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
외전 完. 여담. 후일담. (完)
그리고 한 달 후.
“이게 뭐야?”
태준은 침통한 표정의 수연에게 무언가를 건네받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연이 이상한 칫솔 손잡이 같은 막대기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태준에게는 조금 생소한 물건.
그리고 그 물건에는 뚜렷한 두 개의 선이 태준을 반겨주고 있었다.
“뭐긴. 임신 테스트기지.
임신이래. 여기 두 줄이 임신했다는 표시야.”
“뭐? 이게 무슨…..
도대체 언제…. 아. 그날.
그런데 그때 안전일이라서 상관없다고.”
다시 화해한 그 날.
그날도 평소처럼 서로의 체온을 나누면서 달콤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자신의 안전장치(?)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매우 놀랐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안전일이니 괜찮을 거라고 수연이 안심시켰고.
자신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상식이지만 워낙 불규칙한 수연이다 보니 그 부분에는 수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 원래 안전일이라고 100% 안전한 건 아니거든.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원래 좀 불규칙해서 말이야.”
멋쩍은 듯한 수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태준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황망한 표정을 짓던 태준은 빠르게 표정을 바꾸고 부드럽게 웃으며 수연에게 이야기했다.
“하하. 그랬구나. 고맙고, 수고했어.
우선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우선 수연의 몸부터 챙긴 태준은 수연에게 고맙다고 하고 바로 어른들한테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일에 대하여 일절 언급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음… 배가 더 불러오기 전에 식부터 서둘러야겠어.
우선 바로 장인어른부터 찾아가서 인사를 해야겠지?
아버지 어머니는 상관없다고 하실 테니…. 역시 문제는 장인어른인가?”
혼자서 착착 계획을 세우는 태준을 바라보며 수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한번은 크게 싸울 거로 생각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태준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저 행동은 결혼을 거부하던 태준이 보일 만한 행동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야. 화 안 내?”
“화를 왜 내? 사랑하는 여자가 사랑하는 아이를 가졌는데 내가 왜 화를 내겠어?
뭐 예상치 못한 일이라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원래 삶은 그런 예상치 못한 일들의 향연이기도 하니까.
그런 사소한 일로 심력 낭비하지는 말자고.
이제 좋은 생각만 해야지.
그리고 정말 기쁜 일이잖아. 축복받을 일이고.”
수연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태준의 모습에 조금 감동한 표정이었다.
내심 혹시나 태준이 화를 내거나 하면 마음이 아플 거 같았는데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수연과 태준의 결혼을 착착 빠르게 준비되고 있었다.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바쁘게 움직이던 태준도 약간의 여유를 찾아 민수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수연의 임신 소식과 결혼 소식을 접한 민수는 환하게 웃으며 태준을 반겨주었고.
“하하. 새신랑 축하해.”
“후…. 그래. 축하받아야지.”
민수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준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수연 앞에서는 내색을 못 했지만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결혼하게 된 것이 조금은 황망한 모양이었다.
민수는 그런 태준의 모습에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가족계획은 철저히 하라고들 하잖아.
좀 더 신중하지 그랬어?
애초에 네가 조심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
“허… 글쎄. 과연 그럴까?”
태준은 민수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태준은 수연의 앙큼한 생각을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임신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생각한 것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 일이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의 안전장치에 문제가 생긴 그 순간에 이미 모든 일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준이 수연에게 이 일을 따지지 않은 건 어차피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아이는 생겼고, 자신은 무조건 결혼을 해야 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무슨 다른 소리를 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건 사양이었다.
정말 영양가 없고 자신의 살을 파먹는 행동에 불과하지 않은가.
결혼을 미루고 싶었던 자신에게 들어온 묵직하고 치명적인 한방이었다.
그리고 이 일이 왠지 설아나 자신의 어머니와 연관이 있을 거 같았다.
확신은 없었지만, 그냥 직감이었다.
오랫동안 두 모녀를 지켜봐 왔던 가족인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느낌.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의 안전장치만을 믿고 있는 듯한 민수의 모습에 조금 애잔한 생각도 들었다.
그건 전혀 의미가 없는 물건이거늘.
태준은 작은 바늘 하나에 완전히 상황이 바뀔 수 있는 물건을 믿고 있는 민수가 딱할 뿐이었다.
민수는 태준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변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 시선은.”
“후… 아니다.
그러게 내가 좀 신중하지 못했지?
그래도 생각해 보니까 나쁘진 않네.
최고의 혼수가 아이라더니, 어머니 아버지는 엄청 기뻐하시더라고.
지금 소속사에 육아방 생기는 거 봤지?
아버지가 그런 분이야.
권력 남용의 표본 아니냐?”
태준은 얼른 말을 돌려 버렸다.
훗날 자신의 동지가 될 민수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당해보지 않으면 이 기분을 아마 모를 것이다.
모든 일이 예상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순탄하게 진행되고 결혼식을 앞둔 수연은 희희낙락이었다.
윤 대표와 민 여사, 그리고 친정 식구들까지 다들 자신을 애지중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뱃속의 요 녀석도 제법 효자인지 흔한 입덧조차 거의 없었다.
정말 모든 일이 행복하게 흘러가는 한때였고 그 옆에는 설아가 있었다.
“캬. 우리 시누이. 진짜 명불허전.”
“제 말이 맞죠?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책임감 하나는 확실하다니까요.”
“아. 맞다 부케는 네가 받을 거라고?”
“네. 그러려고요.
생각해보니까 오빠랑 오라버니랑 동갑이잖아요?
민수 오빠도 이제 서른.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음… 하긴. 그건 그러려나?
하지만 민수도 별로 서두를 거 같진 않은데.”
“그렇긴 하죠.
뭐… 정 안되면 저도 혼수부터 마련하고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설아의 모습에 수연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자신과 친한 동생, 이제 시누이가 된 설아는 이럴 때 보면 참 대범하다.
“뭐? 풋. 그러면 진짜 웃기긴 하겠네.”
두 여자는 태준이 들었으면 웃음을 터트릴, 민수가 들었으면 기겁할 만한 이야기들을 즐겁게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설아가 부케를 받는다고 한 순간부터 결혼은 왠지 머지않은 일이 될 것만 같았다.
외전3. 이수연, 결혼은 그래도 내가 먼저 해야지. 언니가 좀 급해! 끝!
〈여담. 후일담.〉
민수와 태준.
민수와 태준의 내기는 결국 그 끝을 볼 수가 없었다.
다음 해 민수와 태준이 동시에 대상을 거머쥐었기 때문이었다.
윤 엔터로서는 대단한 경사가 아닐 수 없었지만, 승패를 가릴 수는 없었던 것.
새로운 내기를 다시 시작하려는 두 배우의 행동에 혀를 찬 수연은 자신의 아이가 뛰어놀 마당 있는 집을 직접 장만하였다.
그 모습에 설아는 수연답다고 웃음 짓고 있었고.
민수.
아시아의 왕으로 군림하던 민수는 훗날 전 재산을 투자해 자신의 이름을 딴 민수 시티라는 거대한 세트장을 건립하게 된다.
이 최첨단 세트장은 그 뒤로 한국 영화계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필수 코스가 되는 것은 물론이었고.
천루 시티를 바라보며 얻은 영감과 전날 발생했던 큰 사고가 민수에게 이런 결단을 내리게 만든 것이었다.
한국 영화계의 발전에 한몫하게 된 이 세트장을 건설한 민수는 한국 영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길이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설아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게 된 민수.
아들 “현준”은 부모의 놀라운 운동신경을 물려받아 한국 축구의 미래를 책임질 꿈나무로 자라났고 딸 “민영”은 민수의 뚝심과 설아의 영악함을 물려받아 대범한 여장부로 자라나고 있었다.
아리 재단의 남자들이 “민영”을 벌써부터 눈여겨 보고 있었으나 미래는 알 수 없는 것.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아리 재단은 민영에게 이어질 가능성이 컸다.
태준.
태준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은 이후에 꾸준히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 진출을 거부한 민수와 달리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되었고.
그 뒤 많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는 배우가 된다.
민수가 안정과 평안을 선택했다면 태준은 야망과 명예를 선택한 것.
하지만 두 배우 모두 행복한 일생을 보냈으니 어느 것이 더 좋은 선택이라고 판단하기는 힘들었다.
특히 중년에 이르러 태준과 민수가 공동으로 주연한 영화가 할리우드에 개봉해 할리우드 흥행사에 족적을 남길만한 작품이 되었으니 실속은 오히려 민수가 더 챙긴 것이 아닐까?
수연.
역시 수연은 그저 가정주부로 여생을 보낼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아이를 낳자마자 잠시의 휴식 끝에 바로 연예계에 복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안방극장의 여제로 군림하게 된다.
태준과 수연의 딸인 “진희”는 아주 어려서부터 소속사에서 살다시피 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으로 무럭무럭 잘 자랐다.
부모의 재능을 이어받았는지 떡잎부터 실한 요 귀여운 아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역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훗날 윤 엔터의 3세대를 책임질 대들보가 되어주지 않으려나 모르겠다.
설아.
태준이 훗날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는 배우가 되지만 실상 미국에 가장 먼저 진출한 것은 설아였다.
크리스 건과 제작한 앨범이 빌보드에 오르며 미국 진출에 성공한 것.
설아는 매혹적인 목소리와 몽환적인 이미지로 미국 시장을 공략했는데 얼굴 없는 가수로 앨범을 내 목소리로만 미국인에게 어필하던 설아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자 그 인기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아무래도 배우보다는 가수가, 동양 미남보다는 동양 미녀가 더 미국 시장에 접근하기 쉽다는 속설이 그저 속설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뒤, 여러 장의 앨범으로 활동을 이어오던 설아는 재단을 이어받으며 가수 활동 잠정 중단하게 되었다.
하지만 설아를 기억하고 그녀의 새 앨범을 기다리는 팬들의 수는 너무나 많았고 그녀는 그들의 성화 때문에 틈틈이 자신이 만든 노래들을 미니 앨범으로 발매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설아는 오랫동안 앨범이 기다려지는 가수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형우.
사교성 좋고 능력 있는 형우는 배우 관리팀 팀장을 거쳐 훗날 윤 엔터의 CEO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태준이 미국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윤 대표가 태준에게 소속사 운영을 맡길 생각을 완전히 접게 된 것이었다.
물론 윤 엔터 자체는 태준이 물려받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형우는 소희와 결혼까지 하면서 매니저들 사이에서 인간승리의 화신으로 추앙받게 된다.
매니저부터 회사의 CEO로 성장한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그 부인이 당대 최고의 여배우 중 하나라는 진소희라니.
정말 존경받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형우가 운영하는 윤 엔터는 그 뒤로도 계속 승승장구.
결국 모든 배우가 들어가고 싶어 하는 그런 꿈 같은 회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소희. 은우.
두 배우는 은퇴할 때까지 윤 엔터의 배우로 남았다.
한국에서 이름난 배우로 인정받는 둘은 훗날 윤 엔터의 배우들에게 연기를 가리키는 연기 선생으로도 활동하게 되는데 많은 배우들이 이 둘에게 연기를 배우고 좋은 배우로 성장하게 된다.
순탄한 작품 활동과 안정적인 생활.
부와 평안을 모두 얻은 둘이야 말로 꽃길을 걸으며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강환.
윤 엔터의 지원을 받으며 극단을 꾸려가던 강환은 결국 예술의 전당 무대에서도 인정받게 되었고 그의 극단 “뿌리”는 한국 최고의 연극 극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일이 잘 풀려서 그런지 음주량도 줄어든 강환은 민수의 전생보다 훨씬 오래 연극배우로 활동할 수 있었다.
강환의 소원이었던 최고의 극단을 만들겠다는 포부가 현실로 실현된 것이었다.
혜민.
윤 엔터의 아역배우인 혜민은 설아의 지도하에 정말 대단한 미녀로 자라게 되었다.
그리고 설아를 롤모델로 그녀의 사고방식과 마인드까지 본받은 혜민은 그야말로 완벽한 철의 여인이었다.
훗날 태준이 닦아 놓은 길 위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 혜민은 중국의 린 샤오 메이와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할리우드 배우로 인정받게 되었고 윤 엔터의 간판 배우가 된 혜민은 다음 세대인 “진희”가 다 자라 배우가 될 때까지 윤 엔터를 책임졌다.
물론 진희의 좋은 롤모델이 되어주기도 했고 말이다.
윤 대표. 민 여사.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하던가?
윤 대표는 결국 큰 마당이 있는 집에서 태준 설아 내외와 귀여운 손녀, 외손주들과 살아가는 해피라이프를 거머쥐게 되었다. (무려 수연의 전 재산을 투자한 집이었다.)
꼬물꼬물 세 명의 어린 천사들과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니 윤 대표야말로 진정 평안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후에는 연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손녀 “진희”에게 연기를 가르치면서 감탄을 연발하는 중.
수연과 태준의 피를 이어받은 자신의 잔망스러운 손녀는 귀엽기도 했지만 보고 배운 게 그거라 그런지 능청스럽게 연기도 아주 잘했으니 말이다.
민 여사는 아리 재단을 설아에게 맡기고 여유 있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귀여운 아이들의 재롱을 구경하면서 살아가는 윤 대표와 민 여사.
든든한 후계자가 버티고 있는 둘의 인생도 성공한 인생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듯 큰 문제 없이 탄탄대로를 걸어가는 민수와 윤 엔터 식구들.
이번에는 민수도 하늘나라에서 자신을 지켜보신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께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자신 있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흔한 배우 정민수.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