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20화 (2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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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빠르게

경기는 라이온즈 2군과의 경기였다.

오늘의 경기는 자이언츠 팀의 선공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성철 선배 화이팅!"

"선두 타자 안타!"

강호는 벤치 곁에서 들리는 응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본다.

문표와 친분을 쌓은 많은 루키 선수들이 선두 타자인 성철의 안타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피식 웃음짓게 된다.

'대체 문표 선배는 이 녀석들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이 정도면 친분이 있는 후배들이 아니라 광신도들 같은 느낌이잖아.'

강호는 문표를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루키들이 1번 타자인 유성철을 응원하고 있는 이유.

성철이 출루하기를 바라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성철이나 2번 타자인 택근이 만든 기회를 해결할 3번 타순에 다름 아닌 최문표가 이름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철이 빠진 3번 타순에 문표 선배를 넣으시다니. 손 감독님의 혜안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강호는 몇 수 앞을 바라보는 손 감독의 선수기용에 놀라게 된다.

처음 출전 명단을 보았을 때 외야수 포지션에 주목하느라 뒤늦게 확인한 사실이다.

3번 타순의 박철을 대신해서 최문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문표가 지명타자로서 3번 타자에 들어간 것이다.

기존 지명타자였던 유동근은 라인업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동근 선배는 최근 들어 타격감이 지나치게 떨어졌어. 지명타자 자리에 계속 서게 되니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 손 감독님은 박철이 빠진 자리를 문표 선배로 대체하면서 동근 선배에게 경각심을 주시려는 생각이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해 본다.

문표는 무릎 부상이 있기 전까지 발도 꽤나 빠른 편이었다.

최근 무릎 통증으로 선발에서 빠지긴 했지만, 펑고 훈련을 할 정도로 몸 상태가 올라왔으니 주루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원래 5번 타순에 있던 지명타자 타순을 3번으로 끌어 올리는 것도 좋은 판단으로 보였다.

'기존 동근 선배의 5번 타순은 좌익수로 선발된 민성이가 들어갔다. 조금은 아쉽구나. 내가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강호는 아쉬워했다.

손 감독이 자신의 타순 변경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다음 경기가 되어 자신의 타순이 5번으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서야 기분 좋게 웃게 된 강호였다.

"강호 선배님. 문표 선배님이 한방 해주시겠죠? 문표 선배님의 타격은 수위권이지 않습니까?"

생각에 잠긴 강호의 시선을 돌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루키 선수 중 한 명의 얼굴이 보인다.

그의 질문에 다른 루키 선수들 역시 강호에게로 관심을 둔다.

'문표 선배의 타격보다는 입담이 수위권이지.'

후배의 질문에 떠오르는 잡념을 흘려보내고는 이내 입을 연다.

강호가 알고 있는 문표의 타격은 괜찮은 편이었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강호 자신과 배교해도 월등했다.

나이가 들며 배트스피드가 느려지기는 했지만, 공을 맞추는 능력과 타구에 힘을 실어 넣는 능력이 발군이다.

'문표 선배는 당장 1군에 올라가도 2할 8푼은 칠 수 있을 거야. 장타율도 5할에 근접하겠지. 인플레이 상황에서의 뜬공 비중이 높다는 것이 흠이지만, 그 만큼 장타가 많이 터진다는 장점도 있어.'

강호는 문표의 장, 단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문표가 수비에서 취약점을 보이지만, 그런 타격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2군에서 방출당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1군 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대체 타자로 올라가 쏠쏠한 활약을 하기도 했다.

'문표 선배는 찬스 상황에서의 타율이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높다. 그래서 팬들이 그런 별명을 지어준 것이겠지.'

강호는 팬들이 지어준 문표의 별명을 떠올려 본다.

그의 별명은 해결사.

득점권 타율이 3할 5푼을 육박하는 문표에게 네티즌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내 생각에는."

강호가 입을 연다.

자신을 바라보는 루키들의 시선이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딱히 해줄 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마디 정도는 해줘야할 것 같았다.

그 사이 1번 타자인 성철이 볼넷을 골라서 출루하고, 2번 타자인 택근은 아깝게 범타 처리되었다.

1사 1루의 상황에서 문표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문표 선배가 과거에 비해 배트 스피드가 느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상황을 해결하는 능력은 수위권이다. 존 안으로 비슷하게 오는 공은 어김없이 넘겨버리는 장타 능력이 있어. 특히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강해지는 성격이야."

강호가 말을 하는 가운데 문표가 초구에 풀스윙으로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그 모습에 루키들이 '아'하는 탄식을 내뱉는다.

이미 그들은 문표의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그럼 지금 주자가 있는 상황이니 안타 칠 확률이 높다는 말씀입니까?"

자신의 대답에 또 다시 질문해오는 후배의 얼굴을 바라본다.

똘망똘망한 눈이 인상적인 녀석.

한 때는 강호 자신의 스프링 경기 활약을 뒤에서 흉보던 녀석들 중 한명이었다.

'내가 이 녀석과 이렇게 가까이에서 담소를 나누게 될 줄이야. 이게 다 문표 선배 때문이야.'

문표에 대한 칭찬과 비난이 동반된 생각을 가져보며 짧게 답한다.

"단지 안타가 아니라 장타를 말하는 거야. 문표 선배의 다리는 빠른 편이어서 2루타 이상의 장타나 아예 홈런이...."

강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이어진 문표의 타격 때문이었다.

따악!

강호가 홈런을 입에 담는 순간 신기하게도 문표가 상대 투수의 2구를 받아 넘기는 투런 홈런을 때려낸 것이다.

문표의 타격을 지켜보면서도 강호의 말을 듣고 있던 루키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호에게로 향한다.

"저렇게 나오게 되는 거야. 문표 선배의 해결사 능력은 진짜니까."

강호는 얼른 말을 마무리한다.

문표의 장타율이 평균보다 조금 높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는데 문표의 홈런을 예견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자신을 바라보며 '오오'하는 목소리로 감탄하는 후배들의 모습이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본의 아니게 문표 선배의 홈런 예고를 해버린 셈이잖아. 이것 참.'

루키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이럴 때에는 문표가 얼른 돌아와 상황을 정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생겨난다.

"하하하! 다들 보았느냐? 이 선배님께서 보기 좋게 선제 홈런을 때려내는 모습을!"

강호의 바람대로 문표가 덕 아웃으로 뛰어들며 루키들에게 외친다.

그러자 이미 일어서 있던 루키들이 문표와 손뼉을 마주치기 위해 경쟁적으로 손을 뻗는다.

"강호! 너도 어서 오른손을 이리 내밀어라. 방금 홈런을 때리고 온 선배의 핫한 손길을 느껴봐야지."

문표의 독촉에 별 수 없이 강호도 오른손을 내민다.

타악.

힘있게 마주친 손바닥이 뜨거워진다.

오랜만의 손맛에 흥분한 것인지 문표가 거세게 손뼉을 부딪쳐 온 것이다.

"진정하시고 음료수 좀 드시죠. 선배님."

강호는 지나치게 흥분한 문표에게 냉장고에 든 이온음료를 꺼내어 건넨다.

"오오. 땡큐땡큐. 역시 강호 동생은 센스가 넘쳐. 내가 말이야. 1회에 강호 동생에게 타석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홈런을 때린 거야. 두고 봐. 상대팀 투수가 잔뜩 흥분해서 뒷 타자에게 볼넷을 주게 될 테니까."

문표는 강호가 건넨 음료를 들이키며 다음 타석을 예견한다.

강호에 이은 문표의 예언으로 루키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말입니까? 선배님. 상대팀 선발 투수는 제구력이 괜찮은 것 같던데 말입니다. 쉽게 볼넷을 주겠습니까?"

강호에게 질문을 했었던 루키가 이번엔 문표를 향해 질문을 쏟아낸다.

문표는 이온 음료를 그대로 원샷해 버리며 후배의 질문에 답한다.

"파하핫. 아무리 제구력 좋은 투수도 9이닝 당 2개의 볼넷은 허용한다. 지금처럼 멘탈이 흔들린 타이밍에 볼넷을 주지 그럼 언제 주겠어. 지켜보기나 해."

문표의 말이 끝나자 루키들의 시선이 마운드 위의 투수와 타석에 오른 4번 타자 이인호를 번갈아 바라보게 된다.

이윽고 초구가 던져지고 꽤나 높은 코스에 형성되는 패스트볼이 포수미트에 들어갔다.

"볼."

주심의 판정은 당연히 볼이었다.

마치 문표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던져진 초구 하이패스트볼에 루키들의 입이 동그랗게 변한다.

"오오. 정말입니다. 상대팀 투수가 초구에 볼을 던졌습니다."

"제구가 전혀 안되는데 말입니다."

루키들이 연달아 상황을 해설하며 흥분한다.

아직 어린 그들에게 있어서 강호와 문표의 예측은 마치 예언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바보들. 상대팀 투수의 제구는 처음부터 흔들리고 있었잖아. 1번 타자인 성철 선배가 괜히 볼넷으로 걸어 나갔겠어? 원래 제구력이 좋은 투수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제구가 안 잡힌다. 대기 타석에서 지켜본 후 홈런까지 때려낸 문표 선배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잖아.'

문표와 루키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강호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는다.

문표를 응원하는 일에 집중한 나머지 상대팀 투수의 로케이션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후배들을 보며 탄식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덕분에 문표의 말은 예언이 되어 진행되고 있었다.

"볼 투."

투수의 공이 연달아 볼이 되었다.

그러자 문표의 말에 신빙성이 더해진다.

"선배님, 선배님! 또 볼입니다. 진짜로 선배님의 홈런에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냐? 4번 타자인 인호가 타격 욕심이 있어서 3구째에 타격할 가능성이 있긴 해도 웬만하면 볼넷이..."

따악.

문표의 말이 끝나지 않은 가운데 호쾌한 타격음이 덕 아웃을 파고든다.

문표가 3구 째 타격을 거론하는 순간, 짜고 친 것처럼 4번 타자 이인호가 안타를 때려낸 것이다.

좌익 선상의 라인을 타고 흐르는 2루타였다.

"와오!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3구째에 정말로 안타가 나왔습니다."

루키들은 이인호가 타격을 할 것이라 예상한 문표를 우러러본다.

강호는 그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정도가 더 심해지면 문표 선배 동상이라도 세울 기세네. 타자가 2볼 상황에서 3구째를 노리는 거나 1스트라이크 3볼 상황에서 노리고 휘두르는 것은 당연한 상식 아니야? 이 녀석들 정말 프로팀에 소속된 선수들이 맞는 건가?'

강호는 맹목적으로 문표를 찬양하는 후배들에게서 시선을 뗀다.

4번 타자인 인호가 출루했으니 다음 타석은 5번 타자인 정민성의 차례였다.

강호의 타순이 7번이었으니 타격 준비를 해야 했다.

'5번 타자인 민성이는 타격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수비도 나름 견고하고 말이야. 하지만 택근이에 비한다면 부족한 면이 있지. 중견수로 이동한 택근이의 하위 호환버전으로 보는 것이 옳아.'

강호가 보는 정민성은 그런 선수였다.

올해로 21살이 되는 택근이에 비해 한살이 많은 22살의 나이.

어정쩡한 실력에 어정쩡한 잠재력.

2군에서는 2할 8푼은 가능한 타격 실력이지만, 1군으로 올라간다면 2할대 초반이 예상된다.

'하지만 임시 5번 타자로 쓰기에는 크게 타격이 떨어지지는 않아. 문표 선배에 비해 못하기는 하지만 나름의 장타력도 갖추고 있으니까.'

강호는 민성의 평가를 속으로 삼키며, 배트를 집어 들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다른 타자의 실력이나 재능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타석에서 어떤 그림을 그려낼 것인가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게 다가온다.

'무력시위가 필요하겠지. 내가 아닌 민성이를 5번 타순에 배치한 손 감독님께 확실한 모습을 보여드려야만 해.'

자신의 배트를 집어 든 강호가 그라운드 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런 강호의 등 뒤로 손 감독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시선이 뒤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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