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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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사인회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이제 영화 흥행의 성적표가 점점 정확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2월 중순이 넘어서며 슬슬 소강상태로 들어선 “Shadow returnS”의 한국 관객 수는 2123만.
처음 배우들이 기대했던 대로 두 편의 영화가 모두 2천만 관객을 넘어선 것이었다.
개봉 시기가 좀 늦은 해외의 경우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흘러가는 분위기를 봤을 때 예상의 뛰어넘는 대박임은 분명해 보였다.
당연히 언론에서도 난리가 났다.
연일 대서특필되고 인터뷰 요청이나 방송국의 출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윤 엔터 배우들은 연말 시상식까지 소소한 스케줄만 소화하며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다만 아무런 스케줄도 소화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 수연이 출연하는 “헤드샷”에만 나가 감사 인사를 전달하기로 했을 뿐.
어차피 나갈 거면 차라리 수연의 체면이라도 살려주자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말로는 휴식이지만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리라.
올해가 가면 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갈 생각들이었으니 말이다.
배우들이 이것 저곳에 얼굴을 팔고 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음 작품을 빠르게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점점 연말 시상식이 다가오는 시기.
요즘 윤 엔터 직원들은 기대감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어쩌면 소속사에서 처음으로 청룡 영화제 대상 배우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작년에 정윤숙이 대상을 받았으니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은퇴를 앞둔 윤숙과 앞으로도 한참 연기 인생을 이어갈 젊은 배우는 완전히 다른 존재.
확실히 그 의미와 무게가 달랐다.
“와. 그래도 내가 드라마에서는 두 번이나 대상을 탔는데 그때랑은 너무 분위기가 다르잖아?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냐?
우리 드라마 무시하니?”
자신이 드라마 대상의 후보로 물망에 오를 때와는 너무 다른 분위기에 태준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태준 자신도 영화제의 대상과 드라마의 대상은 무게감이 좀 다르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드라마 대상은 그야말로 그해 가장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의 주연 배우에게 주어지는 상이었지만 영화제의 대상은 여러 가지 판단기준을 다 충족시켜야 받을 수 있는 상이었으니까.
아니면 정말 충격적인 진기록을 세우거나.
그래서 태준은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경력이 짧은 민수가 받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편의 영화가 다 2천만을 넘기는 순간 마음을 비웠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솔직히 이건 누가 와도 다시 이루기 힘든 업적이었으니 위원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반면 소속사 분석팀은 차라리 태준의 입상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했다.
태준이 민수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 것이지만 2편에서는 거의 주연급 활약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상당한 임팩트가 있었다는 거였다.
게다가 자신이 따로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도 흥행사에 유의미한 기록을 남겼으니 결국 올해 가장 유망한 영화 3편에 모두 출연한 셈.
그리고 재작년에 남우 주연상을 받으면서 이미 경력에서도 신인상만을 수상했던 민수보다 유리했다.
그러니 입상 경력과 연기 경력을 생각보다 중시하는 위원회가 판단하기에는 민수보다 태준이 적격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는 예상도 충분히 일리 있는 분석이었다.
물론 윤 엔터의 배우들이 대상을 맡아 놨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올해 흥행한 영화 중에 1500만을 넘는 영화가 무려 3편이나 더 있었으니까.
작년에 흥행작 기근을 겪은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
그러니 이번에도 재작년처럼 기대만 하다가 다른 배우가 채어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물론 성적 상으론 윤 엔터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가 확실히 더 유리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영화제가 개최되기 하루 전.
배우들은 느긋하게 백호 가요제를 시청하고 있었다.
설아가 입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집에서라도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설아가 이번에 뭐라도 받긴 할 거라는데?
아직은 팬덤에 밀려서 올해의 앨범은 좀 무리라도 본상이랑 최고 OST 상, 그리고 음원 차트상은 거의 유력하다네?”
백호 가요제는 상에 아주 후한 편이었다.
극성인 아이돌 팬들 때문이었는데 그래도 올 한해 가장 두드러지는 성과를 보인 10팀에게 주어지는 본상과 올해 최고의 인기를 누린 가수에게 주어지는 올해의 앨범상이 진짜배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설아가 솔로 디바로 본상을 차지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와. 본상까지요?
그건 좀 대단하네요.
노래를 진짜 잘한다 싶긴 했는데 저렇게 금방 떠버리다니….”
가수에 꿈을 꾸다 배우가 된 소희는 수연의 말을 듣자마자 감탄을 터트리며 부러워했다.
배우가 된 것이 불만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가수에 대한 미련이 조금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냥 부러운 정도로 끝내기로 했다.
설아의 노래를 직접 들어 본 소희는 그녀의 재능이 자신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이미 인정한 지 오래였으니까.
아마 설아가 노래를 배우는 장면을 지켜보지 못했으면 자신이 가수로서 가망이 없다는 걸 쉽게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은 소희도 차라리 자신을 단념시켜준 설아에게 고마울 정도였다.
만약 안 그랬으면 자신도 계속 가요계에 미련이 남아 연기에만 완전히 집중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무대를 2개나 가진다더니 여러 부분에서 입상할 가능성이 있어서였나 봐요.
대단하긴 하네요.”
민수도 설아가 가수로 잘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뿌듯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전생처럼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하는 게 아니라 노래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그때는 대체 왜 그랬을까?
지금의 민수로서는 전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가요제가 이어지는 가운데 설아의 첫 번째 무대가 시작되었다.
바로 이카루스의 태호와의 댄스 스테이지.
설아는 태호와 함께 현란한 춤 솜씨를 과시하고 있었는데 댄스 가수가 아니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훌륭한 몸놀림이었다.
“설아는 춤도 잘 추더라고요.
제가 어색한 동작만 몇 가지 수정해 줬더니 그걸 바로 따라 하는 거 있죠?”
노래 실력은 평범하지만 춤 솜씨만은 범상치 않은 소희는 설아가 무대에서 춤을 춘다고 하자 춤에 대하여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조언을 바로 받아들여 적용하는 설아의 모습에 감탄했었고.
그때 소희는 설아가 아이돌로 데뷔했어도 충분했을 거로 생각했다.
물론 그러기에는 설아의 가창력이 좀 아깝긴 했지만 말이다.
“설아가 몸 쓰는 건 다 잘해.
옛날부터 운동신경 하나는 알아줬거든.
이해력도 괜찮고.”
다들 설아의 춤에 감탄하고 있었지만 민수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춤추는 두 남녀의 접촉이 생각보다 진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평범한 커플 댄스일 뿐이었지만 민수의 눈에는 좀 그랬다.
“하… 저런 옷을 입고 저런 걸 하면서 나한테 말도 안 하려고 했다고?
이거 안 되겠는데….”
“민수 왜 그래?
저 정도면 그냥 평범한 커플 댄스구만.
크게 노출도 없이 저 정도면 옷도 얌전한데 너 너무 그러면 미움받는다?”
수연이 옆에서 핀잔을 주자 민수도 애써 표정을 바로 했다.
하지만 괘씸한 마음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민수는 자신도 나중에 작품에서 키스신이 있을 때 설아에게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민수가 취할 수 있는 사소한 복수는 이 정도뿐.
물론 설아도 나중에 키스신이 있을 때 민수에게 복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민수를 심통 나게 만들었던 무대가 끝나고 설아는 OST 상과 음원 차트 상을 받았다.
윤 엔터 식구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본상과 올해의 음원 상을 남기고 설아의 단독 무대가 있었다.
민수는 무슨 노래를 부를지 기대하며 티브이만 주시하고 있었고.
아무래도 자신에게 비밀로 한 이유가 이 무대인 거 같은 확신이 있었으니 기대되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어…. 처음 듣는 노래네요. 이거 신곡인가?”
간주가 나오자마자 민수는 바로 기존 발매 곡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설아가 발표한 모든 노래를 휴대폰에 저장해 놓고 수시로 듣는 팬으로서 그녀의 모든 노래에 익숙했으니 말이다.
[그대를 처음 만난 그날을 아직도 기억해요.
그때 멍하니 날 바라보고만 있었죠.
그냥 내가 너무 예뻐서 그랬던 건가요?
아니면 혹시 그대도 내가 마음에 들었나요?]
통통 튀는 발랄한 느낌의 이 노래는 왠지 사랑 노래 같았다.
가사는 조금 유치한 듯했지만 설아의 달콤한 목소리가 그 부분을 귀여움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노래가 계속 진행될수록 민수는 할 말을 잃어 가고 있었다.
왜냐면 저 가사는….
“허… 소중한 사람을 돌려주고 계속 꿈꾸게 해준….”
“무뚝뚝한 듯하지만 가슴이 따뜻한 남자….”
“곱상한 얼굴로 멋진 기사처럼 자신을 지켜주는 남자…”
“때로는 아빠처럼 보살펴주고 언제나 친구처럼 같이 있어 주는….”
“날 위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어주는….”
“이거 왠지 익숙한데….”
“이거 민수네.
민수를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야.
와. 저거 작사가 설아라고 했지? 세라가 설아니까.”
그렇다.
설아의 노래가 가리키고 있는 건 100% 민수였다.
소속사 식구들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들을 나열하고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소희와 수연이 하나하나 지적하며 짓궂게 자신을 바라보자 민수도 붉게 달아올라 화끈해진 얼굴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저 노래는 결국 자신에게 고마워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노래였다.
유치하고 풋풋한 가사가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 같아 더 가슴을 울려왔다.
“쟤가 저거 때문에 더 바빴어.
곡을 아예 하나 새로 만들었으니 바쁠 수밖에.
전에 민수가 캐묻는 바람에 어찌나 당황했던지.”
“야. 너 그럼 나한테 사기 친 거야?
분명 모른다고 했잖아?”
태준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민수도 할 말이 없었다.
어쩐지 그때 쉽게 분다 했더니 껍데기만 보여주면서 알맹이를 숨긴 꼴이었다.
하긴 그래서 설아도 태준보다 리온을 더 먼저 의심했던 건가?
태준이 불었으면 자신이 그녀의 자작곡에 더 신경 쓸 것이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그 틈에 거래하는 척하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태준도 참 대단한 순발력이었다.
확실히 태준이 그냥 이야기해서 미리 알고 있었다면 오늘처럼 묘한 감흥과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설아의 첫 자작곡이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곡이라니.
물론 사람들은 전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이것보다 감동적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충격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신곡 공개 무대를 마치고 본상을 수상한 설아가 폭탄 발언을 터트린 것이었다.
[….. 마지막으로 제가 가수가 되기 전부터 저의 노래를 응원해 주고 저를 아껴주신 사랑하는 민수 오빠에게도 꼭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오빠! 노래 들었죠? 이따 봐요!!]
“……”
“워…. 설아. 상여자네.
저기서 공개적으로 선언을….”
설아가 대놓고 민수에게 사랑한다는 소감을 발표한 것.
민수는 그저 망연자실한 얼굴로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설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민수를 바라보며 동료 배우들은 그저 키득거리기만 했는데 열애 사실로 번질 것이 뻔한 저 상황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어 보였다.
어쩌면 공개 연애에 대하여 걱정하는 건 민수뿐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거 걱정해야 하는 일 같은데 다들 너무 무심한 거 아니에요?”
결국 민수가 배우들에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물론 아무런 효과가 없었지만 말이다.
“글쎄. 설아가 알아서 하겠지?
걔가 그렇게 생각 없이 사는 애는 아니거든?”
“아이돌도 아닌데 뭐 어때요?
연예인이지만 살다 보면 연애도 하고 그런 거죠.
배우라면 원래 작품마다 열애설 정도야 달고 사는 거니까요.”
“아니. 그래도….”
쿨한 태도의 소희와 수연.
그리고 뒤이은 수연의 말은 민수뿐만 아니라 태준까지 할 말 없게 만들었다.
“솔직히 그냥 숨기는 것보다 저게 낫지.
우리 맹추는 저것도 못 하고 맨날 숨어서 날 만나고 있어.
설아가 오빠보다 훨씬 낫네. 쯧쯧.”
“아니 그건….”
잠시 아무런 말도 못 하던 태준은 정신을 차리고 타깃을 민수에게 돌렸다.
원래 이 이야기의 시작은 민수였지 않은가?
자신까지 이상하게 취급받는 건 정말 사양이었다.
“이봐. 친구. 지금 자네가 걱정해야 할 건 설아의 열애설 따위가 아니야.
지금 이곳 바로 아래에 이 소식을 접하고 분개할 게 뻔한 분이 한 분 계시지.
그리고 그 꼬장은 자네가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어!”
“킥. 민수야 수고해. 큭큭”
태준의 지적에 수연이 웃음을 터트리자 민수도 아차 싶었다.
그리고 이내 깊이 한숨을 내 쉬며 고개를 저었다.
태준의 말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민수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민수보다 더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윤 엔터의 수장 윤 대표 되시겠다.
옆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는 민 여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