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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캠프 경기
"오늘따라 투수들이 왜들 저 모양이야? 훈련기간 동안 훈련이 덜 된거야?"
손성조 감독의 불호령에 2군 투수 코치인 구동진이 찔끔한 표정을 짓는다.
맥을 못추고 있는 팀 투수들 때문에 손 감독의 심사가 편치 않은 상태다.
아무리 스프링캠프 경기라지만 해도 너무 한 경기력이었다.
단지 투수들의 문제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진만이 놈은 왜 또 저래? 이어산하고 손호섭이 1군 스프링캠프에 갔다고 2군 주전이라 이거야? 오늘 야수고 투수고 간에 죄다 엉망이야."
오진만과 야수들을 싸잡아 힐난하는 손 감독의 말에 뒤편에 서있던 서학수 2군 수비코치의 안색이 하얗게 변한다.
"음음."
헛기침을 하며 표정 관리를 해보지만, 하얗게 뜬 얼굴이 나아지질 않는다.
"점수를 못 내더라도 더는 주면 안 될 거 아냐? 투수 당장 바꾸고, 진만이도 당장 내려. 수비 좋은 유격수로 바꾸란 말이야!"
손 감독의 호통에 구동진 투수코치와 서학수 수비코치가 분주해진다.
이곳이 시즌 중의 1군 무대였다면 덕 아웃에서 감독이 이토록 호통을 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현장의 펜들과 카메라를 의식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1군 스프링캠프 경기장이었다.
함께한 취재진도 드문 까닭에 감독이 분노를 삭힐 이유는 없었다.
"어서 바꿔!"
"네, 넵."
"불펜에서 준비 됐다고 합니다. 곧장 올리겠습니다."
구동진 투수코치는 육성군 투수인 권대우를 다음 투수로 올렸고, 잠시 고민하던 서학수 수비코치는 며칠 전의 일이 불현듯 떠올라 곧장 입을 연다.
"백강호를 대 수비로 올리겠습니다."
서 코치의 결정은 백강호였다.
며칠 전 손 감독이 강호의 수비를 관심 있게 지켜보며 자신을 불렀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손 감독님 본인이 관심있게 지켜보는 선수이니 뭐라고 하지시지는 않겠지?'
서 코치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손 감독이 즉시 이견을 표시한다.
"강호 놈은 3루수 아니었어? 유격수 수비도 된다는 거야?"
손 감독이 지켜본 강호의 수비포지션은 3루수와 2루 수비를 본 것이 전부였다.
선수명단에 내야 전 포지션이 가능하다고 코멘이 달려있긴 하지만, 서학수 수비코치가 유격수 자리를 권유할지는 몰랐다.
"유격수 수비도 나쁘지 않습니다. 포구 실력이 좋고, 송구도 쓸 만합니다. 병살 플레이나 주자 진출 상황에서의 수비 작전이 걱정이긴 한데 기본기는 탄탄합니다. 한 번 써보시죠."
서학수 코치는 자신 있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서 코치의 말에 손 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강호 놈의 수비라면 유격수 자리도 괜찮겠지.'
쉽게 납득하는 손 감독.
그러나 서 코치의 속내를 알았더라면 되려 호통을 쳤을 것이다.
'강호로 막아지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 기회에 지나치게 강호를 좋게 보는 감독님의 고집도 꺾을 수 있을 거야.'
서 코치는 지금의 상황을 유격수 자리 하나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구동진 투수코치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육성군 투수 중 한명을 올리고 있지 않은가.
'권대우라니. 이름만 들어봤지. 공 던지는 것을 본 적도 없다. 그런 듣보잡 선수를 올리는 것을 보니 구동진 코치도 딱히 올릴 투수가 없는 거야.'
투수 코치가 경기를 포기할 정도라면 오늘의 경기는 야수 문제가 아니게 된다.
명백하게 투수들이 망친 경기가 되는 것이다.
'이 참에 강호 녀석을 테스트하는 것도 좋아. 내, 외야 전 포지션 수비가 가능하다니. 어디 고등부 야구에서나 통할 농담을 하고 있어?'
서학수 코치는 강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강호가 올해에 합류한 선수이기도 했고, 그의 과거 기록을 찾아보지 않은 것이다.
육성군 선수들의 기록을 모두 찾아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2군 수비코치 자리는 무척이나 바쁜 자리였다.
수비력이 부족한 선수가 많은 2군에서는 수비 코치가 지도할 선수가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다.
"그럼 뭐하고 있어? 당장 교체해!"
"네, 알겠습니다."
손 감독의 호령에 서 코치가 즉시 움직인다.
그 때 그를 대신해서 후배 코치 한 명이 나선다.
불편한 덕 아웃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던 3군 수비코치 신기문이었다.
"서 코치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그래? 신 코치가 다녀올래?"
"네, 코치님. 후배인 제가 다녀와야죠."
신기문의 말대로 그는 서 코치보다 일곱 살이 어린 후배 코치였다.
사실 입 밖으로 꺼낸 말처럼 선의로 꺼낸 말만은 아니었다.
'아, 미치도록 불편하다. 자리를 피하자.'
신기문 코치의 속내는 이러했다.
팀이 크게 지고 있는 상황이라 손 감독의 불호령이 누구에게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잠시라도 손 감독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손 감독과 코치들의 복잡한 속내의 결과물인 권대우 투수와 강호가 그라운드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두의 이목이 새로 올라간 두 선수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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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 투수는 올해로 스무 살의 신예다.
1차 지명을 받은 선수는 아니지만, 구단의 관심을 받고 있는 선수인 것은 맞았다.
훤칠한 키와 부드러운 투구 폼에서 이어지는 솟아나는 공. 언더핸드 투수로는 드물게 140킬로미터 대의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다.
힘든 훈련 속에서도 웃는 낯을 잃지 않는 멘탈 좋은 선수이지만, 지금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속으로 불평을 토로한다.
기회가 주어지면 패기 있게 투구해야 한다는 것이 대우의 지론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팀이 9대 0으로 지고 있는 5회 초의 상황. 주자는 1,2루에 놓여 있고, 아웃카운트는 하나도 잡지 못한 채 이전 투수가 내려가 버린 후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인상을 찡그린다.
근래 들어 구종 하나를 더하기 위해 3군 투수코치와 밤낮으로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컨디션 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페이스가 점점 떨어지는 것을 막기는 힘들었다.
'하필이면 다른 팀과의 경기에 처음 등판한 것이 이런 상황이라니. 망했다.'
마운드 위에 오른 대우의 멘탈이 무너져 내린다.
또래에 비해 멘탈이 강한 대우지만, 프로팀과의 첫 데뷔 경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식 경기가 아닌 연습 경기이지만, 얼마나 기다리던 무대이던가.
좋지 못한 컨디션에 멘탈까지 무너지니 투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저 놈, 왜 저래?"
덕 아웃에서 지켜보던 손 감독이 헛웃음을 짓는다.
상대 타자를 향해 처음 던진 권대우의 공이 포수의 키를 훌쩍 넘겨버린 이유였다.
"손에서 공이 빠진 모양입니다."
덕분에 구동진 투수코치가 땀을 뻘뻘 흘려야만 했다.
대우를 변호해주고는 있었지만, 그의 초구를 지켜본 구 코치도 불안하긴 매한가지였다.
'권대우 저 놈, 멘탈이 무너졌구나. 컨트롤이 좋은 놈이 저런 공을 던진다는 것은 볼 제어를 못하고 있다는 소리잖아.'
남 몰래 한숨을 내쉰다.
비교적 멘탈이 좋고 제구력도 괜찮은 권대우를 올렸는데 장점이 모두 사라진 초구를 던져버린다.
두 개의 장점 때문에 구종이 두 개밖에 없는 투피치의 단점도 매워주는 권대우다.
장점이 사라졌으니 단조로운 구종을 던지는 투수만 남는다.
'대우도 난타 당하겠구나.'
대우가 2구를 던지는 모습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게 된다.
2구가 지나치게 가운데로 몰려버린 까닭이다.
실투였다.
'실투다!'
유격수 수비 자리에서 강호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투수의 공이 가운데로 몰린다는 것은 우타자가 당겨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뜻도 된다.
'타자의 공이 밑으로 깔린다면 3루수 쪽이나 유격수 방면으로 공이 올 것이다. 지금 타석에 선 타자는 땅볼을 치는 비중이 높은 타자. 공이 내게 올 확률이 높다!'
판단을 끝낸 강호는 타자의 타격 자세에 더욱 집중한다.
공은 이미 투수의 손을 떠났고, 기회를 잡은 타자는 전력으로 스윙을 시작한다.
그 때, 강호의 예측을 확증이라도 하듯이 시스템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타구가 유격수 방면으로 향합니다.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느려진다.
강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변했다.
프리마켓의 홀로그램에서 지금의 상황을 미리 경험한 강호는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실제로는 이렇게 되는구나. 나쁘지 않아. 아니, 아주 좋다.'
강호는 속으로 미소를 짓는다.
상대의 타구가 내게 오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수비수가 공을 놓칠 확률은 얼마나 줄어들까?
빠른 스피드를 가진 라인드라이브 성 타구도 온다는 것만 알게 되면 낮지 않은 확률로 아웃시킬 수도 있는 것이 프로다.
'아니, 사용하지 않겠어.'
이미 결정을 내린 강호는 속으로 시스템에게 대답하며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느려졌던 세상이 순식간에 원래의 속도로 돌아왔다.
따악.
타자가 친 타구가 빨랫줄같이 뻗는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강호는 타구가 땅볼이 아닌 라인드라이브 성으로 강하게 다가오자 놀란 눈을 뜬다.
"저, 저거!"
덕 아웃에서는 경악하고 있었다.
상대팀 타자의 공이 깨끗한 안타가 될 것이라 확신한 것이다.
"아니?!"
그런데 확신은 깨어지고 말았다.
미리 자세를 잡고 있던 강호가 하늘 높이 뛰어오르며 2루타 성 타구를 허공에서 낚아채버린 것이었다.
타악.
강호는 아슬아슬하게 타구를 낚아챈 즉시 볼이 빠지지 않게 오른손을 글러브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3루로 향하려 했던 2루 주자를 잡기 위해 왼발이 땅에 닿는 즉시 2루수에게 공을 던졌다.
불안정한 자세로 공을 던진 덕분에 바닥을 굴러야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결과는?'
바닥을 뒹굴던 강호의 시선이 2루심에게로 향했다.
강호가 점프하는 것을 목격한 2루 주자가 빠르게 몸을 놀린 덕에 타이밍은 아슬아슬했다.
"세이프!"
2루심이 크게 양손을 펼친다.
강호가 보기에는 아웃에 가까웠지만, 이곳은 스프링캠프 장이었다.
비디오판독을 요청할 수는 없다.
'쳇.'
속으로 혀를 차게 된다.
빠르게 대처한 까닭으로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았지만, 병살을 잡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저거, 분명 아웃입니다."
"저도 그렇게 봤습니다. 타이밍은 아웃 타이밍입니다. 2루심이 서있는 각도가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강호의 수비에 서학수 수비코치와 신기문 3군 수비코치가 연달아서 코멘트를 단다.
'그래, 아웃이 맞아.'
손 감독 역시 아웃 타이밍으로 보았지만, 딱히 항의를 하지는 않았다.
스프링캠프에서 심판진에게 항의를 해야 무엇 하겠는가.
'그나저나 강호 놈의 캐치가 좋았다. 분명 안타라고 봤는데.'
못해도 2루타는 될 것 같았던 강한 타구를 농구 선수처럼 뛰어올라 캐치를 잘 해주었다.
강호의 수비에 높은 점수를 주었던 자신의 안목이 맞았다는 사실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강호가 잘 잡았습니다."
"맞습니다. 강호의 수비가 좋았습니다."
크게 지고 있던 분위기에 우울해 하던 코치들이 강호의 호수비에 밝아진다.
완패를 당할 것 같은 경기가 강호의 수비로 인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그래봐야 원 아웃이야. 권대우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보자고."
손 감독은 김칫국을 들이키려는 코치들에게 주의를 주며 마운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 망할!'
대우는 공을 손에서 놓자마자 실투인 것을 깨달았다.
잘 맞으면 담장을 넘길 것이고, 못해도 2루타는 내줄 각오에 즉시 수비 위치로 뛰어들었다.
따악.
예상대로 공은 유격수 키를 훌쩍 넘길 듯이 쏘아져 나갔고, 대우는 포수의 뒤쪽을 향해 뛰어들었다.
혹시라도 외야수가 홈에 던진 공이 포수를 지나쳐 버리면 포구를 하기 위함이었다.
"오오!"
그런 대우가 몸을 돌린다.
벼락같이 뛰어오른 강호가 라인드라이브 성의 타구를 어렵사리 잡아낸 것이었다.
"2루!"
3루수가 외치기도 전에 이미 바닥에 착지한 강호가 2루를 향해 공을 던지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아웃 타이밍에 대우는 환호를 내질렀다.
"세이프!"
"아..."
분명한 오심에 한탄을 토해낸다.
아쉬웠다.
아웃카운트 하나를 뺏긴 것 같아 2루심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이스 캐칩니다!"
호수비를 펼친 강호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찬사를 보낸다.
강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진만 선배와는 다르게 강호 선배는 수비가 탄탄하구나. 2루로 던지는 걸 보니 송구 능력도 갖춘 것 같은데. 유격수 쪽으로 향하는 타구는 안심해도 되겠어.'
무너져 내렸던 멘탈을 다잡게 된다.
우타자를 상대할 때 수비력이 좋은 유격수를 등지고 있다는 것은 심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
특히나 땅볼 유도가 많은 대우와 같은 투수는 더욱 그러했다.
'병살을 노린다. 싱커로 땅볼을 만들어 내는 거야.'
대우는 타석으로 들어서는 다음 타자를 보며 눈동자를 빛낸다.
투심과 싱커. 두 개의 구종만 가진 대우이지만, 두 개의 구종 모두가 전문가들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땅볼로 잡아낸다!'
땅볼 메이커라는 별명에 걸맞는 공을 던지기 위해 디딤발을 내딛으며 있는 힘껏 공을 던진다.
"이야앗!"
투구를 위한 대우의 힘찬 목소리가 마운드에서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