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94화 (294/325)

#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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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전투가 끝난 후 상황은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듯 보였다.

하지만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 석연찮은 반응을 보여주는 치안청도 문제였고 사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지미는 난리통에 무사히 빠져나갔으니까.

겨우 몸을 빼 달아난 지미는 은신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닥터C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이거…. 자네 꼴을 보아하니 일이 잘못된 거로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시커먼 놈이 나타났단 말이야.

그놈은 깔끔하게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나?!”

사건을 전해 들은 닥터C는 두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내질렀다.

“호! 정말 대단하군. 그 폭발에서 살아남은 것도 대단한데 그런 위용을 보였단 말인가?

내가 만든 성공작이라지만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이잖아?”

“그걸 말이라고!”

닥터C는 능글맞은 말투로 흥분한 지미를 달랬다.

“자자. 우선 진정하라고.

어차피 인원은 충분히 보충할 수 있잖는가.

어린애라도 방패 하나만 들면 그 징그러운 이종족을 막을 수 있으니 말이야.

쉐도우라……

그래. 그 녀석을 막을 방법이 있겠어. 큭큭. 재미있겠군.”

닥터C는 키득거리며 지미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지미도 마뜩잖아했지만 이종족의 성향과 관계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최소한 쿤을 이곳으로 끌어들일 수는 있어 보였으니까.

“이번에는 무조건 그놈을 죽이고 이종족들을 완전히 쓸어버려야 해.”

닥터C에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인지 지미는 굳은 결의를 다지며 닥터C가 계획한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부분에서 지미의 회상을 통해 그가 과거에 이종족 범죄자에게 모든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가 이종족에게 품은 분노와 증오의 실체를 관객들에게 설명하게 될 것이다.

지미의 회상 씬은 이미 태준이 촬영을 마친 후였는데 민수는 자신의 와이어 액션을 점검하느라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 대상이 태준이다 보니 어련히 알아서 잘했을까 생각할 뿐이었다.

닥터C의 계획은 시아를 납치해 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고 쿤에게 순수 라이칸의 DNA를 투입해 쉐도우와 싸우게 만들겠다는 거였다.

순수 이종족의 DNA는 이미 카야를 통해 충분히 그 효과를 확인한 후였고 원래 단단한 방어력을 기반으로 저돌적인 육탄전을 벌이는 라이칸은 쉐도우에게 매우 좋은 상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쉐도우를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게다가 순수 이종족 DNA를 주입하면 당연히 이성을 잃을 테니 쉐도우를 이곳으로 유인하기만 하면 둘을 충돌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으니 충분히 시도해 봄 직한 작전이었다.

다만 시아를 납치하는 것으로 쿤을 이곳으로 유인할 수 있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닥터C는 요호족과 황금 늑대족이 맺은 상호 보호조약과 두 종족의 관계를 설명하며 시아를 납치하면 충분히 쿤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처럼 어수선한 상황에서 쉐도우가 없는 곳에 방패로 무장한 병력을 파견하면 시아를 납치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 지미도 닥터C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만약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야말로 이이제이가 되는 셈이니 지미로서는 군침을 흘릴만한 그런 계획이었다.

모든 일은 닥터C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쿤은 요호족을 저버리지 못했고 시아를 구출하기 위해 결국 단신으로 은신처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시아로 위협하는 지미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라이칸 DNA를 흡입하게 되고 쿤을 찾아 나선 쉐도우 일행과 은신처에서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민수가 걱정했던 격투 씬은 바로 이 장면이었다.

온전한 라이칸의 두꺼운 가죽으로 무장한 쿤의 무자비한 공격에 전투를 벌이는 내내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두들겨 맞기만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주인공인 쉐도우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긴 하지만 그 과정에는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민수도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저거 그거지? 예전에 카야가 보여줬던 그거.”

쉐도우는 광소를 내지르며 이성을 잃은 채 다가오자 쿤의 모습이 범상치 않아 한숨을 내쉬며 샌디를 바라보았다.

특히 완전히 부풀어 오른 거대한 덩치는 예전에 쿤이 변신했던 그 모습보다 훨씬 위용이 넘쳐 보였다.

샌디도 쿤의 모습에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 어쨌든 상황을 좀 보자고.

이 친구도 그때 그놈처럼 마지막에 이상하게 변하진 않겠지?

너는 저쪽에 쓰러져 있는 여우 아가씨부터 챙기라고.”

자신의 지시에 샌디가 시아에게 뛰어가자 쉐도우는 한숨을 쉬며 쿤을 상대했다.

“좋아. 한번 놀아보자고 늑대 친구.”

선공은 역시 쉐도우였다.

쉐도우의 그림자 사슬이 쿤의 시야 밖에서 그를 옭아매 들어간 것.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림자 창도 쿤에게 날아들었다.

“맙소사!”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쿤은 거추장스럽게 자신의 몸을 감싼 사슬을 순식간에 끊어 버리고 날아오는 그림자 창을 주먹으로 분쇄해 버렸으니까.

자신의 공격이 너무 쉽게 무력화되자 쉐도우도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쿤의 공격이 이어졌다.

거대한 덩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였다.

“윽!”

갑작스러운 돌진을 겨우 피한 쉐도우는 옆에서 느껴지는 풍압만으로도 극심한 긴장감을 느꼈다.

저 돌진에 적중하는 순간 자신은 치명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쿤은 별다른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라이칸의 육체 자체가 사기였다.

쉐도우의 공격은 대부분 라이칸의 두꺼운 가죽에 막혀 거의 데미지를 주지 못했지만 쿤의 주먹질은 한 방 한 방이 치명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큰 덩치에 비하면 속도는 또 얼마나 빠른지 그림자 사슬을 타고 이동하는 쉐도우와 비견될 정도였다.

그나마 그림자 뚫기로 간간이 거리를 벌리면서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이지 이대로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패배하게 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우리라.

닥터C가 쿤이면 쉐도우를 잡을 수 있다고 장담했던 것이 헛된 망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두꺼운 가죽으로 무장한 라이칸은 분명 쉐도우에게 상성 상 우위에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쿤에게 두들겨 맞으며 도망치던 쉐도우는 이제는 어떻게든 결착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저 녀석에게 유효타를 먹일 정도로 그림자를 응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벌 수 있었다.

샌디의 보호를 받던 시아가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상황을 전해 들은 시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쿤에게 접근하더니 쉐도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쉐도우는 저게 무슨 짓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노래의 위력은 생각보다 굉장했다.

쿤이 멍한 눈으로 시아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찰나의 시간을 번 쉐도우는 모든 그림자를 응집해 사방에서 쿤을 압박해 들어가는 사슬을 만들어 쿤을 옥죄어 들어갔다.

그제서야 쿤이 정신을 차리고 발광했지만 이미 몇 겹으로 두껍게 만들어진 사슬을 쉽게 뿌리치지는 못하였다.

“이제 정신 좀 차리라고 늑대 친구.”

말을 마치자마자 쉐도우의 모든 그림자를 모아 만든 거대한 망치가 쿤의 머리를 강하게 타격했다.

“쾅!!”

도무지 망치와 사람이 부딪쳐 울리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굉음과 함께 쿤은 결국 정신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어쨌거나 상황을 모면하게 된 것이었다.

“하… 겨우 살았네.

시아, 그런데 아까 부른 노래가 뭐길래 쿤이 당신만 바라보게 된 거지?”

겨우 한숨 돌린 쉐도우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지만 시아는 왜인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다소 의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시아만은 아니었다.

“아 그거. 그거 구애의 노래에요.

저 여우가 앞에서 페로몬을 뿜어대니 본능만 남은 쿤이 정신을 못 차린 거죠.”

“아하! 그거 대단한데.”

샌디가 키득거리며 대답하자 쉐도우는 그럴듯한 방법이라 감탄을 내뱉었다.

시아의 기지가 아니었으면 정말 죽을 뻔한 상황이었다.

쉐도우는 앞으로 다시는 저 무식한 늑대를 자극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쓰러져 있는 쿤을 업어 들고 자신들의 기지로 발길을 돌렸다.

“아우. 힘들어.

야, 스티비 이러기냐?”

촬영을 마치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스티븐에게 다가온 민수는 대뜸 하소연부터 터트렸다.

정말 멋진 장면을 만들어 보겠다더니 스티븐이 평소보다 더 강력하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만약 민수가 슬쩍슬쩍 몸을 움직여 충격을 흡수하지 않았으면 생각지 못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덕분에 감독과 촬영감독이 엄지 두 개를 치켜세우며 즐거워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허. 이 친구야 우리가 하루 이틀 손발 맞춰보나?

척하면 착이지 뭘.

잘 피하고 알아서 잘 하더구만 괜히 엄살이신가?

그래서 덕분에 화면은 끝내주게 뽑혔잖아?”

스티븐의 말대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것은 민수의 전매특허였다.

스티븐도 그걸 알고 있으니 이런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만약 민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이 장면을 이렇게 실감 나게 뽑지도 못했을 것이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자신이 맞는 장면에서 그런 투철한 프로정신을 발휘할 건 또 뭐란 말인가?

하긴 지금까지 언제나 스티븐은 자신의 연기에 집중하긴 했었다.

다만 계속되는 와이어 촬영에 민수가 평소보다 더 극심한 피로를 느끼는 것이 문제였다.

그때 맞기만 하는 연기로 조금 억울해하는 민수를 놀리려는지 태준이 다가오더니 멋진 연기였다고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캬! 역시 우리 정 배우.

맞는 연기도 어쩜 저렇게! 멋지게! 잘 뽑을까?

정말 대단하다니까.

역시 배우는 좋은 장면을 위해 한 몸을 불사를 수 있어야 진정한 배우지.

암 그렇고 말고.”

이 순간 민수는 왜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는지 절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태준의 너스레에 키득거리는 스티븐을 뒤로하고 태준에게 살며시 다가가 태준의 허리를 강하게 죄어 들어갔다.

“야. 이게 뚫린 입이라고.

맛 좀 봐라!”

“윽! 야. 폭력 반대!

윽윽.”

태준이 발버둥 쳤지만 민수의 완력을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민수의 울분이 들어간 조르기에 태준의 비명이 세트장을 한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편 세트장 한쪽에서는 유치하게 노는 두 남자를 바라보며 소희가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애라고 하더니 딱 그 짝이 아닌가.

소희의 옆자리에서 쉬고 있던 설아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른 의미로 혀를 찼다.

어제부터 계속 민수를 놀리더니 자신의 바보 오라버니가 결국 응징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내 한번은 저럴 줄 알았지.

뭐, 하긴 저게 오라버니 나름대로 몰입을 푸는 방법이니까 어쩔 수 없으려나?”

설아의 중얼거림에 귀를 쫑긋 세운 소희가 설아에게 되물었다.

그냥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는 것에 흥미가 동한 것이었다.

“저게 몰입 푸는 거라고?”

“아. 그렇죠.

저런 식으로 소소하게 장난을 치면서 배역에 몰입을 줄이는 거예요.

지금 다른 사람들하고는 달리 오빠의 배역은 감정을 많이 잡아먹는 배역이잖아요.”

“아….”

설아의 말이 맞았다.

별다른 굴곡이 없었던 다른 이종족들이나 복수를 끝마친 쉐도우와는 달리 지미는 끝까지 복수와 분노를 연기해야 했다.

아마 연기가 끝나자마자 다른 친한 배우들에게 장난을 거는 건 태준 나름의 생존 방법일 것이다.

장난스러운 태준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던 소희도 설아의 설명을 듣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자신도 가끔 배역에 너무 몰입하는 바람에 곤란한 경우가 많았으니 참고로 할 만한 방법이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자신도 같이 연기하는 배우에게 장난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사교성이 나아졌으니 말이다.

어쨌든 2번의 전투 씬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장면은 대망의 마지막 전투 씬 뿐이었으니 이 영화도 점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민수는 이 기회를 빌려 태준에게 쌓였던 묵은 감정(?)들을 모두 해결할 묘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민수의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면 그야말로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태준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민수도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민수는 그날로 형우에게 접근해 슬쩍 딜을 걸고 협조를 요청했다.

고민하던 형우도 결국 민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생각보다 민수가 제시한 조건이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대망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할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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