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6화 (26/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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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4번 타자

주심의 플레이 선언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1회 초, 수비 상황에서 강호는 좌우를 둘러보며 눈빛을 빛낸다.

'시작이다.'

각오를 다진 강호의 시선이 3루를 향했다.

그곳에는 3루수로 출전한 추정혁이 자신을 바라본다.

그동안 강호와의 포지션 경쟁이 밀려 백업으로만 출전하던 정혁.

오늘에야 자신의 자리를 돌려받고는 안도하는 모습이다.

씨익.

시선이 마주친 정혁이 강호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인다.

그의 미소는 마치 '다신 내 자리로 오지마라. 이 녀석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동안 강호의 맹활약으로 입지가 좁아졌던 추정혁은 주전 3루수로 출전한 사실만으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정혁 선배. 미안한 일이지만, 또 다시 3루 수비를 봐야한다면 그 때는 더 열심히 할 겁니다. 그러니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면 선배도 최선을 다 하십시오.'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진심을 마음속으로 담아보며 시선을 돌린다.

이번에 강호의 시선이 향한 곳은 2루 쪽이었다.

그곳에는 예전부터 키스톤콤비로 호흡을 맞추었던 황인태가 있었다.

시선을 느낀 인태가 강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 역시도 미소로 화답한다.

'잘 해 봅시다. 강호 선배.'

인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그의 파이팅이 느껴진다.

강호는 인태를 향해 글러브를 들어 올려 잘 부탁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 때 인태의 너머에서 누군가가 글러브를 치켜드는 것이 보인다.

'야, 야. 나도 봐라. 내가 1루를 보고 있다고.'

강호를 향해 글러브를 들어올린 것은 문표였다.

오랜만에 1루수 자리에 들어선 문표가 긴장한 표정으로 글러브를 쳐들고 있었다.

강호가 자신을 향해 시선을 두자 특유의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얼른 수비 자세를 취한다.

덕 아웃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서학수 수비 코치의 시선을 느낀 것이다.

'아이고, 문표 저 녀석. 하는 꼬락서니가 불안하기 그지없구나. 잘 해주겠지? 제발 실책만 하지마라.'

서 코치는 불안한 눈빛으로 문표의 모습을 쫓는다.

그의 곁에 선 구동진 투수코치는 다른 선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향한 곳은 마운드 위에 오른 선발 투수였다.

'민한아, 긴장하지 말고 한 타자, 한 타자에 집중해라. 오늘은 3이닝만 막으면 되는 거니까. 잘 해내야 한다.'

구 코치는 마운드에 오른 선발 투수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오늘 선발 투수 자리에 오른 이는 주민한.

무려 5억원의 계약금을 받고 자이언츠에 1차로 입단한 슈퍼루키였다.

그가 첫 데뷔 무대에 나선 것이다.

'체구가 있으니까 마운드가 가득 차는 것 같구나. 상당한 피지컬이야. 아직 변화구가 취약하긴 하지만, 의외로 포크볼 습득이 빨랐어. 두 가지 구종만으로도 3이닝을 막기에는 어려움이 없을 거야.'

손 감독의 시선이었다.

그 역시 마운드에 오른 민한을 바라보며 경기를 예측해 본다.

처음 주민한을 선발 예고했을 때 반대에 부딪혔었다.

가장 많은 반대를 한 것은 투수코치인 구동진이었다.

"민한이를 마지막 경기의 선발로 쓰신다고요? 안 됩니다. 감독님. 민한이는 아직 준비가 덜 됐습니다. 변화구가 포크볼 밖에 없는 녀석입니다."

며칠 전 구 코치의 반대에 손 감독은 이렇게 말했었다.

"그 대신 포심 구속이 153이나 나오잖아. 150대의 포심과 120대의 포크볼을 번갈아 쓰면 타자들이 혼란에 빠질 것은 분명해."

"하지만 아직 선발을 뛸 체력이 안 됩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완봉승도 적잖이 거두던 녀석이잖아."

"그건 고교시절이잖습니까? 어디 프로 무대가 고등학교하고 같겠습니까? 타순이 한바퀴만 돌아도 난타를 당할 겁니다."

구 코치는 올해 들어 손 감독의 말에 처음으로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그의 바람은 주민한이라는 투수가 대형 투수로 성장해 자이언츠의 에이스가 되어 주는 것이다.

올해에 갓 들어온 신인 투수를 급하게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구 코치. 권대우 투수의 나이가 얼만지 아는가? 대우 녀석도 민한이와 같은 20살이야. 그런데 녀석은 불펜과 선발을 가리지 않고 잘 해주고 있잖아. 5억 원이나 받은 민한이가 대우보다 10배는 잘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건..."

대우와 민한이를 비교하는 손 감독의 발언에 구 코치는 뒷말을 삼켜야만 했다.

그러나 속으로 삼킨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민한이와 대우는 다릅니다. 대우는 적당히 키워서 쓸 선수지만, 민한이는 공을 들여서 키우면 국내 프로야구를 씹어먹을 투수란 말입니다!'

구 코치의 욕심은 그러했다.

살아오면서 가장 좋은 보석을 발견한 구 코치였다.

주민한이라는 보석은 잘 다듬고 연마한다면 그 어느 보석보다도 빛나는 보물이 될 것 같았다.

그렇기에 완성을 시킨 이후에야 마운드에 올리고 싶은 욕심이 컸다.

"민한이는 멘탈적인 부분이나 볼 배합에 대해 더 배워야 합니다. 부족한 변화구도 물론이고요. 투구 폼을 섬세하게 가다듬는다면 구속도 5킬로미터는 더 나올 수 있는 선수에요."

구 코치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키우고 싶었다.

주민한이라는 원석을 다듬어서 보물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올해부터 민한을 사용하려는 손 감독의 의사에 반대했다.

"좋아. 그럼 이건 어떤가? 민한이를 선발로 세우지만, 3회까지만 보겠네."

"네?"

"투구 수가 몇 개가 되었든 간에 3회까지만 올리겠다고. 내가 보고 싶은 건 민한이가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는 모습이야. 또한 녀석과 야수들 간의 호흡을 봤으면 해. 그 정도는 확인해도 되겠는가?"

손 감독의 부드러운 제안에 구 코치는 물러서게 된다.

선발이긴 하지만, 3이닝만 투구한다면 결과가 좋지 않아도 민한에게 트라우마가 생기거나 좋지 못한 버릇이 생기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구 코치. 자네의 마음은 잘 알고 있어. 어떤 지도자라도 꼭 키워보고 싶은 선수가 있기 마련이니까. 자네에게는 그 단 한 명의 선수가 민한이인 것이지.'

손 감독은 구 코치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민한이를 선발로 올리려는 것이다.

투수코치인 구동진의 시선이 민한에게만 쏠려 있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다른 투수들에 대한 구 코치의 관심이 줄어든 건 사실이었다.

'구 코치. 우리는 지도자야. 한 선수를 편애하는 것은 좋지만, 다른 선수들에 대한 지도를 등한시 하면서까지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아.'

구 코치가 고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손 감독은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네. 나 또한 꼭 키워보고 싶은 선수가 있어. 그렇기 때문에 자네의 지금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거야.'

손 감독은 강호의 얼굴을 떠올린다.

누구보다도 강렬한 눈빛과 치열한 플레이.

마치 내일이 없는 것같이 경기를 치루는 강호의 모습.

손 감독은 강호의 플레이에서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게 된다.

'나의 선수 시절에는 강호와 같은 간절함이 있었던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강호와 같은 투지는 있었던가. 그에 대한 대답은 잘 알고 있다. 간절함과 욕심은 있었지만, 강호와 같은 투지는 없었어.'

손 감독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본다.

강호와 같은 투지는 없었지만, 좋은 선수로서 활약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좋은 기록을 남겼고, 손쉽게 지도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이라는 가정이 생겨난다.

'강호와 같은 태도로 한 경기, 한 경기를 대했더라면 나는 어떤 선수로 남았을 것인가.'

생각해 본다.

아마도 프로야구의 역사를 기록한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잘 하는 선수가 아니라 다시없을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과거의 손 감독은 지금의 강호에 비해 재능과 기량이 월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 감독은 자신의 선수시절보다 강호의 미래가 더 빛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녀석은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다른 녀석이니까. 나와는 또 다른, 나를 넘어서는 녀석으로 성장하게 될 거야.'

손 감독은 며칠 전의 회상을 접는다.

고민하던 구 코치는 결국 주민한의 선발 출전에 동의하게 되었고, 두 사람이 동의한 민한이 초구를 던지고 있었다.

뻐억!

마치 글러브를 찢어발길 듯 한 굉음이 들려온다.

주민한의 초구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었다.

"워어...154킬로가 나왔습니다."

"뭐? 154? 제가 느낄 때에 160은 되는 것 같았는데요. 미트에 꽂히는 소리도 엄청나고요."

"나도 그렇게 봤어. 민한이 녀석, 훈련할 때는 전력투구를 한 적이 없었지. 마운드에 오르니까 엄청나게 터프한 공을 던지잖아!"

"대단한 놈입니다. 민한이 녀석의 기존 최고 구속이 153입니다. 그런데 지금 던진 초구가 154입니다. 프로 무대에 오르자마자 자기 최고 구속을 갱신한 거예요."

코치들이 민한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다.

손 감독 역시 민한을 바라보며 놀라게 된다.

그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과 실력, 출발 지점부터가 다른 것 같은 신체 능력에 전율하게 된다.

'민한이가 가진 잠재 능력은 엄청난 거야. 다른 선수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녀석이니까.'

손 감독은 2구를 던지려는 민한에게서 시선을 떼고, 유격수 자리에 위치한 강호를 바라본다.

'너의 잠재 능력은 민한이에게 미치지 못한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반에 반도 되지 못할 거야. 피지컬은 더욱 심각한 차이가 있어.'

손 감독은 냉정한 시선으로 강호를 바라본다.

자신이 꼭 키워보고 싶은 선수를 바라보며 그에게 자신의 바람을 전한다.

'강호, 너는 이런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겠느냐? 출발선부터가 다른 재능의 한계를 깰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손 감독은 생각한다.

강호와 민한의 재능 차이는 명백하고, 시간이 지나면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프로의 무대는 민한이와 같은 괴물들이 활약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강호의 앞날이 걱정되기도 한다.

따악.

그 때 민한의 3구를 타격한 상대팀 타자의 공이 유격수 방면으로 향한다.

타구의 방향이 깊어서 내야 안타가 될 것 같은 코스였다.

게다가 타자 주자는 상대팀의 1번 타자. 1번 타순의 주루 능력을 생각했을 때 아웃이 될 확률은 없었다.

촤아악.

그런데 강호는 확률이라는 것을 깨 부시는 수비를 펼쳐 보인다.

마치 타구가 튀어 오르는 각도를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이 앞 쪽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 맨손으로 그라운드 볼을 잡아낸 것이다.

그리고는 자세를 바로하기도 전에 1루수를 향해 팔을 휘두른다.

타악.

강호가 던진 볼은 정확하고 빠르게 1루수의 미트로 향했고, 타자 주자의 발이 비슷한 타이밍에 1루 베이스를 밟았다.

모두의 시선이 1루심에게로 향한다.

"아웃!"

1루심은 오른손을 뒤로 당겨 보이며 아웃 시그널을 외친다.

"아!"

"저런 걸 잡아내나?"

"여기가 2군 스프링캠프장이 맞는 거야? 메이저리그 아냐? 저런 수비는 메이저리그에서나 보는 거잖아."

"허, 서 코치. 서 코치가 지도를 잘 한 모양이네. 조금 전에 봤을 때 경기 전에 강호 녀석과 펑고를 하더니 이런 수비를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야?"

강전호 배터리 코치의 웃음기 가득한 물음에 서 코치가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저런 수비를 내가 무슨 수로 가르치겠습니까? 강호 저 놈이 본능적으로 한 거지요.'

서 코치는 생각한다.

강호가 자신이 가르친 적도 없는 수비를 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수비가 자신의 선수 시절을 뛰어넘고 있다고.

한 때는 수비 레전드라 불렸던 서 코치가 고개를 내저을 정도로 강호의 수비는 환상적인 것이었다.

손 감독은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너는 너만의 방법대로 싸워보겠다는 거냐? 재능의 차이를 노력으로 덮어보겠다는 거냐? 그런 것이냐?'

손 감독의 눈동자가 달아오른다.

강호의 플레이로 인해 왠지 모를 감동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5억 원의 계약금을 받은 민한이와 계약금도 없이 육성 선수로 들어온 강호.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손 감독은 두 사람을 비교하는 데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었다.

'너를 지켜보겠다. 네가 주민한의 재능을 실력으로 뛰어넘는 순간이 올 때, 천재가 달리는 길을 지나쳐 너만의 길을 만들 수 있을 때, 그 때.'

손 감독은 확신한다.

백강호라는 선수가 자신이 선수 시절에 만들어내지 못했던 새로운 야구를 펼쳐줄 것이라는 것을.

그 새로운 야구가 야구의 판도를 뒤바꾸어놓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에 찬 표정으로 강호를 바라본다.

'백강호, 너의 시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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