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 / 0335 ----------------------------------------------
하나의 홈런, 두 개의 도루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주심의 콜과 함께 수비위치에 있던 강호는 몸을 움직인다.
첫 타자에게 안타를 내줄 뻔한 대우가 강호의 호수비에 정신을 차리고는 두 명의 타자를 연달아 삼진으로 돌려세운 것이다.
그가 던진 공들은 타자의 판단을 흩어놓는 완벽한 브레이킹 볼이었다.
'슬라이더가 상당하다. 대우 녀석이 언제부터 저런 슬라이더를 던졌던 거지?'
대우가 2군에서부터 슬라이더를 연마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사직 마운드에서 던지는 모습을 보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우타자의 몸에 맞을 듯이 흘러나가다가 홈플레이트 직전부터 휘어지는 공은 마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대우의 슬라이더는 수준급이다. 이로써 대우 녀석이 개막전 무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확실해지겠구나.'
피식 웃음을 짓는다.
2천 년생인 대우는 올해로 20살의 루키이다.
데뷔 년도인 올해에 포텐을 터뜨리며 1군 무대에 올라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니 강호로서는 남다른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야인으로 떠돌았던 내 입장으로서는 부럽기도 하다.'
잠시 대우의 현재를 자신의 과거와 비교해본다.
쓰라린 기억들이 떠오르자 고개를 거세게 흔들며 덕 아웃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을 빨리한다.
'과거보다는 지금을 보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지나간 어제가 아니라 앞으로 내가 만들어낼 오늘들이니까. 지금부터 잘 해나간다면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
마음을 다 잡은 강호는 하이파이브를 청하는 코칭스태프와 손을 마주친다.
과거의 회상으로 인해 무너질 정도로 강호의 멘탈은 가볍지 않았다.
바닥을 경험한데다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포지션 경쟁이 그의 정신을 강하게 만들어 간다.
"호오, 역시 강호 후배란 말이야. 2루 수비는 올해 처음이지 않아? 조금 전의 수비는 몇 년은 2루수로 있었던 것 같은 수비였어. 역시 대단해."
벤치로 돌아와 앉자 문표가 엄지손가락을 척하니 내밀며 칭찬한다.
강호는 그런 문표를 보며 생각한다.
'참 희한한 사람이라니까. 어떨 때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까 여겨질 정도로 현명한 선배인데, 이럴 때는 갓 들어온 루키들보다도 단순해 보인다. 능구렁이 같은 선배.'
강호는 문표가 내민 주먹과 손을 마주치며 자리에 앉는다.
곁에서 항상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문표다.
이제 그가 곁에 없으면 허전함을 느낄 것 같기도 하다.
'프리마켓에서 세웠던 계획과는 다르게 시범경기에서 홈런 하나를 써버렸다. 손 감독님의 말씀대로 임팩트를 보여주려고 쓴 것이기는 하지만, 가급적이면 3루타나 홈런을 쓸 때는 신중하게 생각하자.'
강호는 생각을 정리하며 떠올려 본다.
프리마켓 진열대에서 보았던 3루타와 홈런 아이템의 가격. 각각 1천 mp와 1천 2백 mp나 되는 고가의 아이템이다.
3루타 3개를 살 포인트면 ‘내가 심판이다’나, ‘타석의 지배자’와 같은 OP급 기간 제 아이템을 구매할 수도 있다.
그러니 매 타석마다 사용하기에는 아까운 면이 많았다.
'득점권 상황이라고 아이템을 남발해서는 안 돼. 그러다가는 1군무대로 콜 업 됐을 때 사용할 아이템들이 바닥나게 된다. 승부처가 아니면 최대한 아껴보도록 하자.'
강호는 홈런과 3루타와 같은 고가의 아이템은 최대한 아끼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아이템들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볼넷이나 몸에 맞는 공, 안타 등. 가격이 저렴한 타격 아이템들은 적극적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정식경기의 절반이기는 하지만, 시범경기에서의 활약에 따라 포인트가 지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범경기 종료와 동시에 2군으로 내려가기로 정해졌어. 결과가 이미 정해졌으니 아무런 부담 없이 나만의 플레이를 보여주도록 하자.'
어제, 손 감독과의 만남 이후로 복잡했었던 생각을 정리한다.
지금 자신의 입장으로는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것은 1군에 자리 잡은 이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수를 기용하는 것은 순전히 감독의 권한.
본인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결론 내린다.
'오늘부터 보여주도록 하겠어. 백강호의 플레이를.'
강호는 묵직한 미소를 짓는다.
그의 미소에 곁에 앉아 농담을 하던 문표는 자신의 농담이 강호에게 먹힌 것이라고 여기며 더욱 농담의 수위를 높인다.
"거봐, 강호 후배도 웃기지? 남자가 잘생겨봐야 다 쓸데없다지만, 생각해보라고. 못 생긴 건 더 쓸데없어."
문표의 농담 속에 이닝은 진행된다.
강호가 때려낸 쓰리런으로 7대 6. 자이언츠가 1점 앞선 상황의 살얼음판 리드가 계속되고 있었다.
각성한 권대우 투수와 또 다시 바뀐 이글스 투수의 호투에 힘입어 두 개의 이닝이 빠르게 지나간다.
8회 말 상황. 앞선 타자가 상대 투수를 공략하지 못한 채 아웃 카운트 1아웃 상황에서 강호가 타석에 오른다.
-주자가 없는 상황입니다.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상황을 알리는 시스템의 메시지가 시야를 채운다.
강호는 속으로 피식 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8회 말에 1점 차로 앞서고 있는 상황. 중요한 순간은 맞지만, 굳이 아이템을 사용할 시점은 아니다. 아이템은 사용하지 않겠어.'
강호는 아이템 사용을 묻는 메시지를 닫는다.
대신 배트를 길게 쥐고, 오른쪽 어깨 쪽으로 한껏 당긴다.
장타를 의식하고 있는 타자의 타격 폼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이글스의 배터리가 눈빛을 빛낸다.
'이것 봐라. 앞전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냈다 이거지? 좋아. 어디 삼진을 먹고도 시건방을 떠는지 보겠어.'
이글스의 포수는 강호의 타격 폼을 확인하는 즉시 사인을 낸다.
매니큐어가 칠해진 그의 새끼손가락 하나가 곧게 펴진다.
'몸 쪽 패스트볼. 오케이!'
사인을 받은 투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와인드업 동작에 들어갔다.
그 역시 배트를 길게 잡은 강호를 보았기 때문에 포수의 코스 선택에 동의한 것이다.
휘익.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난다.
그러자 갑작기 자세를 바꾼 강호가 몸 쪽 공을 향해 배트를 눕혔다.
번트 자세를 취한 것이다.
"어?!"
기습 번트에 3루수의 행동이 바빠진다.
강호가 당겨 치는 타구를 날릴 것이라 생각했던 그는 번트를 대비한 전진 수비가 아니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위치에서 수비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배트에 맞은 타구는 느리게 3루로 향했고, 강호는 이미 1루를 향해 달리고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 내야 안타로 기록되고 만다.
'글러브로 잡으면 늦어. 맨 손 캐치로 잡아내야 해!'
상황 판단을 끝낸 3루수가 바닥을 구르는 공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역시나 번트 타구를 잡기 위해 투수 또한 달리고 있다.
그러나 공은 3루수의 손에 먼저 들어간 상황.
"아~"
공을 던지려던 3루수가 길게 탄식한다.
이미 강호의 발이 세이프 타이밍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3루수는 1루로의 송구를 포기하게 된다.
강호의 기습 번트로 인한 내야 안타가 기록된 것이다.
"아, 정말 기가 막힌 기습 번트입니다. 백강호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면서 배트를 길게 잡았거든요. 이글스 배터리에서는 당연히 몸 쪽 승부를 가져가게 되는 거죠. 그런데 다 노림수였어요.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백강호 선수가 미리 계산하고 있었던 거예요."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위원석에서의 목소리였다.
이효범 위원은 강호가 만들어낸 번개 같은 번트안타에 연신 감탄을 내뱉는다.
"백강호 선수, 이전 경기에서 벤치를 지켰었거든요. 오늘 대타로 나서자마자 쓰리런, 그리고 이번에는 기습 번트까지.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다 보려주려 합니다."
이 위원의 해설에 캐스터가 얼른 말을 더한다.
"무력시위라고 봐도 될까요?"
약간은 웃음 끼를 띤 캐스터의 물음이었다.
그의 질문에 이효범 위원이 함께 웃는다.
"그렇게 봐도 무방할 것 같아요. 제가 예상하기로는 1루에 출루한 백강호 선수가 도루를 할 것 같습니다. 도루 능력이 분명히 있는 선수거든요. 홈런에 기습 번트 능력을 보여줬으니 이제 주자로서의 주력을 보여줄 때거든요."
이 위원은 캐스터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받으며 강호의 도루 확률을 점쳤다.
TV중계를 시청 중인 팬들은 이효범 위원의 말을 듣고는 강호의 도루를 기대하게 되었고, 모두의 시선이 1루에 자리 잡은 강호에게로 향한다.
이효범 위원의 말을 들은 현장 PD는 카메라 감독에게 무전으로 지시하여 1루에서 리드 폭을 가져가는 강호를 지속적으로 촬영하게 했다.
'도루다. 지금 상황에서는 도루를 해야 해.'
강호의 생각이었다.
그는 마치 이효범 위원과 팬들의 바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도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도루를 할 생각으로 벤치의 사인을 확인하지만, 딱히 도루 사인은 없다.
런 앤 히트나 도루 사인과 같은 작전이 나올만도 한데 덕 아웃은 묵묵부답이었다.
'나 같은 신인 급 선수가 벤치의 사인도 없이 도루하는 경우는 드물어. 도루자 했을 때의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강호는 잠시 망설인다.
벤치의 사인도 없이 도루하는 신인 급 선수는 흔치 않았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100%자신이 없다면 자제해야만 했다.
중요한 승부처에서 도루자로 기회를 날려버리게 되면 도루자를 기록한 신인 선수의 기회 역시 날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는 100% 확률의 도루 아이템이 있다. 벤치의 지탄도 결국 도루를 실패했을 경우에나 해당하는 거야.'
마음을 먹은 강호는 리드 폭을 더욱 벌린다.
그것을 확인한 이글스의 포수가 눈을 치켜뜬다.
'도루를 하겠다 이건가? 기습 번트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도루까지 허용할 수는 없어!'
포수는 즉시 사인을 보낸다.
다급한 사인을 확인한 투수는 즉시 1루 쪽으로 몸을 틀어 견제구를 던졌다.
"세이프!"
1루심의 세이프 선언과 함께 몸을 날렸던 강호가 옷을 털며 일어선다.
'나를 잡으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이미 도루 아이템을 사용했으니 나를 잡아내는 것은 불가능 해.'
강호는 이미 도루 아이템을 사용한 후였다.
그러니 포수의 노력과 투수의 견제는 무용지물이 된 상태.
견제구를 날린 투수만 자이언츠 팬들의 지탄을 받을 뿐이었다.
강호가 몸을 일으키고 이글스의 1루수가 투수에게 공을 던진 후 오래 된 음악 하나가 흘러나온다.
"내가 그렇게 렇게 만만하니~"
"마!!"
"사랑이 그렇게 넌 만만하니~"
"마!!"
귀를 때리는 함성 소리가 구장을 가득 채운다.
이글스 투수의 견제구로 자이언츠 응원의 트레이드 마크 중에 하나인 '마'응원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응원에 기죽을 내가 아니다. 얼마든지 견제구를 던져주지.'
견제구를 지탄하는 '마'응원에 위축되는 투수들이 많았지만,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달랐다.
그는 강호의 리드폭을 1센티라도 줄이기 위해 계속해서 견제구를 던졌다.
타자인 유성철에게는 하나의 공도 던지지 않은 상태에서 견제구만 다섯 개를 던진 것이다.
"마!! 지금 뭐하는 거야? 포수한테 공을 던져! 네 눈에는 1루수가 포수로 보이더나?"
"마! 똑바로 해라! 경기 안 할 거야? 견제구 작작 좀 던져라!"
1루 응원석에서 팬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진다.
견제구를 다섯 개나 던진 까닭에 팬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견제로는 잡을 수가 없겠구나. 그래도 백강호의 리드 폭이 조금 줄어들었다. 그걸로 만족하자.'
투수는 1루수에게 공을 건네받으며 마음을 정한다.
포수 역시도 같은 생각인 건지 견제구 사인 대신에 바깥쪽으로 빠지는 포심을 요구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강호가 도루하는 것을 대비하여 빠른 공 사인을 낸 것이다.
투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 번 1루를 바라본 후, 그대로 세트 포지션 자세를 취한다.
타악.
그와 동시에 강호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상대 투수의 초구에 도루를 결정한 것이다.
'아이템까지 쓴 마당에 망설일 필요는 없어. 상대 배터리가 피치아웃을 하던 바깥 쪽 빠른 공을 던지든 도루는 성공하게 되어 있어.'
강호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초구에 2루를 향해 달리자 팬들의 시선 역시 2루로 향한다.
"어?! 어!"
"저거 거의 피치아웃인데, 잡히는 거 아니야?"
자이언츠 덕 아웃의 시선 역시 2루로 향했다.
코칭스태프가 보기에는 아웃 타이밍 같았다.
상대 포수가 바깥쪽에서 공을 받자마자 일어선 후 빠른 타이밍으로 공을 던진 것이다.
도루 방어율이 높은 편인 포수였기에 자이언츠 덕 아웃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런데 결과를 확인한 그들의 표정이 달라진다.
"세이프!!"
2루심의 콜이었다.
양 팔을 활짝 펴며 목소리를 높이는 2루심.
강호는 그를 향해 타임 요청을 한 후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 주겠어.'
도루를 성공시킨 강호의 눈동자가 1루 응원석을 향한다.
다섯 번의 견제를 이겨내고 도루를 성공시킨 강호에게 팬들의 환호가 뒤따른다.
'타격이든 수비든, 주루든, 모두 보여주겠다는 말이다. 이런 나를 2군으로 내리겠다면 군말 없이 받아들이겠어. 그러나 저들의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닌 한동현 감독, 당신의 몫이야.'
강호의 시선이 천천히 자이언츠의 덕 아웃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자신을 관찰하듯 바라보는 한 감독의 시선과 마주친다.
한 감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그와 대척점에 서야한다는 것을 알게 된 강호.
강호는 마치 손 감독의 입장이 되어 생각한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그의 생각은 마치 손 감독의 것을 닮아 있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겠어. 나를 이용하려 한다면, 당신도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쉽지는 않을 테니까.'
생각을 정한 강호의 눈동자가 더욱 빛난다.
한 감독과 마주한 시선을 옮긴 강호가 바라보는 것은 홈 플레이트.
단지 도루를 성공시킨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홈 플레이트를 밟아 득점을 얻어내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8회 말 상황에서의 1득점은 중요한 쇄기점이 될 것이 확실해 보였다.
강호는 그것을 위해 다음 행동에 돌입한다.
============================ 작품 후기 ============================
도루자라고 나온 부분은 오타가 아닙니다.
도루자O 도루사X
포수가 오른 손에 원색의 매니큐어를 칠하는 이유는 투수가 사인을 잘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포수가 매니큐어를 칠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 포수들이 투수를 위해서 매니큐어를 칠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