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 / 0335 ----------------------------------------------
한 걸음씩 빠르게
5번 타자인 민성이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타석은 6번 타자인 황인태가 들어섰고, 상대팀 덕 아웃에서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랐지만 투수교체는 없었다.
'스프링캠프 기간이니까 상황 대처 능력을 지켜보겠다는 건가? 물론 납득 가능한 생각이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야.'
강호는 상대팀 투수코치의 선수기용에 대해 평가해본다.
만약 자신이라면 투수를 교체했을 것이다.
1회 상황에서 제구가 잡히지 않는 투수. 연달아 볼넷과 장타를 남발하는 모습이 불안하다.
문제는 원래는 제구력이 좋은 투수라는 점이었다.
'부상일 수도 있고, 컨디션 난조일 수도 있다. 컨디션 난조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부상이라면 투수를 마운드에서 내리고 점검해볼 필요가 있어. 저 나이의 선수들은 부상이 있어도 숨기는 경향이 있으니까 말이야.'
강호는 냉정한 표정으로 상대팀 투수를 관찰한다.
올해로 고작 21살의 나이.
1군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커서 통증이나 부상을 숨기고 욕심을 낼 확률이 있었다.
만약 그런 이유라면 코칭스태프가 나서서 선수를 보호해야만 한다.
'아직 선수 본인이 스스로를 보호하기에는 어린 나이니까. 나 역시 그랬었다.'
강호는 상대팀 투수를 보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1군에 올라가고 싶은 염원에 부상을 속이고, 통증을 참아내며 경기를 뛰었던 기억들.
코칭스태프는 부상으로 고통 받는 자신의 부진을 실력이라 오해하게 되었고, 결국은 방출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강호는 되돌아본다.
결국엔 구단에서도 잦은 부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치료를 받게 해주었지만, 치료 후에도 기량은 크게 올라가지 않았다.
그 때를 되돌아본다면 처음부터 부상과 통증을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후회가 든다.
'이미 지난 일이야. 다시는 과거의 후회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돼. 다행히도 지금의 나는 시스템의 보호로 부상을 입지 않는 몸이 되었다. 과거와 같은 일이 되풀이 될 염려는 1%도 없어.'
강호는 생각을 정리하며 대기 타석에서 배트를 휘둘러본다.
운좋게 찾아온 프리마켓이라는 기연.
시스템은 경기 중에 부상을 입지 않게 하는 어드밴티지를 선물로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강호는 남들에 비해 상당한 이점을 안고 경기에 임하게 된다.
"크윽."
그 때 단발마의 비명이 상념을 지운다.
타석에 들어섰던 6번 타자 황인태가 상대 투수의 공에 맞고만 것이다.
맞은 부위가 좋지 못한 것인지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러워하는 인태.
그 모습에 3군 총괄코치인 양용모와 트레이너가 타석으로 향한다.
"인태 괜찮아? 뼈에 맞은 거야?"
양 코치는 바닥을 뒹구는 인태에게 걱정스레 묻는다.
그의 물음에 신음하면서도 인태는 천천히 입을 연다.
"괜....찮습니다. 코치님. 숨 쉬기가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인태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는 코치와는 다르게 인태의 상태를 살피던 트레이너는 얼굴빛이 좋지 않다.
"코치님. 1루까지 진루하는 건 괜찮을지 몰라도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x-레이를 찍었으면 합니다."
트레이너의 말에 양 코치는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은 정식 경기가 아닌 스프링캠프 경기였다.
무리하게 선수를 운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인태야. 나한테 기대라. x-레이부터 찍어보자."
"아...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인태는 자신의 어깨를 지지하는 양 코치의 손길을 거부하려 했다.
이대로 타석에서 물러선다는 것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빠지면 진만 선배가 내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어. 그렇게 둬서는 안 돼. 이대로 빠지면 안 된다고!'
인태는 자신의 힘으로 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1루로 걸어서 진루하는 것은 가능해도, 달리는 데에는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인태야. 지금은 몸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다. 내 말대로 하거라."
양 코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태를 달래며 그를 부축해 덕 아웃으로 들어간다.
트레이너 코치가 인태의 나머지 한 쪽 팔을 거들며 부축했다.
'우리 프로 선수들에게는 항상 부상의 위험이 따른다. 그것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이점인 거야.'
부상을 방지하는 시스템의 이점에 대해 생각하던 강호는 마침 찾아온 인태의 사구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곁에서 지켜본 인태의 사구는 좋지 못했다.
못해도 일주일 정도는 쉬어야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부위가 좋지 못했고, 또 당사자인 인태 역시 고통스러워했다.
'인태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야. 하지만 2루로 밀려난 진만이에게는 기회가 되겠지.'
강호는 쓰러진 인태를 대신해 대주자로 들어선 1루 주자 오진만을 힐끗 바라본다.
잔인한 일이지만, 프로 무대에서는 누군가의 아픔이 누군가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미 그런 차가운 이면을 경험한 강호였기에 지금의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진만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앞으로 자신의 거취가 결정되겠지. 하지만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강호는 마음을 정리하며 타석에 자리 잡았다.
과거 강호의 포지션이 유격수 일때는 2루수인 인태와 키스톤콤비로 호흡을 맞춰야 했다.
인태의 자잘한 컨디션 변화도 강호에게 영향을 미쳤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유격수가 아닌 3루수를 맡고 있다.
'나는 내 타석에 집중해야만 해. 다른 선수들을 걱정해 주기에는 아직 내 자리가 확고한 것이 아니니까.'
마음을 다잡은 강호는 눈빛을 빛낸다.
4번 타자인 인호가 2루타로 진루, 이어진 5번 타자 정민성이 볼넷.
그리고 사구로 맞은 6번 타자 황인태를 대신해서 오민석이 1루로 진루한 상태다.
상황은 1사 만루가 된 것이다.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기에는 너무도 좋은 기회가 주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욕심을 낼 필요가 있어. 스스로 타격하기 보다는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야.'
타석에 들어선 강호는 아이템 사용을 고려한다.
그런 그의 시선에 시스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득점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아이템을 사용하겠냐고 묻는 메시지에 반응하려던 강호.
그러다 문득 생각을 바꾼다.
'가만 보자. 지금 내 스탯으로 적시타를 때려내지 못할 것인가?'
의문이 든 강호는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어 스탯을 확인한다.
그러자 미처 고려하지 않았던 정보를 확인하게 된다.
백강호(24)
포지션:3B
컨 택:75(+5)
파 워:50.9(+3)
선구안:54
주 력:72
수 비:68
송 구:49
멘 탈:75
상태창에서 컨택과 파워 스탯이 상승한 것을 확인한 강호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고민하다가 이내 프리마켓에서 스킬 무상 교환권으로 구매한 스킬에 시선이 머문다.
'아, 그렇지. 무상 구매권으로 구입한 스킬이 있었지. 깜빡 잊고 있었다.'
강호는 잊고 있던 기억에 반색하게 된다.
프리마켓의 튜토리얼 모드를 진행하며 얻게 된 스킬 무상 교환권.
2만 mp짜리 스킬만을 구입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감지덕지였다.
한참을 고민했었던 강호는 스킬 '칠 때 친다'스킬을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코칭스태프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클러치 능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구입한 스킬의 효과가 득점권 상황마다 적용되고 있었던 거야.'
강호는 비로써 와이번스와의 9회 득점 찬스 때 역전 적시타를 때려냈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때는 본인의 자력으로 안타를 때린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스킬의 스탯 보정 효과를 적용받고 있었던 것이다.
'득점권 상황에서 타격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는 의미구나. 스킬을 구입해놓고 신경 쓴 적이 없어서 알지 못했어.'
강호는 이제야 스킬을 확인하게 된다.
투수는 잡히지 않는 제구력으로 인해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계속해서 젓고 있는 중.
상대팀 덕 아웃은 흔들리는 선발 투수를 교체하지 않고 한 번의 타석은 지켜볼 생각인 것 같았다.
스킬을 확인할 시간은 있었다.
(패시브)칠 때 친다
레벨:2
주자 득점권 상황에서 컨택+5, 파워+3이 되고, 안타를 칠 확률이 6% 증가합니다.
방치해둔 사이에 스킬의 레벨이 올라 있었다.
보정되는 컨택과 파워 스탯은 그대로였지만 안타를 칠 확률이 기존의 5%에서 6%로 상향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킬창의 설명대로라면 득점권 상황에서 내가 안타를 칠 확률은 이전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대로 스킬의 힘을 믿고 타격을 해볼 것인가? 아니면 아이템을 사용할 것인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구입한 일회용 아이템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으니 아이템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안타를 칠 자신이 있다면 굳이 아이템을 소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를 믿을 필요도 있어. 프랑코 코치와 수정한 타격 폼이 어느 정도 적응이 끝났다. 지금의 실력으로 타격을 한다면 못해도 2할 7푼은 때려낼 자신이 있어. 여기에 스킬 보정치를 적용시킨다면 못해도 2할 8푼 대의 타격 능력은 될 거야.'
강호는 배트를 힘껏 쥐며 고민을 해본다.
프리마켓에 다녀온 날짜는 2월 19일이었다.
오늘이 2월 25일이었으니 다시 프리마켓이 열릴 때까지 23일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 때까지는 아이템을 다시 구매할 수 없으니 최대한 아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니야.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주자 만루 상황에서 아이템을 아낄 생각을 하는 건가? 내게 중요한 것은 내일 사용할 아이템을 남겨두는 것보다 확실한 타격을 코칭스태프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템을 사용하겠어!'
선택을 하게 된다.
아직은 스스로의 능력을 믿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다.
강호는 타격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4개의 아이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상대 투수의 투구를 기다렸다.
'응?'
강호는 눈을 부릅떴다.
주자를 일소할 수 있는 3루타 아이템을 사용한 상황에서 상대 투수의 초구가 자신의 상체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 투수도 공을 던진 이후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공이 손에서 빠진 것으로 보였다.
'이런!'
강호는 급히 몸을 돌렸다.
3루타를 때릴 생각에 이미 타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강호.
몸을 피하는 것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빠악!
강호의 왼쪽 팔뚝이 끔찍한 소리와 함께 심하게 요동친다.
그 살벌한 소리에 자이언츠 덕 아웃만이 아니라 상대팀 코칭스태프도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런 대체 뭐하는 거야?! 제구가 안 되는 투수를 계속해서 던지게 두다니? 지금 제 정신인 거야?!"
강호가 바닥에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자이언츠 덕 아웃에서 고성과 함께 손 감독이 뛰쳐나온다.
그를 따라서 대부분의 코칭스태프가 타석을 향해 뛰쳐나왔다.
"아...이런."
연속으로 던져진 몸에 맞는 볼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빈볼로 비쳐질 수도 있었기에 상대팀인 라이온즈 감독도 상황 수습을 위해 그라운드 위로 올랐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데 공을 맞은 당사자인 강호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미동조차 없었다.
'안 아프다.'
분명 팔꿈치의 뼈를 강타한 공이었다.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심판을 보던 주심도 걱정이 된 것인지 연신 자신에게 괜찮냐고 물어오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 위치라면 뼈가 부러져서 상당히 고통스러웠어야 하는 건데...'
강호는 공을 맞은 왼팔의 부위를 오른손으로 만져본다.
왼팔 쪽에는 보호대가 있긴 했지만, 공교롭게도 맞은 부위에는 보호대가 미치지 못했다.
큰 부상이 예상되는 부위였다.
강호 역시도 뼈가 부러졌을 것을 각오하고 이를 악물었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아프지 않다.
강호는 시스템의 메시지가 떠오르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하게 된다.
-시스템이 적용되어 부상에서 보호됩니다.
시스템의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부상을 입지 않는다고 하더니 완전 강철 몸이 되었구나.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보호할 수 있다니.'
강호는 속으로 납득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상대 감독의 멱살을 잡으려하는 손 감독을 안심시켜야 했던 것이다.
그러다 이내 행동을 멈춘다.
'가만 그러면 이미 사용해버린 3루타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게 얼마짜리 아이템인데!'
갑작스런 생각에 몸이 굳고 만다.
3루타 아이템은 무려 1천 mp짜리 아이템이었다.
주루 능력과 타격 능력을 동시에 검증받으려면 3루타 하나 정도는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에 구입했던 것이다.
강호는 상대편 감독의 멱살을 잡는 손 감독이나 지금의 상황보다도 3루타 아이템이 날아가 버리지는 않았을까하는 우려로 가슴을 조리게 된다.
-사용하지 않은 아이템은 반환됩니다.
반환된 아이템: 3루타(일회용)
"휴~"
3루타가 반환되었다는 메시지를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당신 우리 선수들 잡으려고 작정했어? 한 번 해보자는 거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손 감독님, 진정하시죠. 빈볼이 아닙니다. 투수는 바로 교체하겠습니다."
"지금 진정하게 됐어?! 강호가 어떤 선수인데 빈볼을 던져! 지금이 정식 경기도 아닌데 이 따위로 야구해서 어쩌자는 거야? 해보자는 거 아냐?!"
"아닙니다. 손 감독님. 저희가 죄송스럽게 됐습니다."
강호가 타석에 쓰러진 사이 상황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코치들과 트레이너들은 자신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고, 손 감독과 배터리코치는 상대방 감독을 죽일 듯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손 감독이 내뱉은 한 마디가 강호에게 감동을 준다.
'강호가 어떤 선수인데, 라고? 손 감독님께 나는 그런 선수가 된 것인가?'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에 강호는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이미 강호는 손 감독에게 있어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선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