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홈런왕 백강호-9화 (9/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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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캠프 경기

강호가 우려하는 병살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7번 타자로 나선 추정혁이 외야 플라이로 타점을 올리면서 스코어는 9대 2로 따라 붙었다.

이어서 나선 8번 타자 안민경은 볼 넷.

강호의 타석에서 원 아웃 주자 1,2루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홈런이 가장 좋긴 한데, 프리마켓에서 구입한 홈런은 단 하나다. 더 결정적인 기회에서 써야해.'

하나 밖에 없는 홈런 아이템은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

아무리 찬스 상황이지만, 9대 2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홈런을 사용하기에는 아까웠다.

'단타로는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할 거다. 주자를 일소하는 장타를 치는 것이 좋아.'

일반 안타 아이템은 11개나 되었다.

그러나 강호가 원하는 것은 단타가 아니었다.

'2루타를 쳐야만 해. 1루 주자인 안민경이 발이 느리다 해도 2루타에 홈 시도를 못할 정도는 아닐 거야.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작전코치가 무리해서라도 홈으로 돌릴 가능성도 있고.'

강호는 마음을 정리하며 타석에 섰다.

심호흡을 하는 그의 등 뒤로 코칭스태프와 팀원들의 시선이 꽂힌다.

-득점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혼자만 볼 수 있는 메시지가 눈에 뜨자 긴장을 내려놓는다.

'어차피 내 힘으로 타격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긴장을 하는 것이 웃긴 일이다.'

마음을 비우며 배트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는다.

상대팀 벤치에서 투수교체 사인을 낸 것이다.

4회까지 퍼펙트하게 경기를 끌고나가다 5회부터 뭇매를 맞기 시작한 진승규가 교체되는 거였다.

'차지승이구나.'

강호는 새롭게 오르는 투수를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어제 데이터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룸메이트인 한택근을 홀로 방에 남겨두고, 밤늦게 방을 비웠던 어제. 강호가 찾은 곳은 코치들이 회의실로 사용하는 장소였다.

다행히도 회의실의 문은 열려 있었고, 지키고 있는 인원은 따로 없었다.

'있다!'

강호는 찾고 있던 서류 꾸러미를 찾아내고는 눈을 크게 뜬다.

자리를 비운 코치들이 다시 들어오기 전에 얼른 내용을 복사해 숙소 방으로 돌아갔다.

"응? 선배님. 그게 뭡니까?"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던 택근이 강호의 손에 들려있던 서류의 정체를 물어온다.

강호가 숙소 방을 나선지 오래되지 않았기에 택근이 잠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별 거 아니다. 네 할 일 해라."

강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시선을 피했다.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회의실에 몰래 들어간 사실을 코치들이 안다면 곤란하다.

이럴 때는 선배라는 위치를 이용해 외면하는 것이 좋다.

"네."

택근은 강호가 친해지기 어려운 룸메이트라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강호는 잠이 든 택근을 한동안 지켜보다 서류 뭉치에 시선을 돌린다.

'진승규, 차지승, 홍서진, 류석현, 최지원."

강호가 눈으로 읽고 있는 것은 와이번스 2군의 출전 명단과 분석이었다.

스프링캠프 경기에서 활약하기 위해 코칭스태프가 가진 자료를 빼내온 것이다.

'분명 우연이지만 필연이기도 하다.'

강호의 생각은 그러했다.

아무리 스프링캠프이지만 코칭스태프에 한하여 상대팀의 출전 명단과 분석 자료가 배포된다.

선수들에게는 따로 자료가 배포되지는 않는다.

상대팀 자료를 모르는 상황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다.

'프랑코 코치에게 한글로 된 분석 자료가 간 것은 내게 주어진 기회였어.'

며칠 전의 기억이었다.

대만에 함께 온 구단 직원의 실수로 프랑코 코치에게 한글로 된 상대팀 분석 자료가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강호는 프랑코 코치에게 타격 지도를 받고 있었기에 함께 있었다.

"What?"

구단 직원이 내민 한글 서류를 보며 프랑코 코치는 왓 더 헬을 외쳤다.

그제야 실수를 깨달은 구단 직원은 거듭 사과하며 스페인 어로 된 분석 자료를 가져다주었다.

그동안 프랑코 코치는 자국어인 스페인 어로 구시렁거리며 서류 뭉치를 내팽개쳤다.

그 때 코치진에게 분석 자료가 배포된 것을 스치듯 보았던 것이다.

'프랑코 코치에게 타격 지도를 받았던 것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 알았으랴. 여하튼 차지승에 대한 정보는 대략 알고 있다.'

차지승의 정보를 떠올려 본다.

포심 패스트볼은 괜찮은 투수이지만, 변화구가 보잘 것 없었다.

브레이킹볼의 각도가 좋지 못했고, 패스트볼과 변화구 간의 투구 폼의 격차도 컸다.

변화구를 던질 때 타자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투구 폼 변화가 있는 투수다.

'차지승의 변화구는 스트라이크로 들어오지 못해. 카운트를 잡기 위해서는 분명 포심 패스트볼을 밀어 넣으려 할 거야.'

차지승의 투구를 예측하게 되자 잠시 고민을 하게 된다.

'정보를 믿고 이대로 타격을 할 것인가? 아니면 아이템을 사용해 장타를 뽑을 것인가?'

순간의 고민이었다.

가운데로 몰리는 포심 패스트볼을 타격하면 정타가 나올 확률이 있었다.

그러나 반대급부를 무시할 수 없다.

차지승의 포심은 구위가 강한 편이라 배트가 밀린다면 범타가 나온다.

여러 가능성을 타진해보던 강호는 결론을 내린다.

'아이템을 사용하겠어.'

결정을 내린 강호는 곧장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템 하나를 선택한다.

-아이템 2루타(일회용)를 사용합니다.

선택한 아이템은 2루타였다.

강호는 득점권 상황에서 모험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내게는 중요한 타석이다. 스스로의 능력을 점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회를 붙잡는 거야.'

강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마음을 정리한다.

아이템을 사용했으니 2루타는 정해진 것이다.

그로 인한 결과로 기뻐할 필요도, 감동할 이유도 없었다.

스스로의 노력이 아닌 이유다.

따악!

초구를 노린 강호의 타격이 빠르게 뻗는다.

강력한 타구에 순간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과 양 팀 덕 아웃이 얼어붙었다.

움직이는 것은 좌익수와 중견수, 타자와 주자들뿐이다.

워낙 강한 타구였기에 볼이 펜스를 직격하고 나서야 야수들과 덕 아웃이 움직일 정도였다.

"홈런, 홈런 아냐?"

"아닌 것 같습니다. 펜스를 맞고 튕겨 나왔습니다.

덕 아웃에서 지켜보던 손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환호한다.

그러나 마냥 기뻐하기에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

"2루타인가? 아슬아슬한데? 너무 강하게 맞았어."

강호의 타구가 워낙 강했던 까닭에 펜스를 강타한 볼이 좌익수 정면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2루타가 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강호는 1루를 지나 이미 2루로 향하고 있었다.

"저, 저거!"

"2루는 무리 아닌가? 위험하겠는데요?"

코칭스태프의 경악성을 뒤로하고 강호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시스템이 정한 2루타이니 반드시 2루타가 만들어진다. 의심할 필요는 없어.'

강호는 2루타를 의심하지 않았다.

타이밍이 늦기는 했지만, 좌익수의 송구가 2루에서 약간 좌측으로 빛나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의 기본은 잊지 않았다.

촤아악.

2루를 향해 슬라이딩해 들어가는 강호.

그것을 목격한 3루수가 공을 받은 유격수를 향해 외친다.

"홈, 홈!"

3루수의 목소리를 들은 유격수는 2루로 향하는 강호는 무시한 채 공을 곧장 홈으로 던졌다.

2루 주자의 타구 판단이 늦어 홈 쇄도가 늦었던 것이다.

"저런!"

"아웃인가?"

덕 아웃의 우려대로 아웃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유격수의 송구가 포수 우측으로 치우치면서 뒤늦게 홈으로 쇄도한 2루 주자가 손쉽게 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세이프."

주심이 세이프를 외치자 자이언츠의 덕 아웃이 들끓는다.

"그렇지!"

환호하는 코칭스태프들.

그런데 상황은 계속되고 있었다.

"돌아, 돌아!"

"홈으로 들어와!"

홈에 쇄도한 2루 주자를 태그하기 위해 서두르던 와이번스 포수가 공을 뒤로 빠뜨리고 만 것이었다.

그 모습에 덕 아웃의 모든 이가 크게 소리를 내질렀고, 3루에 위치하고 있던 김대주 작전코치도 주자들에게 사인을 보낸다.

"돌아! 홈으로 들어가!"

작전코치의 주루 사인에 3루 주자가 된 안민경은 급하게 홈으로 쇄도한다.

포지션이 포수인 관계로 발이 느린 민경이지만, 지금만큼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고 있었다.

좀처럼 하지 않던 헤드퍼스트 슬라이딩까지 하며 홈 승부를 벌인다.

"세이프!"

안민경 마저 홈에서 세이프 되며 상황은 9대 4.

여기에 2루에서 몸을 일으킨 강호마저 3루로 손쉽게 진루하며 1사에 주자 3루 상황이 만들어 졌다.

"잘했다!"

3루에 있던 김대주 작전코치는 강호의 엉덩이를 두들겨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호의 2루타와 상대 송구실책으로 2득점이 만들어진데다가 찬스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발이 빠른 강호이기에 다음 타자인 유성철이 내야땅볼만 쳐도 1득점을 더 올리게 된다.

"강호 저 놈이 해주는구나."

"강호가 오늘 컨디션이 좋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강호가 저런 깨끗한 타구를 날리던 녀석이었나?"

즐거워하던 손 감독은 문득 의구심을 가진다.

강호의 타격에 대해서는 2군 코치들이 잘 알지 못한다. 그가 육성 군 선수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강호의 타격에 대해 잘 아는 것은 3군 타격코치인 김진관 코치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그....간혹 2루타와 3루타를 기록하긴 합니다. 발이 워낙 빨라서 말입니다."

김 코치는 마치 변명처럼 강호를 칭찬한다.

지금 상황에서 강호의 흠을 잡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간혹 장타를 치긴하지. 2루타 하나와 3루타 하나. 발도 빠르긴 하지만 많이 빠른 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말했을까?'

김 코치는 마치 강호를 포장해주듯이 말한 자신을 자책해 본다.

강호의 타격에 대해 가장 자세히 아는 김 코치가 강호를 칭찬하자 손 감독의 표정이 조금 변한다.

"강호가 장타를 칠 수 있는 녀석이었어? 의외인데?"

손 감독이 김 코치의 말에 장고에 들어간다.

무언가를 단단히 오해한 것 같은 손 감독의 반응에 김 코치가 불안해진다.

'아, 씨. 내가 말을 잘못한 거 아니야? 괜히 나중에 욕먹기 전에 지금 바로 잡아야...'

마음을 먹은 김 코치가 입을 뗀다.

"저기..."

그러나 김 코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잘 했다!"

"이 녀석들. 그렇게 할 수 있으면서 왜 이제야 잘하는 거야."

"인태. 민경! 잘 뛰었다."

마침 득점 주자들이 덕 아웃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놔, 말해야 하는데 타이밍이...'

김 코치는 강호에 대한 말을 수정하기 위해 타이밍을 노렸다.

손 감독과 코치들이 덕 아웃으로 들어온 득점 주자들을 격려하고 난 후를 노려 다시 입을 열었다.

"감독님 저기..."

그런데 상황은 김 코치의 편이 아니었다.

따악!

강호의 다음 타자로 나선 유성철이 큼지막한 타구를 날려 보낸 것이다.

"옳지! 크다. 커!"

"오오오, 앗! 잡히겠는데요?"

"아냐. 넘어갈 수 있어. 넘어가라!"

펜스를 넘길 것 같기도 하고, 우익수에게 잡힐 것 같기도 한 대형 타구가 코칭스태프의 이목을 잡아 끌었다.

'이런....'

김 코치가 속으로 진땀을 흘리는 사이 성철의 타구는 아깝게 잡혀버렸고, 그 사이 태그업을 한 강호가 홈으로 손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강호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덕 아웃으로 들어왔다.

"이야, 강호! 오늘 날아다니는데?"

"타격 좋았어. 각도가 조금만 좋았으면 넘어가는 거였는데. 아쉬워."

덕 아웃에 들어온 강호에게 칭찬이 쏟아진다.

완패하던 팀의 분위기를 뒤바꾼 그는 이미 인기스타였다.

"쩝..."

세 번째로 말할 타이밍을 잡고 있던 김 코치는 결국 마음을 접는다.

'뭐, 내가 아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굳이 정정할 필요가 있겠어?'

강호에 대한 자신의 말을 정정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자신의 말로 인해 손 감독이 어떤 마음을 품게 되는지 알지 못한 채 김진관 코치는 결국 입을 굳게 다문다.

경기는 9대 5.

5회를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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