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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4번 타자
4회 초 상황, 마운드에 오른 대우는 한숨을 내쉰다.
"후우~"
간만의 등판이었다.
게다가 두 경기를 선발로 등판했기에 계투로 마운드에 오르는 것은 오랜만이라고 느껴진다.
'역시 1차 지명은 달라. 민한이의 투구는 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어.'
대우는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던 민한의 투구를 떠올려 본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투구였다.
평균 구속이 150km가 넘는 강력한 포심은 알고 치더라도 정타와 연결되지 못했다.
주민한은 3이닝 동안 1개의 안타나 볼넷도 내주지 않은 채 삼진 4개를 잡아내며 퍼펙트하게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3이닝 동안 던진 볼은 고작 27개.
구동진 투수코치가 염려하던 것과는 다른 효율적인 피칭이었다.
'대우가 얼어있구나.'
유격수 자리에 선 강호는 마운드에 오른 대우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대우의 등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선발로 오른 민한의 격이 다른 투구에 위축된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저래서는 제대로 된 투구를 할 수 없어. 대우, 정신 차려라. 네가 민한이와 같은 공을 던질 것이라는 마음은 버려라.'
속으로 대우에게 전하는 말을 던진 강호는 왼손에 낀 글러브를 왼쪽으로 뻗는다.
그리고는 빠르게 끌어당기며 오른손과 수차례 맞부딪힌다.
팡, 팡!
글러브와 맨손이 부딪히는 소리가 대우의 이목을 끈다.
잔뜩 경직된 대우였지만, 강호가 글러브를 치는 소리가 워낙 컸던 이유로 그의 시선이 강호에게 머문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라. 대우. 너와 나는 저런 괴물들과 같을 수 없어. 우리는 우리의 플레이를 하면 되는 거야.'
강호는 눈빛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리고는 글러브를 들어 자신의 가슴을 몇 차례 두들긴다.
그 모습은 마치 '나를 믿고 던져라. 이쪽으로 날아오는 타구는 모두 막아주겠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강호 선배.'
대우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낀다.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경직된 어깨를 돌려보며 정신을 다 잡는다.
팡, 팡.
그 때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강호의 흉내를 내고 있는 1루수 최문표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있다.'
문표는 강호의 행동에 살을 보태 글러브를 들어 대우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대우는 웃음을 짓게 된다.
강호와 문표, 두 사람의 행동이 대우의 생각에 변화를 준 것이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민한이와 같은 투구를 할 수 없어. 괴물은 괴물의 공을 던지는 거고, 사람은 사람의 공을 던지는 거야.'
대우는 민한과의 차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구단의 인정을 받지 못해 현역으로 군에 다녀온 강호, 간혹 1군 무대에 오르기는 하지만 2군 죽돌이로 머물고 있는 베테랑 강타자 문표.
두 사람의 격려가 경직된 대우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었다.
'강호 선배와 문표 선배님은 적지 않은 나이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야. 고작 20살에 불과한 내가 의기소침해 한다면 두 분을 볼 면목이 없는 거야.’
생각을 정리한 대우는 긴장감을 떨쳐내기 위해 다리를 털어본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무언의 격려를 해준 두 선배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낸다.
'강호 선배, 문표 선배님. 감사합니다. 두 분이 원하시는 대로 저의 공을 던지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도 최선을 다해 막아주십시오.'
대우는 강호와 문표를 믿고 공을 던지기로 한다.
두 사람 뿐 아니라 2루수 황인태, 3루수 추정혁과도 시선을 마주친다.
뿐만 아니라 좌익수 정민성, 중견수 한택근, 우익수 유성철 등의 외야수와도 시선을 마주한다.
'우리 팀의 야수들은 2군 최고의 수비력을 갖추고 있어.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모든 야수들을 눈에 담은 대우는 마지막으로 포수와 눈을 마주한다.
'쉽게 가자. 대우야. 너의 땅볼 유도 능력은 최고 수준이야. 평소대로만 하면 돼.'
포수인 안민경과 시선을 마주한 대우는 그의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비록 착각이지만, 그의 주문을 따르기로 한다.
'그래, 땅볼이야! 민한이처럼 삼진을 척척 잡아내는 능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내게는 아직 그런 능력이 없어. 나의 주 무기는 땅볼을 유도하는 싱커. 그것을 잊지 말도록 하자.'
마음을 잡은 대우가 초구를 위해 와인드업에 들어간다.
공은 스트라이크 존으로 나아가다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가라앉는 싱커였다.
상대 팀 타자는 대우의 초구가 스트라이크 존을 잡으러 들어오는 패스트볼일 거라 생각하고 배트를 휘두른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이어 주심의 콜이 떨어졌다.
"스윙, 스트라이크!"
호쾌한 목소리가 타석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이어진 2구 째에도 스트라이크를 잡아내는 대우.
그 모습을 지켜본 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우 녀석. 정신을 차렸구나. 멘탈이 강한 녀석이 종종 이상한 것에 멘탈이 흔들린단 말이야. 5억이나 받고 입단한 주민한과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강호는 생각한다.
다른 선수와 경쟁하는 것은 프로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 위축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프로 무대의 바닥을 경험한 강호였기에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해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은 사치와도 같았다.
'그런 호사를 누릴 여유는 내게 없어. 처음 얻은 4번 타순의 찬스가 다음 주면 사라져 버린다. 시범 경기에 가서도 생존 경쟁을 해야 하는데 우울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배트 한 번을 더 휘두르겠어.'
그것이 강호의 자세였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 주눅 들지 않기 때문에 손 감독이 강호의 멘탈을 높이 사는 것이다.
따악.
그 때 상대 팀 타자가 대우의 싱커를 받아친다.
호수비 아이템을 모두 사용한 까닭에 아이템 사용을 묻는 시스템 메시지는 없었다.
그러나 이미 자세를 잡고 있던 강호는 앞 쪽으로 이동한 후 몸을 웅크린다.
파악.
타구가 불규칙 바운드로 튀어 올랐다.
처리하기가 까다로운 바운드였지만, 이미 대비를 하고 있던 강호의 가슴팍에 타구가 맞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호는 오른손으로 공을 집어 들고는 자세를 틀어 1루를 향해 빠르게 던진다.
"아웃!"
1루심의 아웃 콜을 들으며 강호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좋은 수비입니다."
"불규칙 바운드에 대처하는 수비의 정석이에요. 강호는 3루수로 둬도 좋고, 유격수로 둬도 좋은 것 같습니다."
"같은 값이면 유격수로 두는 것이 옳은 거지요. 저만한 수비에 4번을 치는 강호의 타격이라면 자이언츠에는 없던 타입의 유격수가 탄생할 겁니다."
코치들이 강호를 품평하며 사담을 나눈다.
이제 그들은 강호의 파인 플레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조금 전의 수비도 불규칙 바운드를 대비한 좋은 수비였기에 강호의 수비력을 칭찬하는 것이다.
딱, 따악!
이어진 대우의 투구에 타자들이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고 타석에서 물러났다.
모두가 유격수 방면으로 흐르는 땅볼 타구들.
강호는 4회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잡아내며 수비실력을 뽐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덕분에 쉽게 끝냈습니다."
덕 아웃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던 대우가 감사를 표한다.
삼진은 없었지만, 강호의 깔끔한 수비 덕분에 3자 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에 감사를 전한 것이다.
"너도 잘 했다. 앞으로 그렇게만 던져라. 내 쪽으로 오는 타구는 웬만한 건 다 막아줄 테니까."
대우의 말에 당부로 화답한 강호는 그답지 않은 농담을 더한다.
"그렇다고 너무 내 쪽으로만 보내지는 말고, 나도 편하게 수비해보자. 문표 선배처럼 말이야."
강호는 마침 곁으로 다가온 문표를 겨냥해 농담의 말을 꺼냈다.
강호답지 않은 농담에 문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반박한다.
반박을 하면서도 문표의 입가에는 미소가 자리하고 있다.
문표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을 줄 아는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강호 후배, 말을 섭섭하게 하시네. 네가 던진 송구가 저절로 아웃이 된건 아니잖아. 내가 이 글러브로 이렇게 정교한 글러브 컨트롤을 해서 탁탁탁 잡아낸 거지. 그렇지 않아? 대우 후배?"
"네? 아...네. 문표 선배님 덕분에 쉽게 끝냈습니다."
"거 봐. 대우 후배도 내 말이 맞다잖아. 우리 강호 후배는 선배의 플레이에 너무 인색한 경향이 있어. 나는 비난에 민감하고, 칭찬에 춤추는 예민한 영혼이라고."
문표의 너스레에 분위기가 유쾌하게 바뀐다.
대우 역시 유쾌한 기분에 전념되어 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 기분을 간직한 채 5회에도 마운드에 올라 안타 하나를 얻어맞았지만, 나머지 타자들을 범타 처리하며 본인에게 맡겨진 2이닝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5회 말 상황.
강호가 두 번째 타자로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투수가 바뀌었어. 내게는 아쉬운 일이야. 이전 투수가 상대하기 편했는데 말야.'
타석에 들어선 강호는 5회 말부터 오른 바뀐 투수를 마주한다.
강호에게 연타를 맞은 선발 투수는 교체되어 있었다.
도발에 쉽게 걸려드는 선발 투수가 내려갔다는 사실에 아쉬워한다.
'5회 말 1아웃 상황이다. 상황에 따라서 5번의 타석이 주어질 수도 있어. 지금 아이템을 쓰지 않아도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어.'
강호의 고민이었다.
타석에 들어서면서 바뀐 투수의 구질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템의 사용 유무를 걱정하는 강호였다.
이미 두 번의 타석 모두를 장타로 기록한 상태여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아니야. 안전하게 가도록 하자. 스프링캠프 경기이기는 하지만,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이 아니잖아. 프리마켓에서 아이템을 다시 구매할 수는 있다지만, 포인트를 낭비할 수는 없어.'
강호는 프리마켓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결정을 내린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 달에 한 번 있는 프리마켓 장에서 일회용 아이템에 포인트를 사용하는 것을 최소화해야 했다.
강호가 노리는 것은 일회용 아이템에 비해 월등한 효능을 발휘하는 스킬들이다.
'스킬을 구입해야 해. '살아있는 전설'과 같은 스킬 아이템을 장착할 수 있다면 일회용 아이템에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된다. 경기를 플레이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모든 능력치가 올라가니까 말이야. 1군 무대에 올라가서 생존 경쟁을 벌이려면 스킬 아이템의 구비가 필수적이야.'
강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스킬의 구입이었다.
현재 강호가 보유 중인 스킬은 하나.
득점권 찬스에서 컨택과 파워 스탯을 증가시켜 주는 '칠 때 친다'스킬이 전부였다.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아이템을 하나라도 아껴서 포인트를 킵해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어. 예전과 비교하면 나의 타격능력에도 상당한 발전이 있어. 단타 정도는 스스로의 힘으로도 만들 수 있겠지. 단지 그 확률이 문제인 거지.'
강호는 스스로를 판단해본다.
득점권 상황이라면 스킬의 적용을 받아 안타 확률이 높아지겠지만, 지금은 주자가 없는 상황.
스스로가 기록할 수 있는 타율을 냉정하게 계산해 본다.
'2할 8푼에서 2할 9푼 사이. 스킬이나 아이템 사용 없이 내가 때려낼 수 있는 안타의 확률은 그 정도일 거야.'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강호가 기대하는 스스로의 타율은 아직 3할이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고민은 더욱 컸다.
지금 상황에서 아이템을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힘으로 안타를 만들어내 볼 것인지를 말이다.
-주자가 없는 상황입니다.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예외 없이 뜨는 시스템의 메시지에 강호는 고민을 접는다.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할 시간.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강호가 타격 자세를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