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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경기의 히어로
강호의 2루타는 다음 타자인 김상훈이 안타를 때려내면서 득점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슬라이딩으로 홈을 스친 강호가 주심의 세이프 판정을 확인한 후 자이언츠의 덕 아웃으로 걸음을 뗀다.
"여어~강호. 나이스 2루타. 오늘 1회부터 좋은데?"
"2번 타순이 강호 너한테 잘 맞나보네. 잘 했어!"
코칭스태프의 칭찬이 덕 아웃에 들어서는 강호를 반긴다.
코치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눈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오올, 강호 후배. 시작이 좋아. 아침에 주루코치님하고 데이트를 하더니 주력이 더 빨라진 것 같애~"
문표가 웃음을 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의 말에 강호가 눈썹을 씰룩인다.
"데이트를 하다니요? 징그러운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하하, 정색하기는. 오전에 안준영 코치하고 호텔 밖으로 나가는 모양이던데. 어딜 간거야?"
강호의 정색에 문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물어본다.
딱히 비밀이랄 것도 없는 일이었기에 강호는 곧장 입을 연다.
"주력 체크를 하고 왔습니다. 60미터 스퍼트요."
강호의 말에 문표가 이채를 띤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을 짓는 문표.
그가 곧 입을 연다.
"100미터 환산 기록도 나왔겠는데? 얼마야? 몇 초 나왔어?"
문표가 궁금한 표정으로 재촉을 한다.
주력이라는 게 비밀로 할 필요는 없는 것이어서 이번에도 사실대로 말했다.
"11초 6입니다."
"뭐?! 11초 6? 그 정도면 전국체전에 나가야하는 거 아냐?"
"설마요. 11초대의 기록으로 전국체전에 나가면 예선에서 탈락할 겁니다. 10초대는 되어야죠."
어느새 두 사람의 대화는 잡담으로 흐른다.
강호는 문표의 페이스에 말렸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그와의 잡담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곁으로 누가 다가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응? 민수 선배. 저희의 대화가 궁금하신 겁니까?"
다가온 민수를 향해 문표가 질문을 던진다.
그제야 민수의 접근을 알게 된 강호가 고개를 돌렸다.
민수는 팀의 안방마님이자 주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85년생인 강수가 86년생인 문표의 1년 선배가 된다.
"문표 네가 강호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와 봤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던 거야?"
늘 그렇듯이 웃는 낯으로 다가와 친근한 목소리를 건네는 민수였다.
주장인 그는 모든 선수들과 두루 친하고, 평판 또한 좋았다.
민수를 싫어하는 선수는 거의 없었고, 코칭스태프와의 관계도 원만했기 때문에 야수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채중석을 제치고 주장 자리에 앉은 것이다.
채중석은 자이언츠의 지명타자를 맡고 있는 선수로 83년 생, 37살이었다.
팀 내에서 그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들도 있었지만, 야수 중에서는 채중석의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럼에도 민수가 주장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선수들 사이에서의 친화력과 리더십이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 된다.
"별 건 아니고요. 강호가 안준영 코치하고 주력을 다시 측정했다 네요. 몇 초가 나왔는지 아십니까?"
나름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문표였다.
그는 강호의 100미터 기록에 대해 말하려고 했지만, 민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어보였다.
민수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물어본다.
"안준영 코치님? 주루코치님하고 일이 있었던 거야?"
민수의 질문은 약간은 의아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것을 눈치 챈 강호가 생각에 잠긴다.
'이상하다. 문표 선배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내 주력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민수 선배는 안준영 코치의 이름에 주목하고 있어. 이유가 뭘까?'
이상함을 느낀 강호는 민수의 표정을 자세히 살핀다.
여전히 웃고 있는 민수의 얼굴,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로 원하는 답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게 주력을..."
이번에도 강호를 대신해서 문표가 답을 내려 한다.
그런데 민수의 행동에 말문을 멈추게 된다.
민수가 손을 들어 올려 문표의 말을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강호에게 들었으면 좋겠는데, 문표야."
민수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문표는 결국 한 발짝 물러서게 된다.
다른 이도 아니고, 1군 선수단의 주장이 하는 말인데 아무런 명분도 없이 반박할 수는 없었다.
결국 문표는 하던 말을 삼키고, 벤치에 몸을 기댄다.
'뭔가 있구나.'
강호는 두 선배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태도를 보아하니 민수는 자신에게 무언가를 추궁하려는 것이고, 문표는 그것을 막아주려 한다.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며 민수의 말을 끊어내려던 문표.
눈치 빠른 강호는 문표가 자신을 보호하려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왜? 안준영 코치에게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구나.'
생각을 마친 강호가 고개를 들었다.
민수는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그가 물어본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오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안준영 코치님이 저희 방에 찾아왔었습니다."
강호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한다.
딱히 말을 가려서 할 것은 없었다.
강호 본인이 잘못한 게 없었고, 안준영 코치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도 자신은 그와의 접점이 없는 상태다.
주루코치가 주력을 측정하자고 찾아왔는데 거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안준영 코치는 분명 김민철 수석 코치님의 지시였다고 했다. 민수 선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최종 지시자가 김 수석님인 것을 알면 내게 책임을 묻지는 않을 거야.'
사정을 몰랐지만, 책임 소재가 분명한 상황이었기에 강호의 설명은 막힘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설명을 들을 때까지 민수는 강호와 마주친 눈빛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흐음...그러니까 김민철 수석코치님의 지시로 너를 찾았다는 말이구나."
강호의 설명을 모두 들은 민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한 민수에게 강호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네, 맞습니다. 60미터 스퍼트를 측정하고 가셨어요."
"안 코치가 다른 이야기는 없었고?"
민수가 재차 확신하며 물어본다.
그의 질문에 강호는 안 코치와의 일을 모두 떠올려 보았다.
그러는 한편 민수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된다.
'확실히 뭔가 있다. 팀의 주장인 민수 선배는 선수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야. 민수 선배의 태도에서 안준영 코치를 경계하는 게 느껴진다. 안 코치에게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기 때문에 그와 독대한 나를 찾은 거겠지. 밀담이 오간 것은 없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말야.'
강호가 내린 결론은 안준영 코치였다.
민수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안준영 코치와 자신과의 관계를 알아보려는 속셈인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린 강호는 안 코치와 자신의 관계가 공적인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접점이 없다는 점을 은연중에 말을 한다.
"안준영 코치님과 대화를 나눠본 것도 오늘이 처음입니다. 저의 인 바디 측정 자료에 대해 이야기한 것과 60미터 스퍼트를 측정한 것 외에는 별다른 건 없었습니다. 그 뒤로 대화해본 적도 없고 말입니다."
"음...그래, 알겠다."
강호의 말이 일관적이고, 거짓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민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경직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피식 미소 지어 보인다.
민수의 손길이 경직된 강호의 어깨를 두들긴다.
"강호, 요즘 잘하고 있더라. 계속 성적을 유지해서 개막전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도록 해봐라."
갑작스러운 덕담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민수, 잠시 대답할 말을 찾던 강호는 그저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러자 민수가 강호의 곁에서 일어선 후,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강호는 팔짱을 낀 채로 묵묵히 앉아있는 문표에게 말을 건넨다.
"선배님은 알고 계시는 거죠?"
"뭐가?"
"민수 선배님이 왜 저러시는지 말입니다. 안준영 코치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강호는 심드렁한 표정의 문표에게 질문을 하였다.
분명 문표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먼저 나서서 대화를 차단하려 했었다.
그렇기에 민수의 접근 이유를 알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애들은 몰라도 된다."
강호의 질문에 답하기 싫었던 건지 문표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러나 그의 옆얼굴을 살핀 강호는 말을 하고 싶어서 입술을 씰룩 거리는 문표의 입가를 보고 말았다.
'뭐야, 이 선배? 말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표정으로 말을 안 하겠다니. 여러모로 이상한 선배라니까.'
문표의 행태에 속으로 한숨을 내쉰 강호가 벤치에서 엉덩이를 뗀다.
문표에게 답을 얻어내는 방법 중에 가장 쉬워 보이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어디가?"
강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려하자 고개를 원위치로 돌린 문표가 물어온다.
그러자 강호는 조금 전, 문표의 표정을 흉내 내며 심드렁하게 말한다.
"안준영 코치님께 여쭤보려고 말입니다. 민수 선배가 왜 저런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서요."
강호의 말에 대한 문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얼른 손을 뻗어 강호의 손목을 낚아챈다.
그리고는 강호를 자신의 곁에 강제로 앉힌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선수단 분위기 막장 되는 꼴 보려고 그래? 어서 앉아봐. 네가 알아야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문표는 급하게 말을 하면서도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는 모습이다.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할 모양이었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왜 그렇게 뜸을 들이십니까?'
강호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문표의 곁에 앉는다.
그러자 곧장 문표의 말이 시작된다.
"잘 들어라. 그리고 지금부터 들은 이야기는 다른 선수들한테는 비밀로 하는 거다. 알겠지?"
비밀을 전파하는 여중생처럼, 문표는 강호에게 자신이 하는 말을 비밀로 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입이 무거운 강호에게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 문표의 말이 이어진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우리 같은 운동선수들에게는 어딜 가나 해당되는 이야기야. 파벌에 관한 것이다."
"파벌 말입니까?"
"그래, 파벌. 학연, 지연, 혈연으로 이어진 파벌 말이야."
파벌을 논하는 문표의 말에 강호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직은 비좁은 국내 스포츠계에서 연으로 이어진 파벌은 무시할 수 없다.
과거에 비한다면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파벌이 존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특정 학교 출신의 감독들이 자신의 모교 후배들을 갑작스레 선발 기용한다던지, 기회를 많이 준다던지 하는 예를 들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 안준영 주루코치의 모교는 경남고일 거야. 대학교는 동아대를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나의 중학교 선배님이기도 하지.'
강호는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려 본다.
강호가 안 코치의 모교를 알고 있는 이유는 강호 본인 또한 부산에서 학교를 졸업한 부산 출신이기 때문이다.
특히 경남중을 졸업한 안 코치와 마찬가지로 강호 역시 경남중학교의 출신이다.
고등학교는 안 코치와는 다르게 부산고에 진학했지만, 학연의 인연을 중학교 시절까지 확대한다면 엄연히 선, 후배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구나. 민수 선배가 안 코치와 나의 관계를 의심했던 것이. 우리 두 사람이 중학교 선, 후배 사이이기 때문에 어떠한 연결 고리가 있을 거라고 여긴 거야.'
이제야 갈피를 잡은 강호는 주장, 강민수의 출신 학교를 떠올려 본다.
민수는 원래 제주도에서 태어난 제주도 출신으로 초등학교까지는 제주신광초에 재학하다가 중학교 때부터 뭍으로 전학해서 포철중, 포철공고를 졸업하였다.
부산 연고 출신이 많은 자이언츠에서는 이례적인 이력일 것이다.
'어쩌면 민수 선배의 친화력은 타지에서 생활하며 익힌 생활의 기술과도 같지 않을까? 본인이 부산출신이 아니라서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도 있을 거야.'
잠시 민수의 출신 학교를 기억해낸 강호의 시선이 문표에게로 옮겨졌다.
문표가 말한 파벌이라는 단어에서 단초를 찾아내게 되었다.
지금부터 문표가 하게 될 말은 과연 어떠한 내용일 것인가. 문득 궁금해진다.
"다른 팀들의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자이언츠에는 크게 세 가지 파벌이 존재한다. 아마도 올해 입단한 너나 다른 루키들은 잘 모르는 내용일 거야."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펴본 문표가 이윽고 입을 연다.
강호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 문표의 이야기에 어느새 빨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