나자 조호준 캐스터는 타석에 들어선 타자를 소개한다.
"4회 초, 자이언츠의 공격 기회에서 1번 타자인 전준오 선수가 타석에 섭니다. 전준오 선수 오늘 경기 전까지 2할 6푼 5리의 타율에 출루율 3할 2푼 4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이언츠에서 기대하는 성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직전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잘 맞은 타구는 아니었거든요. 타구가 떨어진 위치가 절묘해서 안타가 된 경우예요. 오늘 역시 컨디션이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자이언츠의 입장에서는 전준오 선수의 타격감이 살아나서 제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일 거예요."
조 캐스터와 해설위원이 1번 타자인 전준오에 대해 이야기한 이후 전준오의 타격이 시작된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힘찬 시그널과 함께 초구가 스트라이크로 결정된다.
초구는 몸 쪽 코스를 아슬하게 파고드는 패스트볼.
히어로즈 투수와 전준오 타자의 대결을 지켜보면서 두 사람의 해설이 이어진다.
그런데 해설의 주제는 타자인 전준오에게서 대기 타석에 선 다음 타자로 옮겨지고 있었다.
"대기 타석에는 오늘 2타수 2안타를 기록한 백강호 선수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 백강호 선수 컨디션이 아주 좋습니다."
조 캐스터가 먼저 운을 띄운 후 마이크에서 멀어진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박재헌 위원이 곧장 캐스터의 말을 받는다.
"백강호 선수 오늘 타격 컨디션이 아주 좋습니다. 첫 타석에서 기록한 2루타도 그렇고, 2회에 기록한 안타도 타이밍이 좋았어요. 잘 맞은 타구였는데 너무 잘 맞아서 단타가 된 게 아쉬울 정도에요. 만약 선두 타자인 전준오 선수가 출루를 하게 된다면 4회 초 자이언츠의 공격도 득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예요."
박재헌 위원의 말이 길어지는 것이 지루했는지 타석에 선 전준오가 히어로즈 투수의 4구째를 통타해낸다.
따악!
"전준오의 타구가 2루수를 지나칩니다. 우중간을 꿰뚫는 깔끔한 안타! 자이언츠의 선두 타자가 출루합니다."
"지금은 밀어 쳤어요. 오늘 타격감이 좋지 못했던 전준오 선수거든요. 그런데 이 안타로 어느 정도 타격감이 올라올 것 같아요."
"이제 자이언츠 타선은 무사 1루의 찬스를 맞이합니다. 타석에 오르는 타자는 2번 타자 백강호. 오늘 안타와 2루타를 기록하면서 타율 4할 5푼 8리에 14득점, 17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강호 선수, 타율도 놀라운데 득점권 타율이 7할이 넘어요. 누가 이 선수를 1군 무대 경험도 없는 신인 선수라고 여기겠습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조 캐스터와 박재헌 위원의 해설이 물 흐르듯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이 강호의 기록을 칭찬하며 중계를 해나가는 사이, 타석에 오른 강호가 상대 투수를 노려보며 타격 폼을 취한다.
'오늘은 타석 기회에서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았었다. 2개의 안타 모두를 내 힘으로 만들어 냈으니 이번 타석에서 아이템 하나를 사용하더라도 나쁘지는 않아.'
강호는 아이템 사용을 고려하고 있었다.
1회의 2루타와 2회에 만든 안타는 일회용 아이템의 사용 없이 강호 스스로 만들어낸 안타였다.
운 좋게 상대 투수의 실투를 노린 것이 안타로 연결된 것이다.
그렇다보니 팀이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분위기 반전을 위한 아이템 사용을 결정하게 된다.
'1루에 출루한 준오 선배는 발이 빠른 편이야. 괜히 1번 타자는 아니니까. 2루타 정도만 때려낸다면 충분히 홈까지 파고들 수 있을 거야.'
강호의 시선이 잠시 1루 주자인 준오에게 향한다.
늘 하던 대로 리드 폭을 최대한 벌리고 있는 전준오.
그의 과한 리드 폭에 히어로즈 투수가 얼른 견제구를 던진다.
"세이프!"
1루심의 세이프 선언 이후 공은 다시 투수에게로 돌아간다.
주자가 발 빠른 전준오이다 보니 상대 투수가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고 있다.
'잘하면 벤치에서 작전이 나올 수도 있겠는데?'
강호는 불현듯 든 생각에 3루 쪽에 위치한 코치에게 시선을 옮긴다.
그러자 3루 코치가 벤치에서 작전지시를 받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작전은 세 가지겠지. 1루 주자의 도루와 번트 작전, 그리고 런 앤 히트다.'
강호는 작전이 나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웃카운트는 무사였고, 주자는 발 빠른 1번 타자다.
여기에 타석에 선 타자는 작전 수행 능력이 타순에서 가장 좋아야 하는 2번 타순이기까지 하다.
자신을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감독이라면 백이면 백, 작전을 내려할 것이다.
'준오 선배의 도루 성공률은 높은 편이 아니야. 통산 도루 성공률이 70%가 되지 않아. 그러니 도루 작전이 나올 확률은 적은 편이다.'
강호는 가장 먼저 도루 작전은 배제했다.
3루 베이스 코치가 작전을 내봐야 알겠지만, 도루는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투수의 견제도 심하고, 포수의 어깨도 좋은 편이기 때문이다.
'그럼 남은 작전은 번트와 런 앤 히트. 두 가지 작전모두 나의 작전 수행 능력에 달려있는 것들이야.'
강호는 스스로의 기록을 떠올려 본다.
현재까지 진행되는 시범경기에서 4할 5푼의 고타율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득점권 타율은 무려 7할을 넘기고 있었다.
누가 이런 타자에게 번트 작전을 낼 것인가. 만약 자신의 타순에서 번트 작전을 낸다면 경기가 끝난 후 팬들의 악성댓글에 융단폭격을 당하게 될 것이다.
'런 앤 히트야. 정확히는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가 되겠지.'
강호는 벤치에서 낼 사인을 예측해 본다.
그것은 확신과도 같았다.
위장 번트라고도 표현하는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는 번트 자세로 있다가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히팅으로 바꾸는 타격기술이다.
이 작전의 이점은 타자가 번트 자세를 취하게 되면 내야수들이 전진 수비를 하게 되고, 바뀐 수비 위치로 타구가 갔을 때 땅볼이 되어야할 타구가 안타로 만들어지는 장점이 존재한다.
'벤치에서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 작전이 나온다면 2루타를 때렸을 때, 100% 타점으로 연결 될 거야.’
생각을 마친 강호는 아이템 사용 여부를 묻는 시스템의 질문에 2루타 사용을 선택한다.
그리고는 3루 코치의 작전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3루 베이스 코치는 강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벤치의 지시를 받은 즉시 사인을 보내온다.
그의 현란한 사인 동작에서 마치 코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 위장 번트다. 안타를 때려내라.'
강호는 사인을 받는 즉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번 경기는 왠지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고 있었다.
4회 초, 무사 주자 1루 상황. 팀이 5대 6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벤치의 작전이 강호에게 전달된다.
이미 2루타 아이템을 사용한 강호는 망설임 없이 배트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