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37화 (37/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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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이 열리다

"수고했다."

경기를 마친 강호에게 한 감독이 건넨 한 마디였다.

패한 경기에서 감독이 특정 선수에게 칭찬이나 격려를 하는 것은 드문 경우다.

하지만 강호 스스로는 한 감독의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느껴졌다.

4타수 2안타 1타점에 2득점, 볼넷 하나까지.

타격 아이템을 하나만 사용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괜찮은 활약일 것이다.

타격은 흠잡을 곳이 없었고, 우려하던 우익수 수비에서도 실책을 기록하지 않았다.

강호는 실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강호 후배. 첫 경기가 아주 정신이 없었을 거야. 사직구장에 서 본 소감이 어때?"

경기를 무사히 끝낸 강호에게 문표가 말을 걸어온다.

팀은 9대 4로 완패하기는 했지만, 강호 개인을 놓고 본다면 괜찮은 경기였기에 문표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팀이 졌는데 그렇게 웃고 계셔도 되는 겁니까?

강호는 문표의 웃는 낯을 향해 되묻는다.

문표는 출전하지 않는 경기였다.

내야 백업으로 이름을 올리기는 했지만, 그의 포지션은 1루수와 지명타자로만 한정되어 있었다.

자이언츠에서 포지션 경쟁이 가장 치열한 자리가 1루수와 지명타자였기에 한 감독과 척을 진 문표로서는 경기에 출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뭐 경기에서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는 거지. 시범 경기의 승패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어?"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문표의 태도에 강호는 반론의 말을 꺼낸다.

"팀 우승이 목표이신 분이 너무 태만하신 것 같습니다."

"파하하, 그래 보이나? 나는 나름대로 진지한 자세로 벤치에 앉아 있었거든. 내가 벤치에서 엿들은 이야기를 해주면 강호 후배도 재미가 있을 거야."

"남들한테 엿들은 이야기를 제게 말 한다고요? 별로 관심 없습니다."

"아니야. 한 번 들어봐. 어차피 훈련 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았잖아. 강호 후배도 관심을 가질 얘기야."

문표는 은근한 어조로 말하며 강호의 어깨에 팔을 올려 보인다.

두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게 되자 왠지 은밀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시범경기는 오후 1시에 시작되고, 늦더라도 오후 5시 이전에는 경기가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났다고 해서 곧장 퇴근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서 잔여 훈련을 수행해야만 했다.

문표는 훈련 시작 전까지의 여유 시간을 강호와 보낼 생각을 한 것이다.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벤치에 앉아 있었잖아."

문표가 꺼낸 서두의 말에 강호는 속으로 타박의 말을 삼킨다.

'그게 자랑입니까, 선배님?'

겉으로는 꺼낼 수 없는 진심이었다.

강호의 대답 없이도 문표의 말은 이어진다.

"오늘 벤치에서 준오 선배하고, 중호가 재밌는 말을 하더라니까. 너에 대해서 말이야."

이어진 문표의 말에 강호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준오는 중견수인 전준오를 말하는 것이었고, 중호는 좌익수인 김중호를 말한다.

두 사람 다 자이언츠의 주전 외야수들로서 2회 초 수비를 마치고 덕 아웃으로 향하며 강호와 한 차례 말을 섞은 기억이 있다.

"선배들이 저에 대해 말했다고요? 무슨 내용입니까?"

문득 궁금해진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딱히 튀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했을 말이 궁금해진다.

"후훗, 이제 궁금한 모양이네. 좋아. 이 형님이 이야기해 줄게."

문표는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시작했다.

그는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이거 너무한 거 아냐? 한 감독이 또 2군 선수들 포지션을 가지고 장난을 친 거잖아."

"그러게 말이에요. 한 감독이 올해에도 선수 운영을 막장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것도 막장이고 말입니다. 올해도 팀 성적은 말아먹게 생겼네요. 작년에 5위까지 올라간 게 기적일 정도라고요."

불편한 표정으로 말하는 이는 중견수인 전준오였다.

그의 말을 받은 것은 좌익수인 김중호였고, 최훈이나 황제인, 강민수와 오진택과 같은 주축선수들도 함께 모여 있었다.

"오오, 준오 선배 왜 이렇게 심각한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그 때 문표가 합류했다.

문표와 준오는 86년생으로 동갑이지만, 준오가 2월 생으로 빠른 년생이라 한 해 선배였다.

그래서 문표가 말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문표. 잘 왔다.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백강호라는 선수 말이야. 스프링캠프 때까지 유격수를 보던 게 맞는 거야?"

준오의 물음에 문표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에게는 딱히 심각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 캠프 전까지는 3루를 주로 봤었는데 대만에서는 유격수로 있었죠. 유격수 포지션으로 손 감독님께 인정을 받은 상태라서 유격수로 키우실 생각인 걸로 알아요. 그런데 그걸 왜 물으시는 겁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문표는 대답을 하면서 1군 선수단 내부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묻게 된다.

준오의 태도나 다른 선수들의 표정을 봐서는 강호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한 감독의 선수기용 문제를 성토하는 모습 같았다.

"문표 너도 잘 알잖아. 작년에 한 감독의 선수기용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니까 말이야. 너하고 한민이가 올라와서 활약을 하니까 마구잡이로 기용하다 부상을 입은 거잖아. 특히 한민이는 올해까지 시즌 아웃되어버렸고. 올해도 그럴 모양새인데 이게 보통일이야?"

준오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낸다.

선수들은 코치들의 귀에 목소리가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상태다.

준오의 목소리가 커지자 문표가 얼른 주의를 준다.

"쉿쉿. 준오 선배. 목소리가 큽니다. 어쩌겠습니까? 우리 같은 2군 선수들이 까라면 까야지 방법이 있겠어요? 한민이 녀석은 한 감독이 혹사를 시킨 것도 있지만, 본인이 욕심을 낸 부분도 있어요. 우리 그 얘기는 다음에 합시다."

문표는 조용히 대화를 마무리 하려 했다.

시범경기 중의 덕 아웃에서 나누기에는 여러모로 위험요소가 많은 대화였다.

그런데 준오가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준오뿐 아니라 팀의 주장인 민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표야. 이건 좀 심각한 문제같다. 단지 2군 선수들만의 문제가 아니야. 한 감독의 선수기용은 충분히 문제 소지가 있어. 2군 선수들의 혹사를 막지 않으면 선수단 전체에까지 혹사가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야. 아직 우리 야수들은 큰 피해가 없지만, 투수조의 문제는 심각하다고 본다. 올해 자이언츠는 5월부터 계투진이 붕괴될 가능성이 높아."

민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주장을 펼친다.

강민수는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포수 포지션을 맡고 있다.

직접 투수들의 공을 받는 그의 주장이었으니 작년 혹사의 여파로 투수조의 몸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심각한 겁니까?"

그제서야 상황을 인지하게 된 문표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최훈이 입을 연다.

그는 1군의 주전 2루수로서 87년생, 올해로 33살이 되는 중고참 내야수였다.

"문표 선배. 1군 야수들도 몸 성한 사람이 없을 겁니다. 민수 선배부터 시작해서 제인 선배나 저도 안 좋은 상태에요. 한 감독이 선수기용 방법을 작년처럼 고수한다면 여름도 오기 전에 전부 다 퍼질 거예요. 2군에서 갓 올라온 강호나 임정 같은 야수들을 시범경기부터 마구잡이 기용하는 걸 보십시오. 저희라고 다르겠습니까?"

최훈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조용히 물어온다.

준오부터 팀의 주장인 민수, 최훈까지 말을 더하게 되자 문표는 상황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민수 선배. 혹시 단체 행동 같은 걸 할 생각은 아니시죠? 저는 빼주십시오. 안 그래도 한 감독한테 찍혀서 사직에서 쫓겨날 판국입니다."

문표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콧잔등을 문지르며 사정하게 된다.

그의 너스레에 민수가 피식 웃어 보이며 입을 연다.

문표가 말한 단체 행동이란 결국 선수들의 태업이나 개인 기록 관리 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민수는 문표의 생각을 바로잡아준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되살린 자이언츠의 팀 분위기인데. 그런 식으로 망가뜨려서야 되겠어? 태업 같은 건 할 생각 없어. 아직까지는..."

말끝을 흐리는 강민수.

그는 문표에게 상동에서 올라온 선수들을 잘 돌봐주라는 당부와 덕담을 전하며 주변에 모여든 선수들을 해산시켰다.

문표가 그 때의 일을 설명함에 따라 강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화한다.

'한 감독의 선수단 장악이 실패한 거로구나. 아니, 이건 선수단 장악 실패가 아니라 스스로 선수단을 등 돌리게 만들었어. 임정이나 내 포지션을 자기 마음대로 변경시킬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1군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구나.'

강호는 이제야 사직구장 내부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알 것 같았다.

무언가 이상한 기류들.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그들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는 오늘 처음 합류하게 된 자신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표면화되고 있었다.

'조만간 사단이 날 수도 있겠어. 만약 올해 전반기에 팀 성적이 좋지 못하다면 한 감독에게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나게 될 거야.'

때로는 감독에 대한 불만을 태업이나 집단행동으로 표출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럴 때에 감독은 고참 선수들을 2군으로 보내거나 라인업에서 빼버리는 강수를 두게 되지만, 오히려 자충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

시즌 중에 주축 선수를 라인업에서 빼게 되면 팀 성적이 떨어지게 되고, 그 책임은 온전히 감독이 져야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부임한 감독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선수단 장악이었다.

'한 감독은 자이언츠에 부임한지 1년 만에 선수들이 완전히 등을 돌리게 만들었구나. 어쩐지 김민철 수석 코치님을 중심으로 뭉쳐진 코칭스태프도 그런 이유에서였어.'

강호는 무언가 부자연스러웠던 코칭스태프들을 떠올려 본다.

불만은 선수단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코치들도 한 감독의 팀 운영에 불만이 많았고, 그들의 불만은 서서히 표면 위로 솟아오르는 분위기였다.

다만 김민철 수석 코치의 중재로 인해 많이 드러나지 않을 것뿐이었다.

'1군에 이런 문제가 있었던 건가? 야구만 잘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구나.'

강호는 큰 것 하나를 깨닫게 된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분쟁과 분란이 따르고, 야구단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이다.

캐릭터 강하고, 혈기 왕성한 이들이 모여 있는 야구단에 왜 불화와 분쟁이 없겠는가.

'2군 선수단에는 1군 무대에 올라가야 한다는 강렬한 염원 같은 게 존재했었다. 그래서 불만이나 불화가 있어도 묵묵히 참아내며 훈련과 경쟁에만 집중했었어. 하지만 1군은 다르구나.'

강호는 생각한다.

1군은 수많은 팬들의 응원과 격려, 질타와 비난을 함께 받는 장소였다.

사소한 플레이 하나가 비난을 불러오기도 하고, 인격적인 결함이 좋은 성적으로 가려지기도 한다.

성적으로 모는 것이 용서되는 장소이자, 성적으로 인해 멸시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알겠어, 강호 후배? 사직은 상동과는 많이 다른 기분이 들지 않아? 1군은 운동만 열심히 해서 되는 곳이 아니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야 만이 인정을 받는 곳이라고. 감독이든 코치든, 선수든 말이야."

문표의 말은 야구판을 관통하는 철학을 담고 있었다.

강호는 그의 말 하나를 되뇌어본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내야만이 인정받는다고? 그게 1군 무대란 말인가?'

강호는 머릿속을 장악하는 생각의 꼬리를 붙잡았다.

간절히 바라왔던 1군 무대가 사실은 2군보다 더한 전쟁터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전쟁터 속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어때? 정신이 번쩍 들지 않아? 팀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까 한 감독의 오더를 받을 때는 수십 번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야. 지금 자이언츠 1군의 실질적인 수장은 김민철 수석이니 말이야."

문표는 조언한다.

거기에 덧붙여 한 감독에게 부여받은 우익수 자리에 미련을 버리라고 말한다.

강호 역시 일정부분 동의하고 있었다.

한 감독이 침몰하는 난파선이라면 굳이 그 배 위에 오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아니야. 생각을 다시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문표는 1군과 2군의 경계에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강민수와 전준오, 김중호 등의 선수는 1군의 주축선수들이다.

세 선수만 라인업에서 빠지게 되면 자이언츠의 성적이 급전직하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같은 입장인가? 내가 지금 팀의 사령탑과 선수단 사이의 줄다리기에 동참할 레벨이 되는 것인가?'

강호는 스스로의 자문에 고개를 젓게 된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며 결론을 내린다.

'어떤 자리든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선수단의 분위기에 동조되지 않겠어. 그리고 한 감독에게 이용당하지도 않겠어. 나는 나의 야구를 하는 거야. 그게 앞으로 내가 가야할 방향이 될 거니까.'

마음을 정리한 강호는 불현듯 대만에서의 마지막 밤을 떠올린다.

그 때 손 감독이 자신에게 공을 건네며 했던 말을 가슴에 새긴다.

"절대 멈추지 말거라. 네 야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내일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진짜 경쟁이 시작될 거야. 네가 이곳에서 내게 보여준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주도록 하거라."

그것이 대만에서의 마지막 밤, 손 감독이 강호에게 건넨 말이었다.

강호는 마치 그날 밤의 손 감독을 대면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진다.

'감독님. 감독님은 이런 상황을 예견하신 겁니까? 1군에서는 더욱 치열한 경쟁에 놓여질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까?'

강호는 대답 없는 물음을 속으로 삼키며 손 감독의 또 다른 말을 떠올려 본다.

"나는 오늘의 기록이 여기에서 그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네 생각은 어떠냐?"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했던 기록구를 건네며 손 감독이 건넨 물음이었다.

그 때의 강호는 물음에 답하지 못했었다.

손 감독의 의도를 읽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강호는 그 때 손 감독이 물었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감독님. 그 때의 기록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사직에서의 첫 경기를 했을 뿐이니까요. 저의 야구는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강호는 마음속에서 나눈 손 감독과의 대화로 혼란스러웠던 머리를 말끔하게 비워낸다.

그날 밤, 손 감독이 건넨 말을 또 다시 가슴에 새기며 강호는 손에 뀐 글러브에 힘을 준다.

'감독님, 두고 보십시오. 저는 이 치열한 전장에서 반드시 살아남을 겁니다!'

그것이 손 감독에게 답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치열한 시범경기의 첫 경기를 치렀음에도 훈련장으로 향하는 강호의 발걸음은 여전히 힘이 넘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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