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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 구장으로
아침일찍 출근 길에 오른 강호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멈춰서게 된다.
'사직 야구장. 내가 야구의 꿈을 처음 키웠던 곳. 이렇게 선수로서 오게 되는구나.'
감회가 새로웠다.
부산에서 태어나 베어스에 입단하긴 했지만, 강호는 여전히 부산 사람이었다.
양정초, 경남중, 부산고를 졸업한 강호는 자이언츠 구단에 입단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자이언츠는 강호를 선택하지 않았고,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준 베어스에 입단하기 위해 상경을 하게 된다.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분루를 삼키고 서울행 기차를 탔었던 그 날을.'
강호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19살의 강호는 커다란 백 팩 하나를 올려 매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었다.
낯선 서울 생활동안 얻은 것은 부상과 방출로 인한 마음의 상처, 병무청에서 날아온 영장이었다.
'누구를 탓할 생각은 없어. 내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니까. 그리고 나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은 선수다.'
강호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과거를 반성한다.
예전이었다면 스스로의 불운한 삶을 원망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는 프리마켓이라는 엄청난 행운이 함께하고 있었다.
"어! 강호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경기장 입구에서 뭐하고 계십니까?"
상념에 잠겨 있던 강호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인사를 건넨다.
고개를 돌려보자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택근과 인사를 위해 상체를 숙이는 황인태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온다.
이제 중견수가 된 택근은 전지훈련 기간 동안 룸메이트로 지내며 친해지게 되었고, 인태는 강호와 키스톤콤비를 맞추는 2루수이기에 가까운 편이었다.
"너희들, 일찍 왔구나."
강호의 첫마디였다.
선수들 중에서는 자신이 가장 일찍 출근한 것이라고 확신하던 그였다.
사직 야구장의 첫 출근이라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택근과 인태의 출근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저희 같은 신인들이 게으름을 피워서 되겠습니까? 공지 시간보다 3시간 일찍 출발했습니다. 하하하."
택근이 웃으며 대답한다.
그는 문표와 가까이지내며 그의 호쾌한 성격도 닮아 있었다.
조금은 어두운 성격의 택근이었는데 밝은 모습을 가지게 되자 마치 제 옷을 입은 것처럼 보기 좋았다.
"그래. 잘 했다. 사직구장에 첫 출근하는 날인데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되지. 어서 들어가자."
"네! 선배님."
힘차게 답하는 두 후배를 이끌고 사직구장으로의 첫 출근길을 함께 한다.
한 편, 같은 시간에 자이언츠 1군의 코치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2군에서 올라오는 선수들의 자료를 취합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왜 하필 이런 때에 인트라넷이 먹통이 되는 거야?! 운영 팀에서는 뭐래?"
코치들을 향해 호통을 치고 있는 인물. 그의 이름은 김민철이었다.
감독인 한동현이 곁에 있음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을 봐서는 그가 1군 코칭스태프 사이에서 얼마나 무게감 있는 인물인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었다.
김민철 수석은 총사령탑 다음의 자리인 수석코치에 있는 인물이다.
"누가 운영 팀에 가서 담당 직원 오라고 해봐요."
그 때 얄팍한 목소리가 말을 잇는다.
그는 자이언츠 팀의 총 사령탑인 한동현 감독이었다.
자이언츠 사령탑인 한동현 감독이 고작 2년 차 감독인 것에 비교하면 김민철 수석은 자이언츠 구단에서 10년 넘게 코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참 코치였다.
66년생인 한동현 감독보다 다섯 살이 많은 61년생이어서 한 감독도 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김민철 수석의 조언을 따르고는 했다.
"이것 참 큰일 입니다. 오늘부터 2군 선수들이 합류하는데 인트라넷이 먹통이라뇨. 2군 선수들 자료는 투수들 것 밖에 출력하지 못한 거죠?"
한 감독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묻고 있었다.
그의 질문은 누군가를 특정해서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가 대답하겠거니 바라며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도 한 감독의 말에 답이 없자, 김민철 수석이 입을 연다.
"네, 감독님. 투수들 것은 다 출력을 했는데 야수들 자료를 출력하려고 보니 인트라넷이 먹통입니다."
김 수석이 나름의 예의를 갖추어서 답했다.
선수 생활로 보나 현장 생활로 보나 나이로 보나 김 수석이 한 감독의 선배인 것은 분명했지만, 김 수석은 말을 높여주고 있었다.
아무리 허울뿐인 감독이라 해도 예의를 저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 참. 자료도 없이 훈련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내일 있을 시범경기 라인업도 짜야지 않습니까?"
한 감독의 물음에 김 수석이 속으로 한 숨을 내쉰다.
'그러기에 왜 그런 용병들을 데려와서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 겁니까? 세상에 시범경기 사흘 전까지 라인업 구성도 안 된 팀이 어디 있답니까?'
김 수석은 속으로 한 감독에 대한 비난의 말을 던진다.
그러나 겉으로는 표정 관리를 하며 침착하게 입을 연다.
"운영 팀에게 요청을 해놓았습니다. 상동에 자료 요청을 하라고 말입니다. 2군에는 선수들의 자료가 오프라인 저장 되어 있을 테니까 이메일이나 팩스로 자료를 보내줄 겁니다. 아마도 운영 팀에서 인트라넷 복구 때문에 바쁜 모양인데 제가 상동에 따로 연락을 취해 보겠습니다."
김 수석의 대답에 한 감독이 안도한다.
초보 사령탑인 한 감독이 1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김 수석의 빠르고 정확한 일처리가 한몫했다.
그렇기에 일이 터질 때마다 한 감독은 김민철 수석에게 의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메일로 안 된다면 팩스로라도 보내달라고 해보세요. 야수들의 자료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굳이 손 감독님께는 연락하지 마시고요."
한 감독의 당부였다.
그는 2군 감독인 손성조 감독을 불편해 했다.
손 감독이 한 감독에 비해 12살 터울의 대 선배이기도 했고, 야구계의 원로인 이유도 있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 수석은 순순히 답하며 스마트 폰을 든다.
사무실에서 나서며 2군의 코치들 중 한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대주야. 나 김민철이다."
김 수석이 전화를 건 상대는 2군 작전코치인 김대주 코치였다.
김대주 코치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12살이 어린 김대주는 김 수석의 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함께 학교를 다니기에는 많은 나이 차이지만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로 이어진 관계였다.
부산동성중, 부산고로 이어지는 선후배 관계인 것이다.
-아,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자주 안부 전화를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바쁘실 텐데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김대주 코치의 공손한 응답에 김 수석은 즉시 본론을 꺼낸다.
"다른 게 아니라 대주야. 지금 인트라넷이 먹통이 됐잖아."
김 수석의 말에 수화기 너머로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트라넷이 먹통이 됐다고요? 좀 전까지 잘 되던데....아! 지금 해보니까 안 되네요. 하, 이것 참. 혹시 2군 선수들 자료 때문에 전화하신 겁니까?
인트라넷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한 김대주 코치는 김 수석이 전화를 한 이유를 곧장 파악했다.
후배의 영특함에 김민철 수석은 미소 짓는다.
아무리 연배 차이가 나는 학교 후배라지만, 연락도 하지 않다가 갑작스레 전화한 것이 무안했던 것이다.
이제 편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 마침 2군 선수 자료를 출력하다가 먹통이 되어버렸네. 우리가 투수들 자료는 다 프린터를 했거든. 그런데 야수들 자료는 프린트를 아직 못했어. 스프링캠프 때 자료하고 리포팅 자료 좀 메일로 보내줘라. 팩스로 보내줘도 좋고. 지금 한 감독한테 보여줄 자료도 필요하니까."
김민철 수석은 팩스와 메일, 두 가지 방식 모두 다 자료를 요구했다.
이왕 일처리를 하는 거 양 쪽 다 자료를 달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이메일로 정리되는 자료는 전산 자료이고, 팩스로 보내는 자료는 전산 자료와 수기로 작성한 리포팅 노트를 포함하는 것이었기에 함께 받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었다.
-전산 자료는 제 PC에도 저장되어있습니다. 바로 메일로 쏴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이메일 아이디 알려줄게."
-아닙니다. 선배님. 선배님 이메일하고 1군 사무실 팩스 번호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메일 자료는 5분 후에 확인해 보시고요. 팩스 자료는 30분 이내로 보내드릴게요. 마침 제가 손 감독님 리포터도 정리를 하고 있어서 손 감독님 코멘 달린 걸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김대주 코치는 자신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해준다고 한다.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연락한 후배가 살뜰하게 챙겨주는 모습에 김 수석은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 제수 씨는 잘 지내지? 조만간 식사라도 함께 하자. 내가 시범경기 없는 날에 김해로 갈 테니까 말이야."
-아, 오신다고요? 아닙니다. 선배님. 제가 찾아뵈야죠. 제가 미리 연락드리고 부산으로 가겠습니다.
김민철 수석은 오랜만에 통화한 후배와 살가운 통화를 나눈 후 사무실로 돌아온다.
통화 중에 김대주 코치가 이메일을 발송했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돌아오자마자 이메일을 열었다.
"감독님. 2군 선수들 스프링캠프 자료를 받았습니다. 지금 감독님 포함해서 코치들 모두에게 자료 공유하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김 수석이 들어왔을 때부터 그를 주목하던 한 감독은 얼른 이메일을 확인한다.
과연 김 수석의 말대로 수신 이메일에 2군 선수들의 자료가 수신되어 있었다.
곧장 자료를 열어 확인을 해본다.
"아하하, 여기 있네요. 스프링캠프 성적도 다 나와 있고 말입니다. 우익수 자원인 유성철이 성적이 매우 좋네요. 3할 6푼이 넘고 말입니다. 주로 1번에 기용했으니까 생각하던 대로 주력도 기대해볼만 합니다."
한 감독은 출력버튼을 눌러 자료를 프린터하며 의견을 말한다.
그러다가 선수들의 자료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뜬다.
"응?"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메일을 공유한 김민철 수석과 자리에 있던 정호종 타격코치, 김일군 작전코치 등이 특정 지점에서 이상함을 발견하고는 모니터를 향해 얼굴을 들이민다.
"이거 뭐야?"
김일군 타격코치의 목소리였다.
그는 한 선수의 스프링캠프 기록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이거 잘못 표기된 게 아닐까요? 3이 5하고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말입니다. 숫자가 뭉개져서 이렇게 보이는 것 같은데요?"
정호종 타격코치 역시 말도 안 되는 기록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 때 마침 한 감독이 출력한 자료가 프린트되고 있었다.
지이잉, 치익.
프린트되는 자료들을 보며 김일군 코치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렇지! 전산 상에서는 숫자가 뭉개질 수도 있으니까, 프린트된 자료를 확인해보면 되겠어."
"그렇지요. 그래도 꽤 괜찮은 기록입니다. 육성군 유격수가 3할 3푼 6리면 쓸 만한 성적 아닙니까?"
정호종 코치의 말에 한 감독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의 말 덕분에 자신이 확인한 선수의 포지션이 유격수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백강호가 유격수였어? 무슨 놈의 유격수가 이런 타율을 기록한 거야? 3할 3푼이라뇨. 육성 군에 이런 선수도 있었습니까?"
"...."
한 감독의 말에 대답해야할 김일군 코치가 답이 없다.
그가 자신의 말을 무시한 것이라 생각한 한 감독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아무래도 한 감독보다 김일군 코치가 일 년 선배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코치는 한동안 프린트된 자료에 코를 박고 살피다가 그것을 들고 한 감독에게 다가선다.
"감독님. 잘못 프린트된 게 아닙니다. 3이 아니고 5가 맞았어요. 백강호의 스프링캠프 기록은 5할 3푼 6리가 맞아요."
"네?!"
한 감독은 김 코치가 내민 자료를 받아든다.
그의 말처럼 이메일에서 보았던 자료와 동일하게 0.536이라고 기록된 백강호의 타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거 기입 실수 같은 거 아닐까요? 무슨 유격수가 5할을 친답니까? 아무리 아홉 경기라고는 하지만, 이상한데요?"
한 감독은 여전히 전산 상의 실수로 생각하며 김민철 수석에게 시선을 돌린다.
"제가 다시 한 번 전화를 해보겠습니다."
김 수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휴대폰을 들었다.
그 때, 때마침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복합 프린트기에서 서류가 출력되고 있었다.
지지직, 지직, 지이익.
팩스 자료가 출력되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정호종 코치가 출력되는 자료들을 확인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감독님! 2군에서 보낸 리포팅 자료가 도착했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마침 잘 됐네요. 거기에서 확인해보면 되겠습니다."
대답한 한 감독을 포함한 나머지 코치들의 발걸음도 복합 프린트기로 향한다.
그들은 한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여기 있네!'라고 동시에 말한다.
하지만 이내 입을 다물게 된다.
0.536.
28타수 15안타. 2루타 2개, 3루타 2개, 1홈런까지. 장타율을 따지니 무려 1.036의 기록이었다.
그것이 네 사람이 확인한 백강호의 스프링캠프 기록이었다.
또한 손 감독이 직접 수기로 기록한 리포팅 노트에는 이렇게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3월 2일 경기, 4번 타순에 출전. 사이클링히트 기록. 득점권에서 해결사 능력이 뛰어남. 3루 수비 준수, 유격수 포지션에서 타격감이 더욱 올라감. 수비 역시 유격수 쪽이 좋음. 내, 외야 수비가 가능한 야수라 차후 외야 포지션 확인도 필요함.
이리저리 형식 없이 적어놓은 코멘트에 모두가 입을 다문다.
침묵을 깨고 처음 입을 연 것은 한동현 감독이었다.
그는 코치들을 향해 이렇게 묻고 있었다.
"대체 백강호라는 선수가 누굽니까?"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묻고 있는 한 감독. 그런 그에게 대꾸할 말 없는 코치들.
2군 선수들이 사직구장으로 처음 합류하게 된 그 날의 작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