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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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온 배우들의 첫 번째 스케줄은 역시 휴식이었다.
5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외부에서 강행군을 지속했으니 휴식은 필수적이었다.
물론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는 여러 가지 홍보 활동에 매진해야겠지만 그전까지는 꿀 같은 휴식을 취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설아와 민수는 괌으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불행히도 둘만 오붓하게 떠나겠다는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촬영을 마친 배우들과 그 매니저들까지 동행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와. 진짜 생각보다 강적이에요.
그렇게 고집을 셀 줄이야.”
실망스럽게도 결국 설아마저 소희를 설득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대로 민수가 정글에 끌려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
설아는 회사를 설득해 배우들과 같이 여행 가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물론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최악보다는 차선을 선택한 것이었다.
“와. 정말 대단하네. 역시 민수형은 믿음직하다니까. 하하하.”
소희를 강제로 쉬게 만들고 심지어 여행까지 같이 가게 되자 형우는 완전 희희낙락이었다.
사실 배우들만 가는 여행에 매니저들까지 동행하게 된 건 소희의 의견이었다.
같이 고생한 매니저들에게 여행에 동행할 기회를 주자고 한 것.
물론 다른 배우들도 흔쾌히 이에 동의했지만 말이다.
당연히 모든 매니저가 동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자신들만의 휴가 계획이 있었고 회사는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었다.
그래서 결국 휴가에 동행한 것은 아직 가정을 꾸리지 못한 소희의 매니저 형우와 민수의 매니저 동원뿐이었다.
민수는 소희가 형우를 챙기는 것을 보고 확실히 둘의 사이가 원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외부에서 같이 지내더니 정이 많이 쌓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 드라마도 사실상 형우가 잡아 온 것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다른 회사의 매니저들처럼 정상적으로 일하는 건 형우뿐일지도 모르겠다.
이 회사의 다른 매니저들의 업무는 왠지 어딘가 핀트가 조금 어긋나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태준이나 민수, 그리고 수연의 사실상 따로 영업을 할 필요가 없는 수준의 배우였고 매니저들도 사실상 회사의 일을 더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주말 극장에서 오랫동안 연기하며 인지도 상승 면에서 큰 수혜를 입은 은우도 이 노선에 탑승하게 된 상황.
그러니 앞으로는 당연히 그의 매니저도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런 방향으로 근무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 모든 상황에서 설아의 매니저는 완전히 열외 상태였다.
사실 설아의 매니저는 매니저라기보다는 보디가드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그야말로 설아를 근접 경호하는 것뿐이었으니까.
물론 배우들이 워낙 따로 하는 일도 없고 관심도 없어서 이런 식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지만 어쨌든 다른 회사의 매니저들처럼 정상적으로 일하는 형우의 존재는 이 회사에서 좀 이질적이긴 했다.
능력이 좋은 것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그리고 드라마 촬영이 막바지에 이른 수연은 당연히 여행에 동참하지 못했다.
지금 수연이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는 기대보다 성적이 저조했다.
계속되는 쪽 대본에 작가의 역량이 바닥났는지 내용이 갈팡질팡하고 있어서였다.
심지어 이 작가는 뚝심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귀가 너무 얇은 건지 시청자들의 반응에 너무 신경 쓰고 있었다.
사람들의 기대에 충족하는 것도 좋지만 최소한의 스토리라인은 뚝심 있게 밀고 가는 것도 중요한데 그 부분을 간과한 모양이었다.
“와. 진짜 내가 이거 찍으려고 영화에도 못 들어가고.
심지어 여행에도 못 따라가다니.”
수연은 일행을 보자마자 절망하며 하소연을 연발했었다.
물론 주연 배우인 수연의 잘못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솔직히 내용이 산으로 가버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주연배우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긴 했다.
“아… 이 정도면 제가 그냥 붙었어도 이겼겠는데요?
선배 분발 좀 해 주세요.”
예전에 승부를 보자고 했던 수연의 모습이 생각나 민수가 웃으면서 으스대자 수연은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당연히 뻔뻔하게 나올 줄 알았던 수연의 예상 못 한 반응에 민수가 살짝 당황할 때쯤 갑자기 뛰어올라 민수에게 달려들었다.
“야! 이 못된 놈아! 그게 지금 내 앞에서 할 소리야!?”
“악! 선배. 진정해요!”
이 기회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겠다는 듯 달려드는 수연을 겨우 뿌리친 민수는 괜히 장난 한번 걸었다가 식겁하고는 희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오. 친구 고마워.
어떻게 하면 수연이 스트레스를 풀어 줄까 고민했는데 이게 또 이렇게 되네.
역시 자네는 정말 좋은 친구야.”
옆에서 태준이 기분 좋게 민수를 향해 엄지를 척하고 들어 올리자 민수는 못 말리겠다는 생각에 허탈하게 웃으며 수연부터 달랬다.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죠.
어차피 선배도 곧 촬영 끝나잖아요?
촬영 마치고 태준이랑 둘이 오붓하게 쉬고 오세요.
태준이도 영화 홍보 전까지 시간이 있을 테니까요.”
“그래 수연아.
솔직히 휴가는 둘이 가는 게 최고지.
내가 일정 비워놓을게.”
태준까지 나서서 설득하자 그제야 겨우 진정한 수연은 우울한 표정으로 작별인사를 건네고 다시 촬영장으로 출발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이 왠지 씁쓸해 보이는 게 아무래도 진짜 촬영장에 가고 싶지는 않은 가보다.
“원래 망한 드라마 촬영장에 가는 것만큼 우울한 일이 없지.
분위기가 아주 끝내주거든.
그러고 보니 아직 자넨 그런 경험이 없었지?”
태준의 이야기에 민수는 짜게 식은 눈으로 태준을 바라보았다.
꼭 그런 경험을 해 본 거처럼 말하는 태준이 어이없어서였다.
“이건 뭐, 꼭 그런 경험을 해본 거처럼 말한다?
너도 그냥 들은 소리면서 우리 이러지 말자.”
“킥, 들켰냐?
이거 정 배우 나한테 너무 관심이 많은 거 아냐?
내가 찍은 드라마가 몇 개인데 그걸 다 알고 있어?”
“야. 네가 찍은 드라마라고 해 봤자 8개뿐이잖아.
그중 3개는 내가 있을 때 찍은 거고.
데뷔작 빼면 겨우 4개인데 그걸 몰라?”
“에이. 정 배우가 영악해졌어.
이러면 재미가 없는데 말이야.”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배우들은 무사히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공항에 항시 대기 중이던 기자들도 윤 엔터 배우들이 대거 공항에 나타나자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중국 출국 때는 산발적으로 출국하며 크게 시선을 모으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냥 대놓고 다 같이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뭐지? 윤 엔터 다 같이 어디 가는 거야? 배우 소속사에서 저렇게 단체 행동할 일이….?”
“글쎄. 어쨌든 찍어.
야. 그리고 괜히 섣불리 엉뚱한 기사 올리지 마라.
요즘에 거기 잘못 건드리면 더러워지는 거 알지?”
“걱정 마. 우선 문의부터 넣을 테니까.
그 정도는 대답해 주겠지.”
민 여사가 꾸준히 뿌려놓은 당근과 과감한 채찍이 요즘에는 확실히 그 빛을 보고 있었다.
적어도 말도 안 되는 기사가 올라오는 일은 없었으니까.
교묘하게 말을 돌려 법망을 피하는 기사를 올려도 칼같이 관계를 끊어 버리니 항상 대접이 융숭한 윤 엔터와 굳이 척을 지고 싶어 하는 기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뜬금없이 휴가를 떠난 배우들의 행동에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몇 개월이나 일도 안 하고 잠적했던 배우들이 갑자기 휴가라니.
영화 소식이 아직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니 사람들의 그런 반응도 어쩌면 당연하리라.
솔직히 영화 촬영 소식이 아직까지 전혀 외부로 새지 않은 것이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 촬영한 것도 아니고 중국에서 몰래 촬영한 것이니 윤 엔터에서 홍보하려고 나서지 않은 이상 알아채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편안한 휴가가 끝날 때쯤, 설아는 한국에 돌아가면 자신에게 들이닥칠 여러 가지 일정을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윽. 최후의 만찬 같은 기분이에요.”
“하하. 적절한 표현이긴 하네.
아마 네가 제일 바쁘겠지?
마지막까지 수고 좀 해줘.”
민수가 이야기했듯 영화 개봉 전까지 가장 바쁜 것은 설아였다.
촬영 때문에 미뤄왔던 OST 작업도 재개해야 했고 팬클럽의 성화 때문에 콘서트 형식의 팬 미팅까지 잡혀 있었다.
그리고 팬 미팅 후에는 바로 영화 홍보까지 시작해야 하니 정말 지옥 같은 스케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헤헤. 그래도 재미있었으니 만족이에요.
단둘이 오지 못한 건 조금 아쉽지만 뭐 그건 할 수 없죠.
우린 언제 대놓고 같이 여행 다닐 수 있을까요?”
“글쎄…..
프페 사람들이 우리 설아 이제 연애라도 해야 하지 않냐? 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건 너무 늦으려나?”
“피. 그러려면 적어도 서른 살은 돼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너무 늦잖아요?
자. 민수 오빠 빨리 대책을 마련해 오세요. 어서요!”
민수는 귀엽게 채근하는 설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아름다운 바다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어린 여배우의 연애라.
솔직히 좀 어려운 문제였다.
열애 인정 후나 결혼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는 배우들은 있었지만 설아는 너무 어렸으니까.
23살. 이제 내년이면 24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민수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민수의 반응에 설아는 그에게 모든 일을 맡겨 놓으면 시간이 너무 지체될 거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려나?
사람들의 반응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설아는 상황 봐서 자신이 그냥 터트려야겠다는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수가 저렇게 신중한 것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였으니 솔직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배우들이 이렇게 즐거운 휴가를 보내고 있을 무렵.
윤 엔터 대표실에서는 윤 대표와 찬진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때? 잘 되고 있어?”
“그럼. 너도 보면 알잖아?
영상 하나 나올 때마다 계속 보내주고 있으니까.
우리 메인 투자자님이 불안하지 말라고 말이야.”
찬진의 너스레에 윤 대표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상상하기 힘든 자금이 투자되는 일이라 윤 대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그거 망한다고 회사가 넘어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워낙 많은 돈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 정도의 돈이 들어가는 것에 조금 불만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찬진이 계속 가져오는 영상을 확인할수록 그 돈을 쓸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점점 켜졌다.
그만큼 찬진이 전달한 영상들은 만족스러웠으니까.
“참나. 전에 환이가 와서 엄청 징징대더라고.
중국 가서 개고생만 하고 왔다고 말이야.
난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원본 영상 보니까 알겠더군.
환이가 고생 많이 했어.”
윤 대표가 짠하게 웃으며 이야기하자 찬진이 폭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하긴 자신도 그 영상을 보고 이게 뭔가 했으니 말이다.
“푸하하. 맞아. 그랬지.
중년 배우한테 그런 걸 시키다니 그 녀석도 참…
아마 태원이가 그런 경험이 처음이라 그랬을 거야.
그땐 생각이 완전히 굳어 있었나 봐.
너무 긴장해서 그럴 수도 있고.
나중에 눈치채고 태원이가 따로 극단에 찾아가서 사과한다고 했으니 뭐 알아서 잘 풀겠지.
강환 씨도 그렇게 막힌 사람은 아니잖아.”
“끙.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이미 거하게 뜯겼어.”
찬진은 윤 대표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무슨 말인지 되물었다.
“그 녀석이 자기는 너무 억울하다고 막 하소연하는 거야.
처음에는 나도 대충 흘려 넘겼지.
원래 엄살이 좀 심하기도 하거든.
그랬는데 나중에 영상 확인하고 나니 그럴 수가 없겠더라고.
어쨌든 그만큼 우리 영화에 신경 써줬다는 건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겠어?
그래서 다음에 그 녀석 극단에서 상연하는 연극을 우리 회사에서 투자해 주기로 했어.
원래 그거 때문에 영화에 들어간 거였으니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할 거니 아마 돈푼깨나 깨지지 싶다.”
“하하.
그걸 또 그렇게 실속을 챙겼어?”
찬진은 이 일로 결국 다음 연극의 투자까지 확정 지었다는 이야기에 강환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자신도 자신의 촬영 팀을 위해 안 해본 짓이 없었으니 극단을 꾸리고 있는 강환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그래, 그건 그렇고. 이제 영화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이런저런 자잘한 이야기를 나눈 후 윤 대표가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자 찬진도 집중해서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