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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이 열리다
사직에 합류한 2군 선수들은 잔뜩 주눅이 든 채로 훈련에 참여하고 있었다.
사직에는 스타플레이어라 할 수 있는 자이언츠의 1군 선수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가 죽은 것이다.
2군 선수들 대부분이 대화 없이 훈련에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외도 존재했다.
"오랜만에 오니까 반갑네. 사직구장은 그대로구나. 하하, 오오~ 중호야. 오랜 만이다. 상훈이 너 이 자식. 살이 왜 이렇게 찐 거야?"
소란스럽게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은 문표였다.
그는 매년마다 몇 차례 씩, 1군 무대에 오르기도 했었기에 1, 2군 선수 모두와 두루 친한 편이었다.
"오오, 우리 슈퍼스타 황제인 후배님! 그동안 잘 지냈어? 얼굴이 훤해졌는데. 몸도 더 좋아지고 말이야. 겨울동안 또 벌크 업을 한 거야?"
문표는 2군 선수 모두가 우러러보는 황제인 선수에게 살갑게 다가선다.
그러자 제인 역시도 문표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 문표 형. 오셨습니까? 살이 왜 이렇게 빠지셨어요? 대만에서 고생이 많았던 거 아닙니까?"
"말도 마라. 나도 내년에는 미국으로 전지훈련 가던가 해야지 말이야. 서 코치가 너무 굴리더라니까. 이 나이에 코끼리 펑고 같은 거나 시키고 말이지. 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처지에 너무한 거 아니야?"
"네? 코끼리 펑고요? 문표 형이 왜 그런 훈련을 하신 거예요? 혹시 1군에서 언질이 있었나 봐요."
"뭐 그런 건 아니고. 올해에는 지명타자가 아니라 야수로 1군에 올라가라는 뜻이지 뭐. 별 게 있겠어?"
문표가 팀의 슈퍼스타 중에 한명인 황제인과 살갑게 대화를 나눈다.
그러자 미리부터 제인을 바라보던 2군 루키들이 눈을 크게 뜬다.
'오오, 문표 선배님은 안 친한 사람이 없구나. 황제인 선배님하고도 친하시잖아!'
'대박이다. 나중에 문표 선배님께 부탁해서 황제인 선배님 싸인 좀 받아가야겠다.'
'1군 무대가 이렇게 좋은 거구나. 주전 선수들은 얼굴에 여유가 흘러. 나도 조만간 1군 무대에 올라와야겠어!'
누군가는 문표에게 선망의 시선을 보내고, 누군가는 1군에 대한 의욕을 다진다.
루키들 모두가 처음 오게 된 사직구장에서 각자의 생각과 각오에 빠져든다.
강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문표와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제인에게 시선을 사로잡힌다.
'황제인. 어쩌면 내가 경쟁하게 될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강호는 눈빛을 빛낸다.
자이언츠의 주전 3루수를 맡고 있는 제인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FA계약에서 70억이 넘는 거액을 받고 자이언츠에 남은 거포 3루수 황제인.
그가 히어로즈에서 넘어올 때까지만 해도 4번의 자리에서 맹타를 휘두를 것이라고 본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역동적인 수비 능력과 3할을 넘는 타격 능력, 20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장타력, 여기에 빠른 발까지.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는 최고의 내야수 중 한명일 것이다.
'황제인을 넘는다면 바랄 게 없겠지만,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다. 제인 선배는 체력도 좋고, 부상을 자주 입는 선수도 아니야. 내가 1군 무대에 3루수로 올라오게 된다면 기껏해야 제인 선배의 백업 정도밖에 되지 못할 거야.'
강호는 제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냉정하게 판단을 내린다.
유격수로 보직을 옮기면서 처음에는 복잡한 심정이었던 강호였지만, 제인과 마주하게 되자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만약 유격수가 아닌 3루수로 남았더라면 1군 무대에 자신의 자리는 없었을 것이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내가 경쟁해야 하는 사람은 제인 선배가 아니야. 바로 저 사람이다. 오진택!'
강호의 시선이 한 선수에게로 옮겨진다.
큰 키에 날렵한 몸매를 가진 날카로운 인상의 선수.
바로 자이언츠의 주전 유격수인 오진택이었다.
기존 유격수였던 문주영 선수가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서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차게 된 오진택.
매해마다 3할을 기대하게 만드는 타격 능력과 가끔씩 터뜨리는 홈런에 많은 팬들이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기대했던 만큼의 홈런은 때려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오진택이 자이언츠의 주전 유격수라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잘해주고 있으니까.'
오진택에 대한 강호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황제인 만큼은 아니었지만, 유격수인 오진택도 좋은 활약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1군 무대에 올랐을 때의 치열한 경쟁을 예상하게 된다.
'만만치가 않을 거야. 3루수든, 유격수든, 혹은 2루수든 말이야. 자이언츠의 내야 포지션은 만만한 자리가 단 한 곳도 없어. 1군 무대에 올라간다고 해도 2군 때보다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한다!'
강호는 각오를 달리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한다는 각오는 있었지만, 막상 1군에 버티고 있는 내야수들과 마주하게 되니 자신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생존해야 하는 곳은 이제부터 이곳이다. 사직구장이 나의 무대가 되는 거야.'
더욱 각오를 다진다.
치열한 1군 내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각오를 가져본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 시범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강호의 각오는 의외의 복병을 맞이하게 된다.
문제의 발단은 라인업 명단에 있었다.
"내가....왜?"
라인업을 확인한 강호는 당황하게 된다.
그가 시범경기 첫 경기부터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의 포지션이었다.
"왜 내가 우익수 자리에 있는 거야?!"
자문해 보아도 답을 줄 이가 없었다.
대만 스프링캠프에서 3루수, 유격수 경쟁을 펼쳤던 강호였다.
시범경기 첫 경기에 선발 우익수로 나선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착오가 있는 걸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착오가 발생해서 벌어진 일은 아닐까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착오가 아니었다.
강호를 찾고 있던 누군가가 사실을 말해준 까닭이었다.
"아, 강호야. 여기 있었구나. 너 외야 포지션은 오랜만이지? 우익수 자리가 낯설 테니까 수비 훈련을 좀 해야 할 거다. 너에게 포구 훈련을 시키라는 감독님의 지시 사항이 있었어. 자, 따라와라."
강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1군 수비코치인 박한중 코치였다.
그는 라인업을 확인하고 있는 강호의 팔을 이끌고 그라운드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강호는 자신에게 해답을 줄 이를 찾았다는 표정으로 그의 발걸음을 쫓으며 묻는다.
"코치님. 라인업이 맞는 겁니까? 제가 우익수에 서는 겁니까?"
"그래. 그렇게 됐다. 너도 알겠지만, 1군 내야 자리는 주전 자리가 확실한 상태야. 게다가 백업 자원도 풍부하지. 너를 1군 라인업에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는 일이야."
박 코치는 서두를 시작으로 설명을 시작한다.
강호는 그와 함께 발걸음을 맞추며 설명을 듣는다.
"상동에서 추천이 있었다. 손 감독님과 육성 군 총괄 코치님이 너를 추천했어. 우리가 확인한 스프링캠프 경기 때의 네 성적도 상당히 좋았고 말이야. 그래서 너를 선발 라인업에 올린 거야. 자리가 없어서 내야수 자리는 아니지만, 우익수로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기회가 생길 거다."
박한중 코치의 말이었다.
강호는 그의 말 속에서 많은 내용이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확실한 부분을 알기 위해 질문을 던져 본다.
"손 감독님이 저를 우익수로 추천하신 겁니까?"
강호의 질문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손 감독이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수를 판단할 때 무엇보다 수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손성조 감독이 낯선 수비 포지션에 자신을 추천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어진 박 코치의 말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손 감독님과 양 코치님이 추천하신 자리는 3루수와 유격수 자리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 팀의 내야 자리는 파고들 틈이 없어. 한 감독님이 너의 타격 능력을 높이 사서 기용을 결정했지만, 자리가 마땅히 없다는 뜻이다."
박 코치의 말에서 강호는 상황을 알게 된다.
손 감독의 추천이 있기도 했고, 스프링캠프 경기의 기록을 높이 사서 기용할 생각을 했지만 1군 내야에는 자리가 없다.
강호의 타율이 5할 대이니 써먹을 곳을 고민하던 한 감독이 비어있는 우익수에 그를 기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모험과도 같은 선수기용이었다.
'이건 모험이다. 내가 외야 수비가 가능하기는 하지. 베어스 2군에 있을 때 1년 간 외야 포지션을 맡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외야 수비를 해본지 3년이 지났어. 갑작스럽게 우익수로 이동한다면 실책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강호는 스스로의 외야 수비를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상, 중, 하로 구분한다면 하로 볼 수 있다.
뜬공을 포구하는 능력은 있지만, 송구의 정확성이나 송구 거리, 그리고 수비 범위가 좁다는 문제가 있다.
머리 뒤로 넘어가는 라인드라이브 성 타구에는 심각한 문제를 보인다.
"한 감독님도 큰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야. 네가 우익수 자리에서 실책만 하지 않는다면 만족하실 거야. 하지만 2군 스프링캠프에서 보여줬던 타격 능력을 보여주기를 바라시는 눈치야. 이제 네 역할을 알겠지? 잠시 하게 될 포구 훈련도 너의 수비 범위를 정하는 정도만 하게 될 거다."
강호가 경황이 없는 사이 박 코치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그 뒤로 박 코치와 함께 한 시간 남짓한 외야 수비 훈련을 받게 되었다.
엉성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좋아보이지도 않는 평범한 외야수비 실력을 파악하고는 박 코치는 보고를 위해 그라운드에서 물러난다.
홀로 남은 강호는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 거야? 우익수 자원은 당연히 유성철 선배의 자리 아니었나? 한동현 감독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식의 선수기용을 하는 거야?'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이제 몇 시간 후면 2019년의 첫 시범경기가 시작된다.
부지런한 팬들은 벌써부터 입장하여 선수들의 훈련을 감상하기도 했다.
잠시 멍하니 서있던 강호는 관람석에 자리 잡는 팬들을 바라보며 정신을 차리게 된다.
'내가 자리를 가릴 때 인가? 우익수 자리를 내게 맡긴다면 실수 없이 수행하는 것이 나의 몫이다.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기뻐하도록 하자.'
강호는 생각을 고쳐먹는다.
선발라인업으로 첫 경기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2군 스프링캠프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마지막 경기에서는 4번 타순에 기용되어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이언츠의 내야 포지션은 그 정도 단기 성적으로 뚫어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비어 있는 우익수 자리가 내게 첫 경기 선발 기회를 줄지는 몰랐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내게는 프리마켓 시스템이 있어.'
강호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이라 멍하니 경기를 하다가는 몇 번 없을 기회를 상실할 확률이 높다.
정신을 차린 강호는 시스템 상의 상태 창을 확인한다.
백강호(24)
포지션:RF
컨 택:70
파 워:47.9
선구안:54
주 력:72
수 비:52
송 구:41
멘 탈:75
역시나 포지션이 우익수를 가리키는 RF로 변경되어 있었다.
컨택과 파워, 선구안, 멘탈과 주력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수비 스탯인 수비와 송구 능력이 확연히 낮아져 있었다.
유격수 자리에 있을 때보다 수비와 송구 능력이 무려 10과 14의 하락을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가 유격수로 있을 때의 수비가 62, 송구가 55였으니 지나친 것이 아닌가라고 여겨질 정도의 수치 하락이었다.
'스탯의 감소가 상당해. 호수비 아이템을 모두 사용했으니 타구가 내 쪽으로 날아오는 것도 미리 알지 못한다. 방심하다가는 실책을 대량으로 기록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
강호는 마른 침을 삼킨다.
시범경기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것은 좋았지만, 수비 스탯 감소를 눈으로 확인하게 되자 괜히 불안해지는 마음을 추수를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첫 경기에 나서게 된다.
그것이 강호의 사직구장 첫 데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