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304화 (304/325)

# 304

6

그리고 개봉 전날 민수의 방.

배우들의 아지트인 이곳에 오랜만에 많은 배우들이 모여들었다.

아니 처음으로 6명의 소속 배우들이 모두 모인 것이었다.

개봉 전 마지막으로 단합대회를 추진하게 된 것.

혼자서 궁상떨지 말고 모두 모여서 긴장이나 풀자고 태준이 나서서 이 모임을 주최하였다.

“오. 여기가 바로….

아늑하네요. 회사 위에 이런 방이 있었구나.”

아무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한 은우가 가장 신기해하고 있었다.

“그래. 은우 선배.

선배는 여기가 처음이지?

종종 놀러 와. 다른 배우들도 회사에 들를 때면 가끔 놀러 오니까.”

오랜 영화 촬영 기간 동안 부쩍 친해진 은우에게 민수도 이제는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생각보다 싹싹한 은우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요. 엔젤 민수. 내일이 개봉인데 신수가 훤하구먼.

예전에 긴장하던 모습이 눈에 선한 데 말이야.”

태준은 그 기사 이후로 민수를 장난스럽게 엔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기부 천사의 이미지를 확고히 하게 된 민수를 팬들이 애정을 가지고 그렇게 부르고 있었는데 그 호칭을 재미있게 생각해서였다.

민수도 태준의 말에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민수는 그 호칭은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상대적으로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에 기부 금액이 많아진 것뿐.

다른 배우들도 자신처럼 꾸준히 기부금을 내고 있었으니까.

기사에서 나온 것처럼 수많은 결식아동들이 윤 엔터 배우들이 기부한 돈으로 끼니를 잇고 있었으니 그 호칭은 모두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 맞았다.

민수는 자신만 대표 격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현실을 조금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배우들은 그 일로 윤 엔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드러워진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수는 그런 점에서라도 배우들이 만족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속물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기부 행위에는 어느 정도의 만족 뒤따라야 오래 갈 수 있는 법이니 말이다.

“끙. 그래 내가 그랬지.

처음에 영화를 개봉하기 전날 말이야.

그때 우리가 나갔다가 봉변을 당했던가?”

“그래. 아주 좋은 날이었지. 그럼 그럼.”

태준은 그날을 회상하며 한껏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긴 그날의 일을 계기로 태준과 수연이 연인으로 발전했으니 태준으로서는 좋은 추억이 될 만도 했다.

훗날에는 수연을 업고 도망치던 일이 나름 긴박한 모험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었던 일이 이렇게 좋은 추억이 되다니 참 신기하긴 했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여기서 보자고 했잖아.

혹시 또 무슨 이상한 일이 있을까 봐서.

이거 이상하게 정 배우랑 작품을 하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니까.”

농담 반 진담 반 던지는 태준의 말에 민수도 이번에는 크게 반론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좀 조용하네.

이번엔 조용히 좋게좋게 가자고.”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영화도 잘되면 좋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어?

둘이 무슨 작당 모의를 하는 건 아니겠지?”

“야! 갑자기 왜 이래? 악!”

저쪽에서 여자들끼리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깔깔대고 있던 수연이 태준에게 다가와 장난스럽게 헤드록을 걸었다.

이미 맥주 한 캔을 들이킨 상황이었는데 그거 가지고 취했을 리는 없고 아마 즐거운 분위기에 취해 이런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봉변을 당해서 놀란 태준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외면한 채 민수는 수연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아. 저번에 첫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긴장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그날도 시사회 전날 이렇게 모여있었잖아요.”

“아… 그날? 하긴 그날 민수가 많이 긴장하긴 했지.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야.

자신이 찍은 첫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긴장하지 않는 배우가 있을 리가 없잖아?

풋풋했던 민수라니. 그러고 보니 벌써 그게 3년 전이던가?

그럴 때도 있었는데 요 녀석이 이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할 정도로 대단한 배우란 말이지?”

“대충 2년 좀 더 된 일이네요.

그리고 대표하긴 뭘 대표해요?

그냥 자리 좀 잡은 배우인 거지.”

민수는 수연의 이야기에 겸연쩍어하며 말을 돌렸다.

대표한다니 누가 누굴 대표한다는 건지 참 황망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던 거처럼 거만한 태도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은근히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너무나 수연다워서 귀여운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뻔뻔한 건 사실.

솔직히 민수는 아직도 예전에 자신보다 더 긴장하고 있던 수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 그걸 굳이 지적하는 센스 없는 짓을 하지는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나저나. 왠지 억울하단 말이야.

처음엔 내가 최종 악역인 거처럼 준수가 수선을 떨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필수 녀석이 최종 악역이었잖아?

나 이거 속은 거 같은데 소송 걸어도 되냐?”

태준이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자 자연스럽게 이번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다.

태준은 투덜댔지만 민수는 솔직히 준수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히어로 물을 연작으로 극장에 올리는 것은 준수의 로망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마 훗날 영화의 다음 편이 제작된다면 태준을 쓰기는 힘들 거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스케줄 문제도 그렇고 개런티도 장난 아닐 테니까.

그런데 리온은 연기에 욕심이 많은 반면 아직 배우로서는 많이 인정받지 못해 영화 개런티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러니 한 번 정도는 리온을 다시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언제까지 윤 엔터의 투자를 계속 받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으니 더욱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쎄. 연기가 맘에 안 들었나?

왜 그런 거 있잖아.

드라마에서 연기가 작가나 피디 마음에 안 들면 유학을 보내 버리고 다른 배우 쓰는 거.

딱 그건데.”

민수는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며 태준을 놀렸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태준을 이렇게 놀려 먹겠는가.

“와. 세상에. 윤태준이 연기력으로 놀림 받고 있어.

하긴 태준이가 악역은 좀 아니올시다 긴 하지.

워낙 선한 얼굴이잖아.

그리고 저 얼굴로 악당이라니 재능 낭비라고나 할까?”

“캬~ 이수연. 역시 또 이럴 때는 우리 수연이 뿐이네.”

“끙…”

태준을 놀리는 척하다가 반전을 주며 태준을 감싸주는 수연의 모습에 민수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자신보고 바퀴 커플이라고 떠들던 태준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런 민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대화는 계속 진행되었다.

“이제 다음 편에 나 이수연의 히어로 데뷔가 있을 테니 다들 준비하고 있으라고. 음히히.”

“언니. 아무리 그래도 그게 되겠어요?

이번 영화가 웬만큼 인기 있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는 안 될걸요.

한편에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요.”

“걱정하지마. 돈은 민수가 내 줄 거야.

난 민수만 믿고 간다.”

민수는 자신을 지갑처럼 생각하는 수연의 이야기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짜 성공하고 다음 편이 제작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얼핏 본 거 같아.

준수가 다음 편에서는 다시 몬스터 들이 튀어나와서 이종족들이랑 싸우는 내용으로 구상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 뭐?”

하지만 준수가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는 태준의 언질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준수가 그렇게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니 생각보다 용의주도한 녀석이었다.

“오. 그럼 저도 한발 걸칠 수 있겠네요.

사실 이번 배역이 나름 마음에 들었거든요.”

항상 부드러운 연하남이나 상큼한 배역만 소화해 왔던 은우는 이번에 연기한 배역이 제법 마음에 들어 보였다.

아마 액션 연기가 상당히 두드려지다 보니 강력한 이미지를 줄 수 있어서일 것이다.

곱상한 외무에 거칠고 터프한 열혈 보안관이라.

확실히 은우가 마음에 들만했다.

“아. 난 죽어서 못 들어가겠군.

이거 아쉬운데.”

“무슨 소리야. 이런 영화에선 시체를 발견하지 못한 이상 죽은 게 아니잖아.

아니 나처럼 시체를 발견했어도 살아나는 판국인데 겨우 그 정도로 사라진다는 건 말도 안 되지.

나중에 지미가 다시 돌아와 과거의 은원을 접어두고 같이 몬스터와 싸우는 거야.

이거야말로 진정한 대통합 아니겠어?”

배우들은 혼자서 각본까지 짜고 있는 수연을 보고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정말 간절히 찍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러려면 우리 언니 운동부터 열심히 해야죠?

이제 한가해졌으니 특훈 들어갈까요?

봤죠? 소희 언니가 제 지시 사항을 충실히 이행해 한 단계 올라간 거요.

앞으로 게으름은 사양하겠어요.

제대로 된 그레이트 바니가 되려면 제 지시에 따라 줄 거라 믿어요.”

신나 하던 수연도 설아가 끼어들자 그 기세가 한층 줄어들었다.

“으…. 그래. 그래야겠지?

액션 연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몸을 만들어야 할 테니까.”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정말 하기 싫어 보였다.

도대체 수연에게 설아의 특훈은 어떤 의미일까?

민수는 앞으로 수연의 행동을 주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영화를 찍고 싶은 욕망과 운동을 피하고 싶은 게으름 중 누가 승자가 될지 자못 궁금했으니까.

“이번에 그냥 두 편이 동시에 개봉될 수도 있었다죠?

그랬으면 라이벌이고 뭐고 그냥 평정하는 거였는데 좀 아쉽네요.

그러면 진룡이 찍소리도 못했을 텐데.”

윤 엔터 배우들 중 누가 진룡을 좋아하겠냐마는 그중에서도 특히 진룡과 감정이 안 좋았던 소희는 자신들이 찍은 영화가 진룡의 영화와 라이벌로 인식되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다.

민수도 이 부분에서는 조금 아쉬웠으니 아마 소희도 그랬을 것이다.

“글쎄.

그것보다는 차라리 같이 개봉하는 게 더 치명적일걸.

내가 볼 때 그 영화가 그리 잘될 거 같지 않거든.

그쪽 생각에는 무조건 지금 개봉하는 게 상수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볼 때는 우리를 피하고 좀 나중에 개봉하는 게 나았을 거야.

그랬으면 마약 이야기도 좀 더 수그러들어서 대박은 못 치겠지만 평타는 쳤을 텐데.

그쪽이 너무 서둘렀어. 아니 어쩌면 욕심 때문이려나?

아마 갑작스럽게 두 영화 모두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되니 더 마음이 동했을지도?”

태준은 민수나 소희와는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음. 그런가? 지금 한창 시선을 모았을 때 개봉하는 게 더 나은 거 아니야?”

수연도 궁금했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태준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태준은 배우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모이자 어깨를 으쓱하며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들어봐.

“에이전트 K”가 잘 나온 영화라고 하는데 엄밀히 따져보면 사실 그냥 평범한 액션 영화야.

아주 특별하고 충격적인 영화는 아니라는 말이지.

그런데 지금 마약 사건 때문에 드림 쪽에서 엄청 분위기를 띄워놨지?

무슨 천재의 고뇌다 어쩌다 하면서 말이야.

그러니 사람들의 기대감이 얼마나 높겠어?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냥 적당히 잘 만든 액션 영화일 뿐이다.

이러면 실망할 수밖에 없는 거지.

두고 봐. 분명 얼마 안 있어서 망조가 들 테니까.”

태준의 말의 요지는 결국 너무 높아진 기대치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게 될 거라는 거였다.

실망한 관객들이 별거 없다는 감상평을 하나둘씩 올리게 되면 그게 쌓여서 결국 외면받게 될 테니까.

많은 스크린을 배정받지 못해 초반에 확 치고 나갈 수 없는 “에이전트 K”의 입장에서는 그런 실망이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 영화 입장에서도 두 편을 동시에 상영하는 건 정말 좋지 않은 일이지.

우리가 “에이전트 K”의 스크린을 다 먹고 동시 개봉했다고 쳐봐.

그러면 극장가에 완전히 우리 영화밖에 없는 건데 사람들이 좋게 보겠어?

또 1, 2 편을 동시에 개봉하면 분명 2편부터 보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2편부터 본 사람들은 1편의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테니 1편은 안보지 않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1편부터 순차적으로 개봉하는 게 훨씬 좋다 이거지.”

태준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진룡의 일은 제쳐두고 자신들의 영화가 동시에 상영하는 게 손해라는 건 민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자신의 시야가 확실히 좁아지긴 했나 보다.

그런 단순한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하다니.

진룡의 영화가 망하기만을 바라다보니 이런 실수를 하게 된 거 같았다.

설아의 조언으로도 마음을 확 잡지는 못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래서는 곤란했다.

진룡이 망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성공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생각을 다시 고쳐먹자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영화가 순차적으로 개봉하게 된 일이 더 긍정적으로 보였다.

처음 진룡의 영화가 스크린에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것에 조금 답답함을 느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괜찮아진 것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