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
외전2. 정민수. 애인이 너무 귀여움받아서 피곤하다!
민수는 방으로 돌아와 한숨부터 쉬었다.
“하. 이거 진짜 힘들긴 하네.”
한숨을 쉬긴 했지만 이겼다는 사실에 뿌듯한 것만은 사실.
자신의 생각보다 자신의 신체는 더욱 우월한 모양이었다.
17명과 싸워서 그들을 모두 물리치다니.
게다가 크게 다친 곳도 없어 보였다.
물론 미리 보호구를 착용하고 시작한 일이라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가능성은 별로 없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설아가 고개를 쓱 하고 내밀었다.
배실 배실 웃고 있던 설아는 민수의 몸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자 안색을 바꾸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뭐에요. 오빠.
왜 이렇게 다쳤어요?”
민수는 설아의 반응이 차라리 어이없을 지경.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 많은 사람들하고 몸의 대화를 나눈 후 멀쩡할 리가 있겠는가?
“이 정도면 양호하지 뭘 그래?”
“예? 오빠가 그 정도 테스트에 다칠 리가 없는데….”
설아는 민수가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시시각각으로 안색이 변했다.
그리고 결국 남은 16명이 자신에게 달려들었고 자신이 다 물리쳤다는 이야기에는 표정을 바꾸고 이를 갈고 있었다.
“아니…. 분명 공평하게 하겠다고 해서 내가 괜찮다고 한 건데.
그런 짓을 했다고요?”
민수는 설아가 저렇게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마치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거칠게 따질 기세였으니까.
자신 앞에서는 언제나 사근사근한 모습만 보이던 설아가 저러고 있으니 조금 신기하긴 했다.
하지만 설아의 반응을 보니 애당초 춘섭 어르신이 그녀에게 허락을 받을 때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
“됐어. 뭐, 이미 다 지난 일인데 들춰서 뭐해?
중요한 건 내가 결국 이겼다는 거지.”
“그래도요. 이제 곧 작품에 들어가야 할 배우한테 그런 짓이라니요.
난 대충 대련 몇 번 하는 정도로 끝날 줄 알았단 말이에요.
일 대 일로 싸우면 오빠가 절대 꿀릴 일이 없을 테니까요.”
“에이. 이 정도면 약과지.
윤 대표님 이야기를 너도 들어는 봤을 거 아냐?”
“그때야…..”
민수는 설아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자신이 오히려 무안할 정도였다.
이거 이러면 좀 곤란한데.
설아가 적당히 미안해하면서 자신에게 잘했다고 아양을 떨거나 아니면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는 정도로 반응해야 자신도 장난스럽게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 있을 텐데 저건 지금 너무 멀리 간 거 같았다.
민수는 우선 분위기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괜히 이런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지는 건 곤란하니 말이다.
게다가 요즘 설아가 한창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 데 이건 안될 말이었다.
“자. 그건 그렇고.
음반 작업은 어떻게 되는 거야?
거의 끝났어?”
“헤헤. 네. 이제 끝났어요.
빵야 쌤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영어 버전으로 녹음하자고 하지만 않았으면 진작에 끝났을 텐데요.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린 걸까요?”
저번 영화의 OST 작업을 하면서 크리스 건은 다시 한번 설아의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결국 이번 앨범을 만들 때 미국에 돌릴 영어 버전의 곡도 같이 녹음하자고 제안했고.
아마 설아의 영어 실력이 급격하게 향상된 것도 크리스가 제안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태준이나 설아나 유전자가 원체 우월해서 그런지 마음먹고 달려들니 언어 습득 속도가 너무 빨랐다.
예전에 크리스 건으로부터 언어만 해결되면 미국에서도 통할만 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설아가 그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영어에 매달려 살더니 결국 노래만은 원어민과 비슷한 수준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결국 이번에 시범적으로 몇 곡을 녹음하게 있게 된 것이고.
“차라리 저보다 오빠가 미국에 가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꾸준히 배역 문의가 들어오지 않나요?”
“글쎄. 그건 그런데 마음 가는 배역은 없어서.
차라리 진한 악역이라면 오히려 마음이 좀 갔을 텐데.”
사실 저번 영화의 미국 흥행이 생각보다 더 괜찮다 보니 동양인이 필요한 영화에서는 민수에게 계속 접촉해 오고 있었다.
중국에서 확실히 먹히는 배우라는 점과 스티븐을 통해 민수의 영어 구사 능력이 생각 이상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그들의 구미를 사로잡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배역 대부분이 민수의 마음에 들지 않아 고사하는 중이었다.
배역이 단순히 주인공의 조력자 포지션을 벗어나지 못한 데다가 특별히 느껴지는 매력도 없었으니까.
민수의 말대로 그런 배역보다는 차라리 처절한 악역이 더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민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배역을 연기할 만큼 할리우드에 특별한 로망이 있지도 않았다.
“스티븐은 계속 오라고 보챈다면서요?
이번에 제가 미국으로 넘어갔을 때 왜 혼자 왔냐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그 녀석은 우선 한 두 작품 하면서 간을 보라는데.
글쎄. 당장은 한국에서도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이번에 드라마에 들어가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게 우선이 아닐까?”
“헤헤. 내기도 있었죠?”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렇네.”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넘어가자 설아의 분위기도 많이 밝아졌다.
기분이 좀 풀리자 민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설아가 반응하기 시작했는데.
“어쨌든 오빠. 괜히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어요.
제가 어떻게 보상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에이. 보상은 무슨.
윤설아 애인으로 인정받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대표님도 비슷한, 아니 더 심한 일을 겪기도 하셨으니까.”
민수가 당당하게 준비된 대사를 꺼내자 설아는 조금 얼굴을 붉히면서 좋아하는 듯 보였다.
그래 이렇게 흘러가야지.
민수는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어지는 설아의 이야기에는 살짝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래서 춘섭 할아버지가 인정했어요?”
“응? 그러고 보니….
정확히 인정하지는 않으셨네.
그냥 다음에 말해 준다고 하셨던가....”
“예?”
그러고 보니 그랬다.
춘섭은 인정을 하지는 않았다.
결과는 다음에 말해 준다고 했을 뿐.
“와… 설마…..”
민수는 순간 싸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이 일이 그냥 한 번으로 끝날 거 같지 않은 불길한 느낌이 든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지금까지 민수가 이런 느낌을 받을 때는 거의 그 느낌이 맞아떨어졌다.
“아... 차라리 그냥 몇 대 맞아주고 끝내는 게 나았나?”
괜히 이제 와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이미 늦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아리 재단 체육관에서는 널브러져 있는 17명의 패잔병을 노려보며 춘섭이 혀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예전 윤 대표 응징에 한 손을 보탰던 아리 재단의 원로들이 함께였다.
“하… 세상에 보통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나 참. 저렇게 잘 치는 놈이 배우 짓을 하고 있다니.”
“예전에 저런 놈이 하나 있었으면 우리가 서울을 일통했을 수도….”
그렇게 한참이나 감탄하면서 한탄을 내뱉던 원로들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쩔 셈이냐? 박가 놈아. 이거 우리 계획은 완전 물 건너갔는데.”
“그냥 인정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박 형.
원래 저 녀석만 한 놈이 없다는 건 이미 합의가 된 거였잖아요.”
“그래서야 쓰겠나?
우리 자존심은 완전히 걸레가 됐는데?”
“하지만 여기서 뭐라고 하는 게 더 구차하지 않겠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자 의견이 분분했다.
그렇게 수선스러운 분위기에서 춘섭은 굳은 표정으로 손을 들어 주위를 환기했다.
“다 맞는 소리지.
하지만 우리가 처음에 이 일을 생각할 때 계획했던 목적을 상기해봐.
적어도 작은 아가씨 뒤에 만만치 않은 아리 재단 오빠들이 버티고 있다는 걸 알려주겠다는 거였잖는가.
그런데 이렇게 일이 끝나면 너무 우리가 너무 우습게 보이지 않겠나?
자네들도 알 거야.
뒤에 든든한 처가가 있다는 게 결혼 생활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춘섭의 말대로였다.
그들도 민수를 반대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연애를 로망이요 결혼은 현실이라고 했다.
서로 같이 살다 보면 다투기도 싸우기도 하고 서로 언성을 높일 일도 많으니까.
그리고 당연히 주도권 싸움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아리 재단의 원로들은 그런 면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은근히 잘난 민수가 나중에 혹시나 설아를 구박할까 봐 말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설아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만약 자신들이 있으므로 훗날 민수와 설아의 다툼에서 설아가 우위를 점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맞습니다.
처가가 뒤에 든든하면 세 번 싸울 걸 두 번만 싸우게 되고, 마누라한테 두 번 화가 나도 한 번만 화를 내게 되어있죠.”
“은근히 쫄리기도 하지.
내 매부는 아직도 나 때문에 동생한테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데.
내가 인사하러 왔을 때 내 동생 울리면 아예 죽여버린다고 했거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은근히 브레이크가 되어주기도 하고요.”
“윤 대표만 봐도 지금까지 한 번도 아가씨한테 큰소리를 친 적이 없잖아.
그때 그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럼.”
“그래. 그러니 어쨌든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줘야 해.
그러니 우리가 저 녀석을 이길 수 있는 걸 생각해봐.”
춘섭의 말에 원로들의 의견이 한쪽으로 모이는 듯하자 젊은 이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미 끝난 테스트를 무슨 수로….”
“내가 아까 인정한다고 하지는 않았어.
나중에 결과를 말해 준다고 했지.
그때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다른 테스트를 추가하자고 하면 될 거야.”
“네? 어르신 그건 너무 치졸한데요.
저희가 너무 구차해 보이지 않을까요?”
“흥.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더럽게 물고 늘어져서 괜히 상종하면 피곤한 족속들이라는 이미지는 줄 수 있지 않겠나?
더럽든 무섭든 어쨌든 상종하기 까다롭단 건 매한가지고.”
“그래. 어쨌든 우리는 민수 녀석에게 설아 아가씨 뒤에 든든한 오빠들이 있다는 것만 알려주면 되는 거야.”
원로들의 반응에 이사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런 목적이라면 이렇게 치졸하고 지저분하게라도 물고 늘어지는 것이 맞긴 했다.
“그런데 뭘 해야 하지?
차라리 달리기? 우리 애들 중에 전국 체전에 나갔던 녀석이 있지 않나?”
“아예 제대로 된 유도나 태권도는 어때?
이런 막 싸움 말고 정식 시합 룰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지만 춘섭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단순히 몸으로 하는 거로는 쉽지 않아 보여.
이렇게 유치하게 나가는데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는 걸 선택해야 할 거야.
아슬아슬하게 우리가 이겨봐야 그 녀석 기만 살려주는 거밖에는 안 될 테니.
우리가 이미 1패를 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야지.”
춘섭의 말이 확실히 맞았다.
이미 1패를 하고 있는 중이니 압도적으로 이겨야 상대에게 위압감(?)이라도 줄 수 있으리라.
“아. 양궁.
몸 쓰는 걸 다 잘해도 도구를 쓰는 건 경험이 없으면 어렵지.
최 원로 아들이 지금 양궁 국대 코치로 있지 않나?
한때 국대 상비군으로 있었고 말이야.”
“오호. 그거면 무조건 이길 수 있겠군.
당장 연락해 봐.
그래도 바쁜 사람이니 우리 마음대로 부를 수야 있나.”
그리고 잠시 후.
상대도 아리 재단의 남자는 맞는지 설아의 남편감 검증에 자신이 필요하다면 무조건 도와줄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이렇게 민수의 다음 테스트가 결정되었다.
아리 재단의 남성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자신했다.
이번에는 자신들의 구겨진 자존심도 회복하고 우리가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라는 걸 분명히 알려줄 수 있어 보였다.
“네? 두 번째 테스트요?”
“그렇네. 우선 자네의 싸움 실력이 작은 아가씨를 충분히 지켜 줄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정말 훌륭했어.
하지만 아직 안심되지 않는 건 사실이야.
한가지 테스트를 더 하고 싶네.
만약 무서우면 거절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네.
뭐… 우리의 인정을 완벽하게 받지는 못하겠지만 그게 사는 데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니까.”
민수는 춘섭의 말에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혹시나 했던 일이라 크게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차라리 이왕 이렇게 된 거 무조건 완벽하게 인정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리는 춘섭의 말에 조금 자극되기도 했고 말이다.
춘섭도 자신들이 구차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저런 식으로 자존심을 긁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떤가 자신이 이기면 되는 거였다.
“좋습니다. 어르신. 하죠.”
그렇게 민수와 아리 재단 남자들의 2차전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