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31화 (3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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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 구장으로

치열했던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경기가 끝이 나고, 저녁이 지난 시간.

강호는 경기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경기가 끝나고 그라운드를 정리한 상태였기에 경기장은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으며 서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다가간다.

"찾으셨습니까?"

강호는 상대에게 아는 척 인사한다.

그러자 뒷짐을 진채로 외야 쪽 광경을 바라보던 인물이 몸을 돌린다.

휘영청 뜬 달빛에 반사된 그의 얼굴이 강호의 시야에 드러난다.

"왔구나."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하는 이는 손 감독이었다.

그는 강호가 왔음에도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어둠 속에서 강호는 손 감독의 곁에 선다.

할 말이 있으니 불렀을 것이라는 생각에 손 감독의 말을 기다렸다.

"오늘 경기 아주 잘 했다."

한참을 지난 끝에 손 감독이 꺼낸 말이었다.

강호는 손 감독의 말에 오늘의 경기를 회상해 본다.

'명길관이라고 했던가? 듣던 대로 상당한 공을 던지는구나. 코스를 알고 치더라도 정타를 뽑아내기가 어려운 공이야.'

강호는 5회에 이어 7회에도 타석에 올랐다.

고민이 길었었던 5회 상황에서는 타격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바가지 성 안타에 2루타를 기록하게 된다.

배트가 밀려 내야를 겨우 넘긴 뜬공이 2루타가 되고 만 것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지금 투수의 공은 칠 자신이 없다. 네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타격 아이템을 사용해야겠어.'

강호는 명길관이라는 투수의 구위에 찬사를 보내며 타격 아이템을 사용했다.

그가 7회에 사용한 타격 아이템은 사이클링히트에서 가장 기록하기 쉬운 기록인 안타였다.

따악!

한 번의 타격 음으로 강호의 사이클링히트는 완성되었다.

우익수 정면에 깔끔하게 떨어지는 안타는 강호의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게 만들었다.

사이클링히트.

선수생활을 끝낼 때까지 한 번도 기록하기 힘든 기록이 완성된 것이다.

"강호야."

손 감독의 부름에 강호는 회상에서 깨어난다.

"네, 감독님."

강호는 대답과 함께 그의 곁으로 더욱 다가섰다.

손 감독의 곁에 선 채로 그가 바라보는 것을 함께 바라보려 했다.

정확히 무엇을 주시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같은 방향에 선 채로 시선을 멀리둔다.

그 때 손 감독이 강호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받아라."

손 감독의 말에 강호의 시선이 손 감독의 손으로 이동한다.

그의 손 위에는 야구공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강호는 아무 말 없이 양손으로 그 공을 받았다.

"네가 마지막 타석에서 때려낸 공이다. 사이클링히트를 완성한 공이기도 하지. 양용민 코치를 시켜서 수거해 두었다."

"....그렇습니까?"

손 감독의 말에 대답하며 강호는 공을 얼굴 가까이로 들어올린다.

배트에 긁힌 자국과 약간의 흙 자국이 남아있는 공.

타격을 한 흔적이 명확히 남아있는 공이었다.

"나는 오늘의 기록이 여기에서 그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네 생각은 어떠냐?"

손 감독의 물음에 강호가 공에서 시선을 뗀다.

그리고는 손 감독의 의사를 읽어내기 위해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을 묻는 걸까? 나의 각오에 대해서 궁금하신 건가? 아니면 내가 자만하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으신 걸까?'

여러 추측을 해보지만 딱히 답이 나오질 않는다.

손 감독의 생각을 완전히 읽어내기에는 아직 자신의 연륜이 부족함을 느낀다.

강호의 대답이 없음에도 손 감독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꺼낸다.

"오늘 4번 자리에 너를 세움으로써 오랫동안 찾아왔던 마지막 조각을 찾아낸 느낌을 받았다. 너에게는 오늘의 경기가 스쳐가는 한 경기일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아주 중요한 경기였어."

손 감독의 말에 강호는 여전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다.

그의 말 속에서 감히 답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구단에서 내게 1군 감독 자리를 수차례 권했었다. 나는 좋은 말로 거절하며 지금의 자리에 남았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독백처럼 말을 이어가는 손 감독의 시선은 외야에 머물러 있었다.

강호는 그가 어둠속에서 보고자하는 것이 무엇일까 추측해보며 귀를 기울인다.

"만약 다시 한 번 구단에서 1군 감독 자리를 권한다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고민해볼 생각이다. 이전에는 없었던 확신이라는 것이 찾아왔기 때문이지."

손 감독의 말에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음이 느껴진다.

꽤나 오랜 세월을 2군 사령탑에 만족했었던 그의 생각을 바꾼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강호는 그게 무엇인지를 이미 깨닫고 있었다.

'내가 찾고 있던 마지막 카드는 백강호. 바로 너다. 하지만 굳이 말로써 확정짓지는 않겠다. 네가 나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내게 보여 다오. 오늘의 기록이 우연이 아닌 너의 실력이라는 것을 1군 무대에 올라 내게 보여줬으면 한다.'

손 감독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삼킨다.

대신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말을 전했다.

"절대 멈추지 말거라. 네 야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내일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진짜 경쟁이 시작될 거야. 네가 이곳에서 내게 보여준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주도록 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손 감독의 말에 강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후로도 할 말이 많아보였지만, 끝내 말을 잇지 못하던 손 감독은 발걸음을 옮긴다.

더 이상 가타부타 말없이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손 감독을 바라보며 강호는 여전히 자리에 서있었다.

'절대 멈추지 말라고, 진짜 경쟁이 시작된다고? 잘 알고 있습니다. 감독님. 저는 이 정도에서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강호는 손에 놓여있던 볼을 힘껏 쥔다.

그리고는 이미 사라져버린 손 감독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그가 바라보았던 외야에 시선을 둔다.

왠지 손 감독이 불 꺼진 경기장에 홀로 서서 했을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의 야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니까요.'

강호는 야구공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속으로 누구도 들을 수 없는 환호를 외친다.

언젠가 지금의 환호를 모두에게 들려줄 수 있을 날이 올 때까지.

그 날이 올 때까지 강호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만에서의 마지막 밤은 선명한 기억을 남긴 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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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비행기에 오른 선수들은 3시간 후, 김해 공항에 내리게 된다.

선수단 인원 전부가 함께 귀국하고 이동하는 자리였기에 따로 가족들이 나와 있거나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야아~ 역시 조국이 좋긴 좋구나. 한국은 공기부터가 다르다. 달라. 나는 역시 우리나라가 좋단 말이지."

한국 땅을 밟으면서부터 시작된 문표의 너스레에 여러 선수들이 웃어 보인다.

특히 루키들은 문표의 곁에서 걸음을 옮기며 그의 대화에 동조하는 모습이다.

"전지훈련 해산은 상동 경기장에 돌아가서 할 거다. 그 때까지는 전지훈련이 끝난 것이 아니니까 다들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주위를 주는 사람은 손 감독이었다.

손 감독은 선수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네!"

대답의 목소리가 컸다.

문표를 주축으로 한 선수단 모두가 감독의 지시에 크게 답한다.

입을 크게 벌리는 그들의 얼굴은 계속되는 훈련과 경기로 인해 검게 그을려 있었다.

감독과 코치들의 인솔 속에 선수단을 태운 구단 버스가 상동으로 향한다.

그리고 하루가 빠르게 지났다.

상동 구장에서 자율 훈련을 하고 있던 강호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한다.

"형.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어? 출발할 때 전화를 하지 그랬어?"

강호가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하는 손님은 친 형인 백강수였다.

올해로 서른 살이 되는 강수는 강호의 정신적 지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동생인 강호와 진주를 키워내며 가장의 역할을 다해주고 있었다.

그 덕에 본인의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강호를 응원해주는 대인배였다.

"미리 전화했으면 오지 말라고 했을 거 아냐? 바쁘신 동생님을 보려면 이 형이 부지런을 떨어야지. 별 수 있겠어?"

인사와 함께 건네는 형의 말에 강호는 괜히 미안해진다.

강호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강수의 시선이 검게 그을린 강호의 얼굴과 목, 손으로 옮겨간다.

"와아~훈련이 장난 아니었나 보다. 완전 흑인이 되 버렸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했다니까.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검게 그을린 강호의 모습에 강수는 걱정이 되었나보다.

형의 걱정을 아는 강호는 얼른 대답한다.

"당연하지. 1군 콜 업이 코앞인데 다치면 안 되지."

동생의 대답에 강수는 미소 짓게 된다.

"그래. 항상 서두르지 말고, 다치지 말고. 잘 알지? 그러고 보니 살이 좀 찐 것 같은데?"

연이어 말하며 물어오는 강수의 말에 강호는 잠시 멈칫하게 된다.

항상 주문처럼 외우는 강수의 말이 강호의 마음속에 와 닿고 있었다.

'서두르지 말고, 다치지 말고. 형, 이제는 걱정하지 마. 사정을 말할 수는 없지만,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한은 두 번 다시 아프거나 다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강호는 대답 없이 속으로만 형에게 진심을 말해본다.

자신의 어깨와 팔 등을 매만지는 형의 손길에 그저 웃어 보이는 강호.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겨 본관 로비의 휴게실로 이동했다.

"독신자 숙소가 좋긴 좋은가 보다. 네가 집에 올 생각도 없이 숙소에만 박혀있는 걸 보니 말이야."

근황을 묻던 중 서운한 목소리로 말하는 강수였다.

그는 귀국 후에도 집을 방문하지 않는 강호를 타박해 본다.

그러나 진짜로 서운한 것은 아니었다.

한창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을 동생의 상황을 잘 알기 때문이다.

"좋기는. 형도 한 번 와 봤잖아. 육성 군 선수한테 내주는 독신자 숙소가 좋을 리가 있겠어?"

강호가 반론한 대로 구단에서 내준 독신자 숙소는 시설이 좋지 못했다.

말이 숙소이지 일반 빌라를 임대해서 육성 군 선수들에게 내주는 것이다.

그마저도 서로 들어가려고 하니 독신자 숙소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할 지경이다.

"하긴. 한 번 가보니까 좋지는 않더라. 주방도 좁아서 밥 해먹기도 별로고. 밥은 잘 챙겨먹고 있는 거야? 끼니는 어떻게 하고 있어?"

"자율 훈련 기간에는 구내식당에서 세 끼 다 나오잖아. 밥 먹는 건 걱정하지 마."

형의 걱정스런 물음에 강호가 대답한다.

실제로 자율 훈련 기간에도 상동 구장의 구내식당에서 선수들을 위한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다.

강호가 독신자 숙소에 머물며 구장 근처에 상주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얼마 되지 않는 급여를 받는 강호로서는 구단에서 주는 혜택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끼익.

그 때 본관 휴게실과는 그리 멀지않은 구장 주차장에 한 대의 차량이 들어선다.

강호와 강수가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이어가는 사이 차에서 내린 사내 한명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여기가 자이언츠의 2군 구장인 상동이구나. 생각보다 시설이 훨씬 좋아. 몇 년 전에 증축 공사를 했다더니 나쁘지 않구나.'

주변을 둘러보며 구장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는 인물. 그의 이름은 허일수다.

야구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스포츠 매체로는 꽤나 이름이 알려진 '오썬 스포츠'의 주임 기자였다.

그는 얼마 전까지 베어스 구단을 전담하고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자이언츠 전담으로 변경된 상태다.

'내키는 것은 아니지만 별 수 없지. 자이언츠 전담을 맡지 않으면 선임으로 진급시켜 주지 않겠다는데 어쩌겠어. 치사하긴 하지만 해줘야지.'

일수는 머릿속의 생각과 불만을 정리하며 본관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회사 내의 복잡한 사정이 그를 포함한 기자들의 인사이동을 불러왔지만,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등 떠밀린 전담이지만 이왕 일을 맡은 거 제대로 해야지. 설렁설렁 하는 건 내 적성에 맞지 않아.'

일수는 걸음을 옮기면서 복장을 정비해 본다.

손에 든 브리프 가방 속 내용물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준비를 철저히 한다.

오늘의 취재를 위해 자이언츠 구단 운영 팀에 몇 주 전에 미리 공문을 발송하고, 어제는 확인 전화까지 해두었다.

비록 2군 감독의 인터뷰와 선수들에 대한 현장 조사의 형태이지만, 제대로 해볼 생각이다.

"응?"

이제 막 본관을 지나 감독실로 향하려던 일수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문다.

휴게실에 앉은 채 친 형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강호의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강호의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은 누가 봐도 전지훈련을 다녀온 선수의 것이었다.

'낯이 익은 얼굴인데...누구였지? 내가 아는 선수인가?'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잠시 기억력을 짜내보던 일수는 일정이 바쁘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강호를 지나친다.

형과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강호의 시선이 걸음을 옮기던 일수를 향하지만, 이미 그는 강호를 완전히 지나쳐버린 상태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재회는 약간의 엇갈림 속에서 미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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