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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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준수 녀석.
그렇게 본격적으로 움직일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어쩌다 보니 윤 엔터 전속 시나리오 작가처럼 되어버린 준수는 농담처럼 이야기하던 쉐도우 시리즈의 후속편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이 단순히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명의 스토리 작가와 웹툰 작가를 섭외해 자신이 예전부터 구상해 왔던 “월드 오브 타페리아”라는 세계관 안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뽑아내기 시작한 것.
쉐도우의 이야기도 그것들 중 단지 한 가지일 뿐이었다.
영화가 먼저 상영되긴 했지만, 그 토대가 되는 근간을 웹툰이나 소설에서 마련해 보자는 것이었는데 이 일이 어느 정도까지 성공할 수 있을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지만, 만약 크게 성공한다면 앞으로 준수가 구상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영화나, 경우에 따라서는 드라마로까지 제작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정말 어렵고 드문 경우이긴 했다.
하지만 준수는 이 일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기로 했는지 이번 영화를 제작하며 얻은 이익 전부를 이곳에 투자하고 있었다.
하긴 사람을 여럿 써야 하는 일이었으니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준비한 첫 작품이 바로 쉐도우 시리즈의 외전 격인 “얼음 여왕 프로즈나” 였고 수연을 주인공으로 기획된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벌써 나온 것만 봐도 준수가 이 일을 하루 이틀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이렇듯 준수가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 영화 제작진들도 그 흉물스러운 인형 옷들을 소중히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준수가 시나리오를 완성하면 그 시나리오를 태원이나 찬진에게 가져갈 가능성이 가장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시 영화가 제작되면 그 인형 옷들은 다시 요긴하게 쓰일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잖아?
지금 그 시나리오에 꽂혀서 수연 선배가 열일 하고 있는 거 아냐?”
“흐흐. 그건 그렇지.
하루에 운동만 4시간. 거기다 따로 액션 연기 훈련까지 병행하고 있어.
맨날 들어앉아서 게임만 하던 수연이가 달라지고 있단 말이지.
아까도 우리를 비웃고 가긴 했지만 지금 헬스장에서 땀 쭉~빼고 나온 거거든.”
태준은 그러면서 조금 통통했던 수연이 점점 더 예뻐지고 있다면서 음충맞게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평소에 가정적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좀 게으른 면이 있는 수연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 썩 마음에 든 얼굴이었다.
그렇게 흐뭇해하는 태준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애인이 생각났다.
요 아가씨는 요즘 뭘 하고 있는지 도통 만나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말 돌리는 솜씨는 또 얼마나 좋은지 뭐라고 묻기도 전에 잘도 빠져나갔다.
“그런데 설아는 요즘 뭘 하는데 얼굴 보기가 힘들어?
혹시 자네는 뭐 아는 거 없어?”
“아? 설아? 그 녀석 요즘 좀 바쁜 거 같더라고.
사실 집에도 별로 안 들어와.
재단 일 배운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그 이번에 백호 가요제에도 초청….아.
이거 비밀이랬는데.”
아무 생각 없이 말하던 태준은 아차 하며 말을 주워 담아 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민수가 다 듣고 상황을 파악했으니 말이다.
재단 일을 배운다는 것은 이미 설아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나중에는 자신이 재단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싶다고 했던가?
이미 재단 사람들이 설아를 따르는 것을 보니 그건 크게 문제가 될 거 같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은 민 여사가 건재하니 상당히 시간이 지난 후에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뒤에 이야기는 전혀 생소한 이야기였다.
최근에 배우보다 가수로 더 활동했던 설아는 올해에만 정규 앨범과 싱글 앨범 그리고 OST 앨범까지 발매했으니 제법 많은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방송 활동을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음악 방송은 주기적으로 참석했고 음원은 언제나 큰 인기를 끌었으니 가요제에 초청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다만 문제는 왜 이 일을 자신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느냐였는데….
모르긴 몰라도 설아다운 발칙(?)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후후. 이거 윤 배우.
요즘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사는 거야?
그러고 보니 예전에 촬영 중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지 아마?
난 그 일을 아직 설아에게 얘기하지도 않았다고.
그런데 비밀이 두 가지가 되어버렸네.
이거 어쩔 거야?”
민수가 뒷골목의 왈패 같은 비열한 표정을 지으며 태준에게 으름장을 놓자 태준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금 민수의 비열한 표정을 보니 금방이라도 설아에게 달려가 이야기를 흘릴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평소에 협박 좀 해본 것 같은 리얼함에 당황하게 된 것.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요즘 이상할 정도로 예민한 그 괴수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정말 예상하기 힘들었다.
태준은 어쩔 수 없이 협상으로 우선 위기를 넘겨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평소에 항상 태준에게 재능 낭비한다고 한탄했던 그 행동을 지금 민수가 하고 있는 셈이었다.
“후. 좋아.
이럴 때는 거래지.
원래 사람이란 게 주고받는 거 아니겠어?
저번처럼 그런 불공평한 거래는 우선 집어치우고.
어때 생각 있어?”
태준도 학습 능력은 있는지 저번에 설아에게 비밀을 지켜 준다고 해놓고 말장난을 친 민수에게 조용히 경고했다.
이번에도 그런 수작질을 부리면 참지 않겠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
설아의 행동에 궁금증을 느낀 민수도 순순히 거래에 임하기로 했다.
“좋아. 그런 장난은 치지 않지.
비밀 절대 보장.
그럼 자네가 알고 있는 걸 풀어놓아 봐.
대체 무슨 일이야?”
민수가 OK 하자 태준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슬쩍 풀어 놓기 시작했다.
“사실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이번 백호 가요제에서 설아가 두 개의 무대를 꾸미게 되었다나 봐.
개인 스테이지와 특별 스테이지라나?
특별 스테이지는 다른 가수랑 듀엣으로 한 곡 부르고 개인 스테이지에선 자신의 곡을 하나 부를 거라는데 요즘 그걸 연습하는 모양이야.
나도 아는 건 이걸로 끝.”
태준의 이야기에 민수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알겠는데 왜 자신에게 비밀로 했는지가 전혀 밝혀지지 않아서였다.
혹시 듀엣 무대에서 남자 아이돌과 진한 커플 댄스라도 추는 건가?
민수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겨우 이 정도였다.
“뭐. 좋아.
다른 특별한 건 없다는 거지?
나중에 무대를 확인하면 알 수 있겠지.
이번 거래는 이걸로 마무리 짓자고.”
너무나 순순히 넘어가는 민수의 모습에 이젠 오히려 태준이 조금 이상할 정도.
평소라면 또 무슨 뒷수작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더 의심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각성한 민수라고 해도 항상 장난만 치는 것은 아니었으니 가끔은 정상적인(?) 거래가 오고 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오. 웬일로 이렇게 스무스하게?
역시 강호의 도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구려. 끌끌.”
한차례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해서인지 기분 좋게 웃으며 허튼소리를 내뱉는 태준에게 민수가 슬쩍 초를 치고 들어갔다.
아무래도 자신의 친구가 본제를 완전히 잊은 것으로 보여서였다.
물론 자신은 애인의 행태에 불만이 가득한데 친구가 너무 기분 좋아 보여 얄미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된 거니 우리 윤 배우는 인형 옷을 입을 준비를 하면 되겠습니다.
이제 바로 내일이지? 팬 사인회가?”
“악. 잊고 있었어.
제길. 정말 벗어날 길이 없단 말이냐?”
민수 덕분에 내일 자신이 겪을 수모가 다시 떠오른 태준은 이내 급격히 침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답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는지 점점 달관한 얼굴이 되었다.
“하. 그래. 어쩔 수 없지.
할 땐 해야 하니까. 후….”
실시간으로 급격하게 변하는 태준의 표정 변화가 재미있었던 민수는 그저 옆에서 웃으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혼자서 각오를 다지던 태준은 제풀에 지쳐 탁자 위에 널브러졌다.
아무래도 심력을 너무 낭비해서 그런 거 같았다.
그렇게 널브러져 있던 태준은 그냥 넋두리하듯 넌지시 수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나누던 대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지만 민수도 조금은 궁금했던 그런 이야기였다.
“후. 사람들은 이래저래 말이 많지만, 솔직히 난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어차피 영화는 잘 됐고 상이야 뭐. 아무려면 어때?
내가 윤태준인데 그깟 상 좀 못 받는다고 내 가치가 낮아지는 건 아니잖아?
주는 쪽에서 알아서 줄 만한 사람 주겠지. 안 그래?”
왠지 태준답지 않은 태도에 민수도 조금 의외였다.
전에 대상 수상에 실패한 이후에는 생각보다 많이 마음 쓰지 않았던가.
불과 2년 사이에 생각이 많이 달라진 모양인지 확실히 저번보다는 더 어른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 역시 태준은 태준이구나 하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말이야.
솔직히 저번에 남우 주연상을 받을 때도 발표 전까지는 이런 생각을 했었단 말이지.
그런데 막상 딱 하고 못 받으니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생각대로 괜찮지는 않더라고.
그때 내가 어땠는지는 네가 눈앞에서 지켜봤으니 잘 알 테고.
그래서 내가 어떨지는 나도 장담할 수가 없네.
왠지 내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또 받을 것도 같고.
솔직히 내가 받아도 이상한 건 아니잖아?”
말은 다르게 했지만 결국은 욕심이 나긴 한다는 말이었다.
2년 전과는 다르게 태준도 이제 제법 경력이 쌓였고 대상을 받을 가능성이 보이긴 했다.
걸리는 문제가 있다면 그건 민수 때문일 것이다.
위원회에서도 민수가 찍은 영화가 갑자기 너무나 히트를 쳤고 심지어 북미에서도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으니 이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위원회에서 지금까지 해왔던 거처럼 일관적인 태도로 입상자를 결정하느냐 아니면 민수를 완전한 돌연변이로 인정하고 이례적으로 수상자를 결정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풋. 야. 그냥 솔직히 받고 싶다고 하자.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고 있어?
받으면 좋은 거지.”
태준도 민수가 웃으며 말하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받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래그래. 받고 싶다. 아~주 받고 싶다.
그래도 뭐 네가 받는다고 해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아.
좀 서운할 수는 있겠지만 받을만한 사람이 받는 거니까.
이번 영화가 북미에서도 대충 1억 불은 올렸다지?
솔직히 스티븐이 출연하긴 했지만, 태생은 한국 영화인데 이게 또 보통 일은 아니잖냐.”
태준도 확실히 그 부분을 생각하며 민수의 수상을 점치고 있는 듯 보였다.
민수도 태준의 말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건 그래.
사실 알 수 없는 거지.”
“그래. 만약 둘 중 누가 받아도 축하해주기 OK?
어쨌든 처음 있는 경사니까 축하해 주자고.
괜히 칙칙하게 상대 위한답시고 안 기쁜 척하지 말고.”
태준이 웃으며 말하자 분위기가 좀 훈훈해졌다.
하지만 민수는 왠지 모를 멋쩍음을 느끼며 말을 돌렸다.
왠지 소년 만화 같은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서였다.
“그래. 근데 그건 그거고.
내일 팬 사인회라는 건 잊지 마.
그게 먼저잖아?”
훈훈한 분위기에 초를 치는 민수의 말에 태준은 울컥해서 소리를 질렀다.
잠깐 잊고 있었는데 다시 내일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니까.
“야! 훈훈한 분위기에서 꼭 그 이야기를 해야겠어?
아후. 진짜. 그래. 내 꼭 기억하마.
내일 팬! 사! 인! 회! 한다고.
그것도 그 인형 옷 입고.”
민수는 울컥해 소리 지르는 태준을 보고 그저 웃었다.
내일 팬 사인회도 그렇고 나중에 있을 시상식도 나름 재미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다음 날.
태준이 오지 않기를 바라던 그날이 도래하고 말았다.
배우들은 각자 자신의 벤을 타고 약속된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연기했던 배역의 의상을 완벽히 준비한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게 없었다.
민수도 전투 시에 그림자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특수 의상을 입고 찍은 거고 평소에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연기했었으니까.
물론 설아와 소희의 의상은 그냥 입기에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을 정도로 몸에 밀착된 의상이긴 했지만, 예전에 입었던 비키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솔직히 태준을 제외하고는 다 정상적인 옷이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오늘 팬 사인회에는 윤 엔터 배우들 말고도 리온이 함께했다.
영화 촬영 직후부터 바쁜 스케줄을 소화했던 리온은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자 마자 바로 합류 의사를 전달해 왔다.
물론 같이 연기했던 배우로서 이벤트에 동참하겠다는 리온의 합류를 반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행사장에서 리온을 발견한 민수는 반가운 마음에 손부터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