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19화 (19/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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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걸음씩 빠르게

    짧았던 휴식 기간이 지나 다시금 경기가 시작되었다.

    말이 휴식이지 스프링캠프 기간이었기에 훈련과 함께 동반된 치열한 경쟁이 진행중에 있었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의 증거인 커다란 종이 한 장이 덕 아웃에 붙어 있었다.

    '또 다시 포지션 변동이 있다.'

    누구보다도 일찍 경기장에 나온 강호가 감독 자리 옆에 붙어있는 선발명단을 확인한다.

    한창 선수 출전명단을 보고 있던 강호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온다.

    "선배님 이렇게 일찍 나오셔서 뭐하십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택근이었다.

    그는 점심 식사가 끝나자마자 쉴 시간도 없이 식당을 나가버린 강호의 뒤를 따라온 것이다.

    강호는 택근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금 출전명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외야 전 포지션에 변동이 있어. 박철이 선발 명단에서 제외됐다."

    강호의 말에 택근이 놀란 표정으로 다가선다.

    그가 놀란 이유는 '외야 전 포지션'이라는 강호의 말 때문이었다.

    택근은 자이언츠 2군의 주전 좌익수 자리를 맡고 있었다.

    "어?!"

    출전 명단을 확인한 택근은 놀란 목소리를 숨기지 못한다.

    강호의 말대로 우익수인 박철이 선발 명단에서 빠져 있었고, 그 자리에는 선발 중견수인 유성철이 기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택근을 더 놀라게 만든 것은 자신의 이름이 기입된 자리였다.

    "제가 중견수 자리로 이동됐습니다! 이게 대체..."

    택근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갑자기 포지션 이동이라니.

    물론 중견수 수비가 가능한 택근이지만, 코칭스탭과의 아무런 사전 교감 없이 포지션이 변경될지는 몰랐다.

    '택근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면 나머지 외야수들도 미리 듣지 못했을 거야. 너무 갑작스런 포지션 변경이다. 그렇다는 것은 손 감독님이 외야 쪽에 판단해야할 선수가 있다는 말이거나, 아니면.'

    강호는 급작스러운 포지션 변경의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고민해 본다.

    이미 자신을 포함한 내야 포지션을 변경한 적도 있다.

    하지만 손 감독과 같은 사람이 두 번이나 같은 방법으로 선수를 시험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호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1군 외야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구나.'

    곧장 해답을 낸다.

    또한 문제가 생긴 외야 포지션이 어디인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택근이 녀석은 좌익수 수비와 중견수 수비가 가능하다고 했었다. 프로에 처음 입단했을 때는 중견수 포지션을 봤으니 크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룸메이트인 택근과 어느 정도의 친분을 쌓자 숙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물론 대부분 말을 하는 것은 택근이었고, 강호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수비가 약한 편인 택근이 녀석을 중견수로 이동시킨 것은 택근이가 중견수 수비를 할 줄 알기 때문이야. 중견수 자리에서의 활약을 기대한 이동은 아닐 거야.'

    강호는 외야 포지션 이동에서 택근이 주가 아님을 깨달았다.

    며칠 전의 내야 포지션 이동이 강호 한 사람을 테스트하기 위한 포지션 이동이듯이 외야의 포지션 변경도 주인공이 있을 것이다.

    '택근을 대신해서 좌익수 자리에 들어간 정민성이 그 증거인 셈이야. 민성이는 수비나 타격 모두 택근이보다 한 수 아래다. 택근이의 대타 정도로 둔 셈이지. 그렇다는 것은 손 감독님이 주목하고 있는 자리는 바로 우익수.'

    강호는 박철이 빠지고, 유성철이 들어간 우익수 자리에 시선을 둔다.

    '박철과 성철 선배, 두 사람 모두 중견수와 우익수 포지션이 가능하다. 하지만 수비나 타격 능력 등 무게감으로 따진다면 성철 선배 쪽에 높은 점수를 부여할 수 있어. 아직 수비력 면에서 부족한 철이에 비해 성철 선배는 수비, 타격, 장타력, 주루 모두 준수한 편이니까.

    강호는 두 사람을 놓고 비교한다면 기존 중견수였던 유성철에게 점수를 주고 싶었다.

    빠른 발과 수비 능력이 뛰어났던 성철은 타격 능력 면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았지만, 경찰청 야구단에 입단해 군대 문제를 해결하고, 타격과 장타 능력을 대폭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있었다.

    자이언츠 1군 외야에 자리가 없어서 2군으로 분류되지만, 언제든지 1군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실력이라고 여겨진다.

    '성철 선배는 스프링캠프 경기 이전의 기록으로 따져보면 3할 5푼 대의 타격을 기록하고 있어. 스프링캠프까지 포함한다면 3할 7푼 대가 된다. 1군에 올려놓는다고 해도 2할 7푼대 정도의 타격은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강호는 성철이 1군에 올라간다면 3할은 어렵더라도 2할 5푼에서 2할 8푼 사이의 기록은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2군 경기에서 1번 타순을 맡고 있을 정도로 발도 빨랐다.

    주루 능력이 있는 야수는 타순에서 활용 폭이 많을 테니 1군에 올려 주전 우익수로 쓰지 않더라도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1군의 외야수 자리는 외국인 선수인 휴고의 자리라고 알고 있는데. 생각보다 기량이 올라오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부상이라도 입은 걸까?'

    의문을 가져보지만, 휴대폰은 숙소 방에 두고 온 까닭에 검색을 해볼 수는 없다.

    그저 휴고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예측만 해볼 뿐.

    "감독 님께서 저를 중견수 자리에 시험해 보시려는 걸까요? 저는 중견수 자리보다는 좌익수가 더 편한데 말입니다."

    강호가 결론을 내고 출전 명단에서 시선을 뗀 후에도 택근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 혼란스러워 한다.

    멘탈이 크게 나쁘지 않은 택근이지만, 수비 포지션의 갑작스러운 이동에는 민감한 모양이었다.

    '택근이 녀석은 주전 자리를 장담 받았으니까 할 수 있는 투정이겠지. 나 같은 떠돌이 내야수는 부릴 수 없는 투정이야. 어떤 포지션이 되었든 주전으로 세워주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강호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는다.

    하지만 비참하지는 않았다.

    그의 오늘 포지션은 선발 3루수이기 때문이다.

    지난 경기처럼 백업 멤버가 아닌 선발 명단에 이름 올리고 있었다.

    '지금은 이 정도에 만족해야 할 때야. 택근이 녀석처럼 주전자리가 보장이 되고 나서야 배부른 투정을 해야겠지.'

    생각을 정리한 강호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연다.

    "손 감독님이 시험하려는 자리는 네 자리가 아니야. 그러니 큰 부담가지지 말고, 평소대로 하도록 해."

    "네? 저를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럼 누구를? 아...!"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강호의 말에 의문을 가졌던 택근은 이내 '아'하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잘 알겠습니다. 성철 선배도 1군 무대에 도전할 때가 되었죠."

    택근은 강호가 제공해준 단서만으로도 상황을 이해한다.

    그 모습에 강호가 이채를 띈다.

    '역시. 택근이 녀석도 머리가 좋은 편이야. 야구 센스도 있는 녀석이고. 만약 성철 선배가 1군 무대에 자리를 잡게 된다면 2군 외야에서 가장 빛나게 될 녀석은 택근이 녀석이 될 거다.'

    강호는 이어서 예상을 해본다.

    시즌 중에 외야 포지션의 공백이 또다시 발생한다면 그 때는 택근이 그 자리에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잘 알았으면 어서 몸이나 풀자. 놀고 있을 시간이 아니야."

    "네? 경기 전까지 시간 많이 남았습니다. 벌써 몸을 풀잔 말입니까?"

    "내가 왜 일찍 나온 것 같아? 너도 따라서 나왔으니 준비 훈련에 동참하도록 해라."

    "윽. 저는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따라 나왔지 말입니다."

    택근은 죽는 소리를 하면서도 강호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택근 본인도 느끼고 있었다.

    성철이 1군에 콜업되면 다음 타자는 자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당장 비어버리게 되는 2군의 1번 타순도 택근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강호의 하드 트레이닝에 동참하며 의욕을 다진다.

    그 시간, 자이언츠 2군의 두 거장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성철이로 결정을 하신 겁니까? 어젯밤에 고민을 많이 하셨지 않습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양용민 3군 총괄이었다.

    보통의 경우에 그가 스프링캠프 출전명단을 작성하고는 했지만, 이번 경기는 손 감독 본인이 직접 출전명단을 작성했다.

    그만큼 손 감독의 고민이 길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박철이는 아직 1군에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어. 타격은 나쁘지 않지만, 수비가 부족하다는 말이야. 어깨도 약한 편이고. 여러모로 판단했을 때 박철 보다는 유성철이지. 성철이를 우익수 자리에서 지켜보다가 1군에서 요청할 때 올려 보내야지."

    손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양 코치는 한 가지 의문을 표시한다.

    "그럼 박철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대로 우익수 백업으로 두면 페이스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선수 본인도 실망할 테고요. 차라리 중견수 자리에 철이를 넣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택근이보다는 성철이가 중견수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 됩니다."

    양 코치의 말은 충분히 타당한 내용이었다.

    라인업에서 빠진 우익수 박철은 팀의 3번 타순에서 3할 4푼 대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좋은 타자였다.

    포지션 변경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타순에서 빠진다는 것은 모두가 납득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철이에게 자네가 잘 이야기 하도록 해. 오늘 경기만 쉬게 한다고. 내일부터는 철이를 지명타자로 기용할 생각이니까. 성철이가 1군에 올라가는 대로 철이는 다시 우익수 자리를 보게 할 거야."

    "아, 지타에 둔단 말입니까? 그럼 5번 타순의 유동근을 제외하실 겁니까?"

    "그래야지. 동근이 녀석이 부쩍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이 참에 라인업에서 제외시켜서 긴장을 시킬 필요가 있어. 나이도 적지 않은 녀석이 간절함이 없어. 간절함이."

    손 감독은 혀를 차며 말한다.

    두 사람이 거론한 유동근은 1루수 보직이 있긴 하지만, 주로 지명타자로 기용되는 타자였다.

    클러치 능력이 있어 5번 타순에 배치하긴 했지만, 요즘 들어 득점권 상황에서의 타점 생산 능력이 줄어든 상태였다.

    손 감독은 유동근을 지타 자리에서 내리고, 그 자리에 우익수인 박철을 두려하는 것이다.

    "철이를 지타에 넣으면 타격에 얼마만큼 집중할 수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철이는 송구 능력이 약한 콤플렉스 때문에 타격에 집중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 그런데도 3할 4푼을 때려내고 있으니 나중에 기회를 봐서 1루수 수비 연습을 시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손 감독의 말에 양 코치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박철의 타격 능력은 그도 인정하는 바였다.

    아직 재능이 모두 개화된 것이 아니었으니 제대로만 키워낸다면 1군에서도 능히 3할 대의 타율을 기록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서 외야에서의 수비 폭이 좁고, 송구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손 감독님은 철이의 부족한 수비 능력을 그런 식으로 커버하시려는 생각이시구나. 몇 년 후가 되면 철이를 1군으로 올릴 생각이시니 수비부담이 적고, 송구 능력이 크게 중요치 않은 1루수로 두시려는 거야. 좋은 방법이다. 이번 외야 포지션 이동을 기점으로 철이를 다잡는다면 1년 안에 괜찮은 1루수로 키워낼 수 있을 거야.'

    양 코치는 손 감독의 혜안에 속으로 박수를 치며 자신의 노트에 해당 내용을 기록했다.

    그러다가 노트에 적혀 있는 세 글자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아'하는 탄성과 함께 입을 연다.

    "감독님. 어제 못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깜빡했네요."

    양 코치의 말에 손 감독의 시선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에게로 향한다.

    양 코치는 노트 사이에 껴놓은 선수 일지를 펴들고는 손 감독에게로 걸어갔다.

    "강호 말입니다."

    손 감독은 '강호'라는 이름에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강호는 요즘 손 감독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강호? 뭔데 그래? 이리 줘봐."

    양 코치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 손 감독은 양 코치의 손에 놓인 수첩을 받아들고는 내용을 살핀다.

    "응? 이게 정말인 거야? 2주도 안 되는 기간 만에 5킬로를 늘렸다고? 강호 녀석이 원래 살이 안찌는 체질 아니었어?"

    "맞습니다. 예전에 방출되었던 구단에서도 체중증가를 지시했었는데 뜻대로 안 된 모양입니다. 군 생활을 하면서는 오히려 몸무게가 줄었구요. 캠프에 들어오면서 강호에게 5킬로 정도만 올려보라고 언질을 해두었는데 강호가 상당히 애를 쓴 모양입니다."

    양 코치는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강호에 대한 양 코치의 호감은 당연한 것이다.

    자신이 내린 어려운 지시 사항을 힘들게 수행해내는 선수를 싫어할 코치가 누가 있을까.

    강호에게 있어 5킬로그램의 체중증가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아는 양 코치로서는 강호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체중을 늘리면서 파워가 늘어난 모양입니다. 프랑코 코치와 파워를 실을 수 있는 타격 폼으로 수정하고 있는 중입니다."

    양 코치의 이어진 말에 손 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5킬로그램이지만, 100킬로가 나가는 선수의 5킬로와 70킬로가 나가는 선수의 5킬로는 차이가 크지. 강호 녀석이 이번 시즌에는 정말로 이를 악물고 노력하는 게 보여. 아주 좋은 모습이야."

    손 감독은 강호를 떠올리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서 선수 기록에 기록된 스프링 캠프 타율을 슬쩍 훑어본다.

    타율 0.555에 7타점.

    강호가 득점권 상황에서 귀신같이 때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 외야수 포지션에 신경 쓰느라 강호의 타순 변경을 잊었구나!'

    손 감독은 자신의 건망증을 탓하며 양 코치의 노트를 내려놓는다.

    그러면서 입을 연다.

    "양 코치. 오늘 경기가 어떻게 되든 다음 번 경기에 강호의 타순을 변경하도록 해."

    "타순 말입니까? 생각하고 계신 타순이 있으십니까?"

    양 코치의 물음에 손 감독은 곧장 입을 연다.

    추정혁을 대신해 선발 3루수로 들어간 강호의 타순은 현재 7번 타순이었다.

    "5번 자리에 넣어볼 거야. 녀석이 세 경기 동안 기록한 클러치 능력이 진짜인지를 확인해 봐야겠어."

    손 감독의 발언에 양 코치가 고개를 끄덕인다.

    몇 번의 경기에서 기록한 강호의 안타는 득점권 상황이거나 찬스를 연결하는 상황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강호 녀석의 5번 타순은 나쁘지 않을 거야. 사실은 3번 타순이나 4번 자리에도 어울려. 다음 번 기회에 강호가 중심권 타선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확인할 수 있겠어.'

    양 코치는 손 감독의 지시를 기록한 후 노트를 덮었다.

    그렇게 강호의 도약은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앞을 향해 순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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