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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을 준비하다
3월 19일 화요일. 아침이 밝아 있었다.
이틀 전, 한 감독과 말다툼을 벌였던 김민철 수석은 일찍부터 사직구장으로 출근한 상태였다.
어제 저녁까지 병원에서 정밀 진료를 받았던 사준식의 검사 결과가 오늘 오전 중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사항이 사항이니만큼 사준식의 병원 행에는 투수코치인 여민석 코치가 함께하고 있었다.
-김 수석님. 저 여민석입니다.
김민철 수석은 여 코치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자신의 자리가 걸려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사준식의 몸 상태가 걱정이다.
사준식의 나이는 올해로 23살.
젊은 좌완 투수에게 김 수석이 거는 기대는 컸다.
'내 자리가 날아가더라도 준식이가 괜찮으면 좋겠구나. 이참에 나도 3군에 내려가서 정신무장을 할 필요도 있고 말이야.'
김 수석의 생각이었다.
그는 사준식의 부상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었다.
현재 자이언츠 투수 중에 좌완이 드물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지도자로서 선수를 걱정하는 마음도 컸다.
가능성 있는 투수가 코칭스태프의 실책으로 날개가 꺾이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래, 어떻게 됐어? 준식이는 괜찮은 거야?"
김 수석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여 코치의 대답이 들려온다.
그의 목소리가 약간은 무겁게 들린다.
-안 좋습니다. MRI결과가 나왔는데 어깨 복합 염좌라고 합니다. 숄더 디스토션이라고 하네요. 당분간 투구를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여 코치의 말에 김 수석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어깨 복합 염좌는 shoulder distortion을 뜻하는 것으로 한 부위가 아니라 어깨 전반적으로 염증이 퍼져있다는 뜻이다.
1,2주 휴식을 취한다고 완치되는 질환이 아닌 것이다.
"의사는 뭐래?"
조금 더 자세한 상태를 묻게 된다.
-염증이 가라앉는 데만 1달 정도 걸릴 것 같답니다. 조금 전에 사무실 팩스로 소견서를 보내놨습니다. 소견 자세히 기록해서요. 치료에 재활까지 더해서 두 달 동안은 재활군으로 보내야할 것 같습니다.
여 코치의 말에 김 수석은 인상을 찡그린다.
뒤이어 이런저런 질문과 답변을 나눈 후 전화를 끊은 김 수석.
그의 발걸음이 코칭스태프 사무실로 향했다.
'에휴, 3군으로 보직 이동하는 것은 잠시 미뤄지게 생겼구나.'
김 수석의 속내는 그러했다.
사준식의 어깨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면 이번 기회에 한 감독의 강권대로 3군으로 자리를 이동할 생각이었다.
2군에는 김 수석이 이동할 자리가 없으니 3군 배터리 코치나 타격 코치 등으로 자리를 요청하려했다.
그런데 사준식의 복합 염좌를 발견하게 되면서 한 감독과 김 수석의 신경전은 김 수석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김 수석의 보직 이동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백강호의 보직을 원래의 내야수로 돌린 것에 만족해야겠구나.'
김 수석은 그래도 하나의 위안을 찾는다.
본인의 자리가 아닌 우익수 자리에서 고생하던 강호의 포지션을 원래대로 돌렸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호를 위하는 김 수석의 마음과는 다르게 당사자의 입장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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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일정 확률로 빗나가기 마련이다.
예측 확률이 높았던 강호의 예상 역시 종종 빗나가고는 한다.
오늘이 바로 그러했다.
"이건 또 뭐야?"
변경된 라인업에 어이를 상실하고 만다.
강호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우익수 자리는 물론, 유격수나 3루수에도 강호의 이름이 없다.
강호의 자리였던 우익수 자리에는 2군에서 함께 올라온 유성철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내야 이동이라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강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변동된 출전 명단을 노려본다.
남들보다 몇 시간 일찍 경기장에 나와 개인 운동을 준비하던 강호.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한 라인업에서 자신의 이름이 빠져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곳은 백업 내야수들의 이름을 나열해둔 아래쪽의 공간에서였다.
"갑자기 내야 백업이라니? 한 감독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강호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라인업을 수정한 한 감독에 대해 분개하게 된다.
사실은 강호를 걱정한 김 수석의 권유로 수정된 라인업이지만, 강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저 한 감독이 무분별한 선수기용을 하는 것이라 예측해볼 뿐.
"잠깐 그럼 수비 스탯은 어떻게 되는 거야? 포지션이 내야로 옮겨졌으니 내야수 스탯이 적용되는 건가?"
문득 의문이 생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태 창을 열어서 확인하게 된다.
백강호(24)
포지션:SS
컨 택:74
파 워:60
선구안:56.1
주 력:75
수 비:72.4
송 구:60.7
멘 탈:80.2
포지션이 유격수로 변경되어 있다.
거의 2주 동안 RF였던 것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경기만큼은 유격수 자리에서 대기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혹시라도 백업 수비수로 들어가더라도 그 자리는 유격수가 될 것이다.
분명 혼란스럽고 화가 나야하는 상황이지만, 강호는 화를 내지 않는다.
달라진 포지션으로 인한 스탯 변화가 그의 분노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수비력이 상당히 올랐어. 송구 능력도 올랐고. 유격수 자리에서 이 정도 수치면 2군 수준은 확실히 넘어선 거야."
강호가 바라보고 있는 항목은 수비와, 송구 스탯이다.
낯선 우익수 보직에서 익숙한 유격수 보직으로 인한 수치 보정은 엄청났다.
포지션이 유격수로 변경되면서 우익수였을 때는 61과 46.1이었던 수비와 송구가 각각 72.4와 60.7로 대폭 상승해 있다.
수비가 11.4증가하고, 송구 능력은 14.6이나 올라가게 되었다.
상당한 수치 증가가 분명하다.
"이제 선구안만 제외하면 모든 수치들이 60을 넘게 되었구나. 그러고 보니 선구안을 등한시한 경향이 있어."
그동안 선구안 스탯을 등한시 했다는 생각이 든다.
원인을 찾아보자면 아이템 때문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타격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안타나 2루타, 홈런은 물론 볼넷과 몸에 맞는 공까지 보유하고 있다.
현재 강호의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볼넷 아이템은 10개.
원하는 상황에서 걸어 나갈 수 있는 볼넷 아이템이 있어서인지 선구안 수치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이제 선구안을 끌어올리는 훈련도 병행할 필요가 있겠구나. 모든 훈련은 프리마켓을 방문했을 때 수치를 보정 받을 수 있다."
강호는 홀로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비록 선발 라인업에서 빠지기는 했지만, 프리마켓 시스템의 맹점을 또 하나 알게 되었다.
훈련을 통해서 스탯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나처럼 주력이 빠른 유형의 타자는 선구안 역시 중요하다. 안타를 쳐서 출루하는 것도 좋지만, 상대 투수의 제구력이 나쁠 때는 볼넷으로 출루해서 기회를 만드는 것도 팀에서 필요로 하는 플레이일 거야."
강호는 선구안 훈련을 시작할 마음을 먹는다.
포지션 변동으로 인한 혼란은 이제 없었다.
강호의 강화된 멘탈은 잠시잠깐의 흔들림은 있을지언정, 혼란이 지속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내야 백업이든 주전이든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내가 보여준 타격 능력이 있으니까 시범경기가 끝날 때까지 백업으로 박아 두지는 않을 거야. 차라리 잘 됐어. 이참에 선구안 훈련과 근력 운동에 전념하도록 하자."
그렇게 스케줄을 정한다.
그동안 매일같이 경기에 참가하느라 오전과 저녁 훈련에 전념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경기 전의 개인 훈련과 수비 훈련에서 모든 체력을 방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선발 출전을 위한 체력을 남겨둘 필요가 없어졌다.
오전 운동과 경기 전 훈련에 모든 체력을 쓰더라도 경기가 진행 될 때에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 되는 것이다.
오늘은 선발 출장이 아닌 백업이지 않은가.
"좋아. 지금 바로 시작하자."
강호는 곧장 변화된 일정에 돌입한다.
현재 시간은 오전 8시 30분.
다른 선수들이 출근하기에는 많이 이른 시간이다.
경기 역시 홈구장인 사직에서 열리기에 이토록 빠른 시간에 구장에 나온 것이다.
홈구장의 이점을 살려 오전 운동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 안녕하세요. 백강호 선수. 일찍 나오셨네요?"
구장 내의 짐으로 들어서니 기지개를 켜고 있던 트레이너가 인사를 건네 온다.
그의 이름은 전태용. 80년생인 그는 올해로 40살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살이나 어린 강호에게 존댓말로 인사해온다.
상대방의 예의에 강호 역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안녕하십니까, 코치님? 지금 운동을 해도 되는 거죠?"
"그럼요.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 빨리 오셨네요? 하하, 역시 부지런 하십니다. 우리 백강호 선수는 말이지요."
전태용 트레이너가 환하게 웃으며 덕담을 건넨다.
사직 구장에서 경기가 있는 날이면 누구보다도 빨리 나와서 개인 운동을 하는 강호였기에 트레이닝 코치인 전태용이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이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을 선호한다.
전태용 트레이너 역시 그러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좀 도와드릴 테니 같이 하시죠."
전태용은 운동 기구로 향하는 강호의 곁에 서며 코칭을 자처한다.
그런데 강호의 곁에 선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멈춘다.
"왜 그러십니까? 코치님. 뭐가 잘못됐습니까?"
전 트레이너의 행동에 강호 역시 걸음을 멈추며 묻게 된다.
전태용은 강호의 머리 쪽과 자신의 발밑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다가 이상하다는 듯이 입을 연다.
"백강호 선수. 이상한데요? 신발 바꾸셨습니까? 키가 조금 커진 것 같은데요?"
"네?"
그제야 전 트레이너의 의도를 알아차린 강호가 자신의 발을 바라본다.
트레이닝 화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싸구려 운동화였다.
딱히 키가 커질만한 요소는 없다.
"강호 선수 원래 저랑 키가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눈높이가 달라보여서요."
태용의 말에 강호 역시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강호의 키는 185cm였다.
소수점 단위까지 표기하면 184.8cm이다.
그리고 전태용의 신장 또한 185cm였다. 두 사람의 키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강호의 눈높이가 조금이나마 태용보다도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전 코치님. 키를 한 번 재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인 바디 측정기로 함께 가시죠."
태용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을 해본다.
'키가 커진 건가? 스탯의 비약적인 상승이 신장 증가를 불러온 것일까? 올해로 25살인데 키가 클 수도 있는 걸까?'
스스로도 의문이 든다.
성장 판이 닫힌 지는 한참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5살이 된 지금에야 키가 크다니.
짐작 가는 것은 프리마켓에서의 능력치 증가밖에 없다.
"신발, 양말을 벗고 올라가시면 됩니다."
태용의 조언에 따라 운동화와 양발을 벗고 인바디 측정기에 맨발로 오른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던 신장 측정기가 강호의 정수리로 내려오고, 세부적인 체질량과 체지방, 체내 근육량 등이 측정된다.
"키가 원래 컸었던가요? 186.2cm가 나오는데요? 체중도 84kg나 나오고 말이에요."
태용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그는 이어서 강호의 체질량과 체지방, 체내 근육량 수치에 대해 말해주며 몸 관리를 아주 잘했다고 칭찬했다.
특히나 체지방 비율이 5%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이 정도면 프로 보디빌더의 수준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몸으로 무슨 보디빌더입니까? 그냥 괜찮은 정도겠지요.'
강호는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기기에서 내려선다.
그리고는 운동 기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키가 컸구나. 1cm정도의 성장이지만, 키가 큰 게 분명해. 재밌는 일이다.'
강호는 속으로 웃음 짓는다.
25살이나 되서 키가 자라다니.
눈에 띄는 성장은 아니지만,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한참을 기분 좋게 운동에 열중하는 사이, 신인 급 선수들이 속속들이 짐으로 들어선다.
그들은 강호를 발견하고는 고개 숙여 인사해 온다.
"강호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강호에게 인사를 건넨 이들은 외야 백업인 한택근과 불펜 자원인 권대우였다.
강호는 그들에게 답례하며 운동을 이어나간다.
"선배님. 같이 하면 안 되겠습니까? 선배님 페이스로 운동하면 왠지 잘 될 것 같습니다."
그 때 택근이 친근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강호는 그러자고했다.
대만 스프링캠프에서 함께 숙소를 사용하며 친해졌기에 택근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함께 운동을 하게 된 세 사람. 문득 택근이 이상하다는 듯이 입을 연다.
"선배님. 이상한데요. 혹시 깔창 까셨습니까? 키가 좀 커지신 것 같습니다."
강호는 택근의 말에 하마터면 당기고 있던 기구를 놓칠 뻔했다.
운동선수에게 깔창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헛소리 말고 운동에 집중하자. 개인 운동 끝나고 할 일이."
강호는 택근에게 주의를 주며 말을 이어나가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말을 멈춘다.
그리고 진한 미소를 지으며 택근에게 다른 말을 건넨다.
"택근아. 네가 도와줄 게 있다."
강호의 말이었다.
말을 하면서 씨익 하고 웃어 보이는 강호.
택근은 그의 미소에서 왠지 강호의 운동에 합류한 것이 실수였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된다.
그리고 곧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