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311화 (311/325)

# 311

6

“오. 이게 누구야? 바쁜 아이돌님이잖아?

그간 안녕하셨어?”

닥터 C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외눈 안경에 올백 머리로 꾸미고 온 리온도 민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물론 지금까지 바쁜 것에 대한 엄살도 빠지지 않았지만.

“하하. 형님. 잘 지내셨어요?

아후. 진짜 바빴어요.

왜 이렇게 바쁜 건지 잠도 제대로 못 잤다니까요.”

“그랬겠지. 영화 촬영 때문에 그룹 활동이 밀린 거였잖아.

아직은 가수가 본업인데 본업에 소홀히 할 수 있나.”

“그러게요. 팀원들이 저만 기다린 거라 좀 미안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얼추 다 정리하고 와서 기분이 좋긴 하네요.”

영화 촬영 때문에 앨범 발매 일까지 미뤄졌으니 그 뒤 일정이 더 빡빡할 수밖에.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리온의 연기 활동을 지원해주는 날개 엔터의 뚝심도 참 알아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바쁘게 중국 활동을 마치고 국내로 복귀하자마자 이런 이벤트에 참여해준 리온의 성의도 대단하고 말이다.

“어쨌든 잘 왔어.

힘들 텐데 네가 수고가 많네.”

“에이. 그래도 이런 일에 빠질 수야 있나요.

어쩌면 다음 영화에도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는데요.”

리온이 이야기하는 다음 영화가 아마 지금 수연이 준비 중인 그 영화인 거 같았다.

닥터 C가 쉽게 사라질 인물로는 안 보였으니 어쩌면 리온이 계속 나오는 게 아닐지 모르겠다.

지금 리온의 분위기를 보니 앞으로도 계속 나올 생각으로 보였으니까.

“회사에서는 별말 안 해?

아무래도 아이돌이 연기하기에는 좀 안 좋은 배역이었는데.”

한류 아이돌의 정점인 이카루스의 리더가 그런 미묘한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연기하다니.

이미지 변신을 하고 싶다는 리온에게 자신이 추천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광기에 물들어 있는 데다가 어떤 의미에서는 악역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배역이었니 이미지상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배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와는 완전 다른 연기를 선보일 기회를 얻은 리온은 많이 즐거워 보였지만 한번이 아니라 계속 출연한다고 하면 회사 차원에서는 좀 난감할 수도 있어 보였다.

“뭐, 저희 팀이 그런 거 신경 쓰는 팀인가요?

그럴 시기는 이미 지났죠.

회사에서도 노터치니까 제가 하고 싶으면 그냥 하는 거예요.

사장님은 영화도 재미있고 제 캐릭터도 개성 있어서 오히려 좋다고 하시던걸요.”

아무래도 날개 엔터는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자유로운 회사인 모양이었다.

그 사장 역시 마찬가지고.

“아. 그리고 이번에 형수님이 저희 팀에 태호랑 같이 가요제에서 댄스 퍼포먼스를 하기로 했는데 들으셨어요?

그거 때문에 며칠 동안 저희 회사에 연습하러 오시더라고요.”

여기서 또 다른 정보를 얻게 된 민수.

아무래도 설아의 듀엣 무대는 노래가 아니라 댄스 퍼포먼스인 모양인데 그 대상이 태호라면 아마래도 섹시 댄스 퍼포먼스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 그래서….”

자신에게 비밀로 하고 은근슬쩍 연습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예상이 맞았나 보다.

그래도 하필이면 태호라니.

민수는 예전에 설아에게 번호를 물어봤던 태호의 이야기가 아직 기억에 선명했다.

물론 그때는 자신이 설아랑 연인관계가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태호랑 같이 무대를 선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비밀로 하다니.

민수는 이 발칙한 자신의 애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리온은 당연히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던 민수가 전혀 모르는 분위기이자 자신이 괜히 말했나 싶어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섹시 댄스 퍼포먼스라 분위기가 좀 끈적하긴 하지만 크게 수위가 높다는 생각은 안 들어서 설아가 비밀로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리온은 자신이 먼저 말한 것이 나중에 큰 문제로 번지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하하. 모르셨어요? 이거 제가 괜히 말했나요?”

“아. 아냐. 대충은 알고 있었어.

그거야 뭐 설아가 알아서 하겠지.

가수가 무대를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인데.

내가 참견할 이유가 없잖아.”

민수는 애써 태연하게 반응했다.

애인의 공적인 일까지 참견하는 못난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때에 맞춰 설아와 태준이 다가왔다.

착용의 어려움 때문인지 태준은 이미 인형 옷을 입고 있었다.

뭔가 흉측하긴 한데 애잔하고 귀여운 느낌이 드는 태준의 몸놀림에 폭소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지금까지 약간 기분이 상해있던 민수도 마음을 조금 풀 수 있었다.

민수는 이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 놓으면 자신이 우울할 때마다 보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 거 같았다.

옆을 보니 리온도 애써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태준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자 바로 웃음이 터져버렸으니까.

“야. 그냥 웃어 인마.

그게 더 기분 나쁘잖아.”

“풋! 아. 죄송해요.

그 옷… 생각보다 위력이 대단하네요.

촬영장에서 봤을 땐 그냥 좀 특이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걸 밖에서 보니….”

그렇게 잠시 웃는 동안 행사의 준비가 끝났는지 스태프들이 배우들을 찾아왔다.

드디어 시작된 팬 사인회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물론 지금 영화의 인기를 생각했을 때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많은 인파는 배우들을 당황하게 했다.

남녀 불문하고 많이 모여든 팬들.

하지만 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건 태준의 여성 팬들이었다.

민수는 자신이랑 맨날 엉뚱한 짓이나 하는 태준이 여성들에게 이 정도로 인기가 있는지는 몰랐다.

아무래도 은우나 리온의 여성 팬이 가장 많이 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자신이 태준을 너무 무시했었나 보다.

“꺄~ 태준 오빠! 귀여워요!”

“그거 입을 걸 보려고 학교도 빠졌어요!”

“오빠 이쪽 보고 한 번만 웃어주세요!”

그런데 분위기를 보니 태준의 팬들은 태준의 인형 옷에 상당히 긍정적인 것으로 보였다.

팬으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스타의 특별한 서비스가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태준도 팬들이 이렇게 좋아해 주니 기분이 많이 풀린 듯 보였다.

사진을 찍겠다는 팬들을 위해 저렇게 멋진 포즈까지 취해 주는 걸 보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신기한 일은 설아에게 여성 팬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거였다.

소희에게 사인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젊은 남성인 것을 생각하면 좀 특이한 일이긴 했다.

예전에 “용의 울음”이 끝나고 비키니 사인회 때 설아에게 사인받은 팬들이 거의 남성 팬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으리라.

특히 설아보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성이 설아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건 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설아가 확실히 나이보다 분위기가 성숙한 면이 있지만,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하긴 예전에 얼핏 소희나 수연이 설아한테는 좀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고 했었는데 그거랑 연관이 좀 있는 거 같았다.

막상 큰 언니인 수연이 오히려 설아에게 완전히 잡혀 사는 거 같기도 했고.

그리고 민수에게도 많은 팬이 사인을 받아갔다.

예전에 거의 남자들만 사인을 받아가는 것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왠지 남성 팬들이 더 많아 보였다.

“형님. 여기에 운수 대통하라고 좀….”

“합격기원이라고….”

“올해는 애인 생기라고 좀….”

물론 이상한 요구를 하는 팬들이 이상하게 많기는 했다.

마치 자신을 무슨 토템이나 부적같이 생각하는 그런 남성 팬들 말이다.

하지만 무슨 어려운 일도 아니고 기쁘게 원하는 문구를 적어 줬다.

자신이 조금 수고해서 팬들이 마음이 풍족해진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었으니까.

확실히 팬 미팅의 백미는 소희였다.

이번 영화의 최고 수혜자 중 한 명인 소희에게는 정말 엄청난 남성 팬들이 모여들었으니 말이다.

이제 한창 팬 덤이 형성되는 시기이니만큼 다음 작품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소희도 확실히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팬 사인회를 성황리에 마치고 민수는 돌아가는 차 안에서 오랜만에 설아와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민수의 마음은 좀 오묘했지만 말이다.

“헤헤. 요즘 너무 바쁘다 보니 이렇게 같이 있는 시간도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우리 애인님이 요즘 좀 바쁘시네.

뭐 때문에 이렇게 바쁘실까? 우리 애인님은.”

민수의 반응이 조금 삐딱하다고 느껴서일까? 조금 위기감을 느낀 설아는 민수에게 슬쩍 안기며 칭얼거렸다.

“에이~ 우리 오빠 삐져떠요?”

조금 무거운 분위기를 잡아보려던 민수는 설아의 입에서 귀여운 혀 짧은소리가 튀어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귀여움이었으니까.

그리고 민수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자 설아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여자가 계속 매달리기만 하면 매력 없대요.

저희는 거의 항상 같이 있었으니까요.

이건 저 나름의 밀당?

원래 오랜만에 보면 그만큼 더 반갑잖아요.”

민수는 자신이 바쁜 것에 대하여 엉뚱한 변명을 하는 설아에게 피식 웃으며 솔직히 이야기했다.

쌓아 놓아봤자 나중에 싸우기밖에 더하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자신이나 설아나 서로에게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더 나으리라.

“백호 가요제에 초대받았다더라?

요즘 그거 때문에 좀 바쁘다지?”

“어? 그걸 어떻게…. 아. 리온 오빠가…..”

사실은 태준에게 먼저 들은 이야기였지만 민수는 굳이 그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설아도 자신의 오빠를 생각 보다 믿었는지 이 정보의 출처가 리온이라고 확신하는 듯 보였다.

자신의 오빠만 입 단속하면 문제없을 거로 생각했던 일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구멍이 뚫리자 설아도 조금 난감한 표정이었다.

미리 그쪽을 입 단속하지 못한 건 자신의 실수가 맞긴 했지만 오자마자 그 이야기부터 꺼내다니.

설아의 머릿속에서 리온의 신용도가 한 단계 내려갔다.

“그런데 그 상대가 태호 씨라지?

댄스 퍼포먼스? 음…..

태호 씨면 예전에 너한테 번호 받아가려고 했던 분 아냐?”

“잉? 아…. 그랬… 었죠?”

설아의 반응은 미묘했다.

마치 민수가 그것을 지적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표정.

민수는 설아가 자신에게 미리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가 댄스 퍼포먼스라고 생각했는데 설아의 반응을 보니 왠지 그게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이유일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 태호 씨가 그랬었죠?

사실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그 퍼포먼스는 뭐…. 그냥 한번 그런 걸 해보고 싶어서요.

그래도 제가 운동신경이 좋아서 그런지 빨리 배운다네요.

오빠도 나중에 보면 놀랄걸요?

오빠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 제가 그건 장담할게요.”

설아는 댄스 퍼포먼스에 대한 걸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마치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거처럼 그렇게 이야기하자 민수도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태호가 자신에게 번호를 달라고 했던 일조차 잊고 있는 거처럼 보였다.

설아 정도 되면 워낙 많은 남자들이 찝쩍거려서 그런 건 특별한 일 축에도 못 드는 것일까?

하지만 정말 댄스 퍼포먼스가 아니라면 설아의 주된 관심사는 솔로곡 무대라는 건데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민수가 골똘히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다는 듯 설아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헤헤. 오빠 그거 질투예요?

오빠답지 않아서 왠지 더 좋네요.

뭐 댄스가 좀 끈적하긴 한데 그건 그냥 비즈니스고 제가 설레는 사람은 오빠뿐이거든요?

제가 생각보다 지조가 좀 있어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흠흠. 질투…. 라면 질투긴 하네.

전에 너한테 대쉬했던 남자랑 같이한다니 왠지 마음이 좀….”

민수는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설아가 다른 남자랑 섹시 댄스를 선보인다니 좀 마음이 불편한 건 맞았으니까.

그것도 예전에 설아에게 호감이 있던 남자라서 더욱더 그랬고.

하지만 지금 신경 쓰이는 것은 설아의 반응이었다.

설아의 행동에서 가요제의 목적은 솔로 무대였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직접 물어보면 속 시원히 말해 주려나?

물론 지금까지 설아의 행동 양식을 생각해 보면 절대 그냥 말해 줄 리가 없었다.

설아는 민수가 자신에게 질투심을 보였다는 것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 배시시 웃고 있었다.

가요제에 관하여 묻던 민수의 모습에 움찔했지만 민수의 반응을 보니 아직 민수의 정보력(?)이 그 정도에까지 미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태호랑 같이하는 퍼포먼스에 평소답지 않게 질투까지.

깊은 사이가 되고 나니 좀 목석같은 민수도 연인다운 짓에 거리낌이 없었다.

궁금해하는 모습에 입이 근질거렸지만, 미리 이야기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그날의 즐거움은 그날을 위해 남겨두기로 했다.

그렇게 민수에게 의문만 남기고 그날의 만남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물론 그 뒤로도 설아가 계속 애교를 부려 민수의 마음은 완전히 풀어줬지만 의문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