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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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꾸웨민은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의 집무실이던 사장실을 나섰다.
그런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윗선인 둘째는 완전히 실각.
그리고 자신은 해임을 통지받았다.
그럼 이제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허망해하는 그에게 같이 해임을 통지받은 진룡 미디어 코리아의 임원들이 모여들었다.
물론 그중에는 박철우 이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장님. 이제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한 이사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황꾸웨민을 바라보았다.
“뭘 어떻게 돼? 망한 거지.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니 이제 다들 각자 알아서 해.”
하지만 그라고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겠는가?
황꾸웨민은 불퉁스러운 말투로 쏘아붙이고는 자리를 박차고 떠나갔다.
한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그렇게 말이다.
황꾸웨민이 떠나고 임원들은 난감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임원들 쪽으로 삼엄한 분위기의 남자 셋이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 박철우 씨?”
박철우 상무에게 다가간 세 남자는 서둘러 박철우를 둘러싸 퇴로를 막은 후 자신의 용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박철우 씨. 당신을 방화 교사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경찰인 듯한 한 남성이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동안에도 박철우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바로잡기 힘들었다.
너무나 당황해서였다.
반년이나 넘게 지난 일이라 이미 잊고 있었는데 어떻게 자신을 잡으러 왔던 말인가.
그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건을 무조건 해결하고 싶어 하는 한 남성이 있었고, 한국 경찰은 위에서 쪼아대는 사건은 어떻게든 해결한다는 사실을.
게다가 이 사건을 시작으로 수많은 공무원이 갈려나 갔으니 박철우에게 억하심정을 가진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쉽게 풀려날 일은 없을 것이다.
분명 사수 과정에서 지금까지 벌여온 모든 죄상이 낱낱이 밝혀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억울해 할 일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 자신이 벌여온 일들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렇게 세트장 대화재 사건은 모든 일을 사주한 박철우가 체포되면서 일단락되게 되었다.
정말 민수와 윤 엔터는 물론 한국 사회에까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대사건이 마무리된 것이다.
그 시각 윤 엔터에서는 윤 대표와 민 여사가 진룡의 제안을 받아 들고 고민하고 있었다.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고 자신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이었다.
“사장이 바뀌면서 일 처리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뀐 모양이네요.
이렇게 직접적으로 제안을 가져올 줄은 몰랐어요.”
“그렇군.
아무래도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게다가 진시첸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말이야.”
윤 대표는 “용명”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삼화의 위시춘 사장과 지금까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인의 풍모가 느껴지는 위시춘의 됨됨이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위시춘에게 전해 들은 중국의 분위기는 확실히 심상치가 않았다.
“아무래도 중국 쪽 미디어 그룹은 결국 조각조각 나누어질 모양이야.
하긴 그 거대한 땅덩어리를 3개의 그룹이 삼분하고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했지.
세 회장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영향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군.
그 충직한 위시춘 마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니 다른 임원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윤 대표는 최근에 위시춘을 만났을 때 회사가 알게 모르게 분열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삼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게다가 세 미디어 그룹에 눌려있던 수많은 연예 관련 회사들이 슬슬 고개를 쳐들고 있단다.
윤 대표는 진시첸이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그 일의 연장선이라고 파악했다.
거대한 진룡을 노리던 진시첸이 시국을 파악하고 결국 한발 물러나 한국에서 자신만의 회사를 꾸려나가려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 예전과는 또 다른 마음으로 다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진시첸도 뒤가 없으니 아마 분명 그럴 것이다.
“그래서. 당신 생각은 어떤데요?
진룡하고 손을 잡을 생각이신가요?
솔직히 이젠 진룡하고 굳이 손을 잡을 이유도 없지 않나요?
배우들도 다 자리를 잡았고, 진룡은 입지를 완전히 잃었잖아요?
그리고 소희도 이번 영화가 흥행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고요.”
민 여사의 지적은 입지가 좋지 않은 진룡과 굳이 같은 길을 갈 이유가 있냐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예전에 쌓였던 안 좋은 감정도 아직 해소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제 소희가 출연한 영화가 개봉하면 굳이 진룡의 손을 잡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었다.
아니, 영화의 기세를 봤을 때 거의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리라.
“글쎄. 이건 손을 잡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거 같군.
이 바닥이 적 아니면 친구.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곳은 아니니까.
난 이 제안이 적어도 기본적인 관계를 회복하자는 의도로 보여.
제작사는 제작사의 일은 배우는 배우의 일을.
아마 기본은 이게 아닐까?
적어도 상대 작품을 저격해 들어가거나 아니면 투자에 들어가서 억지로 배역을 바꾸는 양아치 짓은 하지 말자는 거겠지.
그리고 좋은 작품 있으면 자신들의 작품에도 들어오라는 러브콜이고.”
“음….”
지금까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오랜 시간 살아왔던 민 여사는 친구도 적도 아닌 그런 애매한 관계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확실히 윤 대표의 말이 이치에 맞긴 했다.
민 여사는 지금까지 자신의 이런 성향 때문에 윤 엔터의 운영을 전체적으로는 관여하지 않고 있었으니 이번에도 윤 대표의 의사를 무조건 따를 생각이었다.
“뭐. 작품은 소희에게 물어봐야지.
우리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나?
소희가 싫다고 하면 그냥 꽝인 건데.
하지만 진룡의 뜻은 고맙게 받아들이겠다고 연락해야겠군.
원래 이게 맞는 거지.
일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원래 제작사랑 연예기획사가 서로 백안시할 이유는 없는 거니까.
오히려 서로에게 의존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겠지.
어쨌든 진룡이랑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우리 쪽도 쓸데없는 일로 심력 낭비하지 않아도 되니 나쁘지 않아.”
민 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진룡의 제안서를 천천히 읽어 보았다.
군더더기 없지만 정중한 어투의 제안서.
확실히 예전의 진룡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진시첸 사장이 제법이네요.
대상이 딱 소희랑 설아에요.
저희 쪽에서 가장 신경 쓰는 둘이잖아요?
이거 알고 제안한 거겠죠?
전 당연히 민수나 태준이를 원할 거로 생각했는데요.”
민 여사의 이야기에 윤 대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제안의 대상이 소희라는 사실은 윤 대표의 경각심을 무디게 만들었으니까.
소희를 대상으로 삼은 것만 봐도 상대가 무슨 생각인지 대충 읽혔기 때문이었다.
이제 서로 쓸데없이 신경전을 벌이지 말자.
진룡의 제안서는 손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진시첸은 능력 있는 인물이긴 하지.
위시춘이 말하길 너무 늦게 태어나서 손해 본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하더군.
너무 어려서 진룡이 총수가 못됐다고 말이야.”
“오호. 그랬나요?”
“응. 진룡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위시춘이 그 정도로 평가하는 걸 보면 확실히 인물이긴 한 모양이야.
하지만 소희는 그렇다 치고 설아는 또 의외군.
설아의 앨범을 중국에 발매하고 싶다는 건가?”
윤 대표는 설아의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딸이 사랑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도통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아이였으니까.
처음에 연기에 매진하면서 자신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일 때는 이 아이가 정말 대단한 배우가 될 거로 생각했다.
그때는 정말 그런 열정과 열망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대사 문제를 극복한 후에 몇 편의 작품에서 연기하더니 그 뒤로는 이상하게 지지부진했다.
그리고 요즘에는 노래로 시선을 돌리더니 급기야는 노래와 연기를 병행하고 있는 상황.
물론 나쁘지는 않았다.
자신이 배우는 연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구태의연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설아가 생각하는 최종 종착지가 과연 어디냐는 거였다.
태준은 언제나 최고의 배우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수연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기만 하면서 즐거운 인생을 사는 것이 목표고.
민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연기자로서 최고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했다.
소희와 은우도 자신만의 목표가 있었고.
하지만 설아는?
윤 대표가 어이없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도무지 예상할 수가 없었으니까.
심지어 넌지시 물어봐도 그냥 웃으며 아무런 대답조차 해 주지 않는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딸의 마음에 윤 대표는 그저 속이 터져나갈 뿐이었다.
“흠…. 어차피 그 아이가 안 하려고 마음먹으면 등을 떠다밀어도 안 하겠지?
이 일도 설아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지.
그런데 그 녀석은 요즘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별다른 스케줄은 없지 않나?”
“음. 요즘에는 재단에서 일을 배우고 있어요.
아무래도 재단은 설아가 물려받아야 할 테니까요.”
이제는 재단 일까지 배우고 있다는 민 여사의 대답에 윤 대표는 그저 할 말을 잃을 뿐이었다.
그런 남편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민 여사가 조금 샐쭉하게 반응했다.
“왜 그런 반응이세요? 재단을 누가 물려받긴 해야 하잖아요?
태준이는 성격 때문에 힘드니 설아 밖에 더 있어요?
수많은 재단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중요한 일이니 배워야 할 것도 많아요.
전 지금부터 조금씩 일을 배우는 것에 오히려 찬성이에요.
물론 연기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반대하진 않지만요.”
다부진 민 여사의 이야기에 윤 대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민 여사가 평소에 재단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끙. 그래. 누가 뭐라고 하나?
설아가 해야 한다면 해야지.
재단이라…. 그렇군. 그게 있었지.
하지만 난 태준이에게 이 회사를 물려주고 싶지는 않아.
요즘 느끼는 건데 배우는 끝까지 연기를 해야 하는 거 같아.
진성 형님처럼 말이야.
나도 그렇게 끝까지 연기를 하다가 은퇴를 했어야 했나 봐.”
“그래서 이 회사를 차린 걸 후회하세요?”
민 여사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윤 대표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회사를 차리는 것이 최선이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너리즘에 절어있던 자신이 계속 그냥 그렇게 살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솔직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처럼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이 불행해 졌을 거라는 것이다.
그 당시의 자신은 무조건 변화가 필요했었다.
다만 자신도 사람이고 천생 배우라서 그런 건지 아이들이 너무 잘나가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오묘하긴 했다.
아직 자신에게도 이런 호승심 같은 감정이 남아있었나 보다.
윤 대표는 다 늙어서 주책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그건 아니지. 아이들이 이렇게 잘해주고 있는데 후회할 리가.
다만 조금 아쉽긴 하네. 그냥 좀 아쉬워.”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뜸을 들이던 윤 대표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본격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래. 갑자기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샜군.
그럼 설아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자고.
시킨다고 할 녀석도 아니니까.
그 재단 일은…. 민 여사가 그냥 알아서 하시게.
설아가 하고 싶다면 설아에게 시키면 되는 거고.”
윤 대표는 그냥 설아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민 여사가 알아서 해결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은 아니니 더 걱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리라.
그렇게 윤 엔터가 진룡과의 관계를 개선하기로 마음먹고 며칠 후.
윤 엔터에서도 화재 사건의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세간을 다시 떠들썩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이미 한참이나 지난 일이었고, 방화를 사주했다는 사람이 자수한 사실까지도 이미 다 알려진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돈을 주고 방화를 사주한 다른 인물이 있었다고 한들 그저 아 그랬구나 하는 정도로 그칠 수밖에.
솔직히 그 사고로 이미 한참이나 떠들어 댔기 때문에 더 이상 할 말도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다만 윤 엔터 배우들에게는 이 일이 제법 큰일이었다.
진짜 범인이 누군지도 몰라서 찝찝했던 마음을 완전히 털어 버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영화는 크게 흥행하고 있고 범인까지 완전히 검거된 상황.
민수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