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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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소희의 배역인 시아가 악역이라고 설명한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착오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늘어나기 시작한 이상한 습격자들 때문에 시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습격자들은 이지를 상실한 채 무작정 이종족 혼혈에게만 달려들고 있었는데 죽기 직전까지도 그 특유의 난폭함을 잃지 않아 완전히 숨통을 끊고 나서야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이성이 없으니 대화도 통하지 않았고 도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계속 튀어나오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도시의 어두운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자신의 일족들과 유흥가나 사창가의 연약한 여성들을 보호하는 시아로서는 단 한 명의 침입자라도 신중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영업장의 특성과 구성원들의 무력함을 고려했을 때 그 한 명이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시아는 갑작스럽게 습격한 의문의 인물들과 생사를 건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시아의 주변을 완전히 포위한 5명의 괴인.
하나같이 눈에 초점도 잡혀있는 않은 괴이한 몰골이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시아는 한 괴인을 발로 차고 텀블링으로 넘어가 상대와의 거리를 확보했다.
“이 누나가 좀 바빠.
그러니 한 번에 끝내줄게.”
말이 끝나자마자 본신을 완전히 개방한 시아의 머리 위로 쫑긋한 여우 귀가 솟아오르고 엉덩이 쪽에는 9개의 꼬리가 튀어나와 그녀의 몸을 감싸며 넘실거리듯 휘날리기 시작했다.
넘실거리는 9개의 꼬리 주변을 일렁이는 무형의 에너지 때문에 그녀의 치마가 화려하게 펄럭이자 그 사이로 뽀얗고 매끈한 허벅지가 언뜻언뜻 수줍게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무척이나 요염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혹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그 위력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귓가와 손등을 뒤덮은 부드러운 여우 털과 머리카락이 금빛으로 완전히 물들고 시아의 손끝에서 수십 발의 에너지 탄이 튀어오더니 쏜살같이 상대에게 날아가 그들을 완전히 분쇄해 버렸으니까.
자신이 직접 나서서 침입자를 격퇴한 시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그녀를 감싸던 탐스러운 꼬리들도 모두 몸 안으로 되돌아간 후였다.
“오늘도 인가요? 이번이 몇 번째죠?”
시아가 묻자 그녀를 옆에서 모시는 간부 하나가 시아에게 달려와 고개를 숙인 후 상황을 보고했다.
“오늘은 이걸로 네 번째입니다.
이번 주에만 총 24회의 습격이 있었고, 저희 쪽 조직원도 5명이 다치고 2명이 중태에 빠졌습니다.
아직 사망한 인원은 없지만 이대로 습격이 계속되다가는….”
“대체 이 자식들은 뭐죠?
인간도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이종족 같지도 않아요.
정말 어디서 흘러들어오는 건지 짐작할 수도 없군요.
지금 조직원들이 계속 불심검문으로 치안청에 잡혀 들어가고 있다죠?”
“네. 나중에 풀려나기는 한다지만…..
그리고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희 금호당뿐만 아니라 다른 이종족 혼혈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상황에서 인력이 비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피해에요.
대체 치안청은 뭘 하고 있는 거죠?
안 되겠어요.
우선 치안청에서 말이 통할만 한 사람하고 대화라도 해봐야겠어요.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적어도 우리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겠죠.
삼숙. 누가 좋을 까요?”
시아의 물음에 금호당(錦狐堂)에서 외부의 정보를 담당하는 세 번째 당주 극형이 그녀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같은 이종족 혼혈인 퍼니셔의 쿤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이종족 혼혈인 저희와 만나줄 만한 사람은 그 사람뿐이니까요.”
“퍼니셔….
쿤이면 황금 늑대 부족의 후손 아니던가요?
황금 늑대 부족은 저희랑도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었으니 저희의 요청을 묵살하지는 않겠네요.
좋아요. 한시라도 빨리 이곳으로 와 달라고 하세요.
부족의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삼당주가 물러가자 시아는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하…. 진짜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날이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무조건 일족을 안전하게 지켜야 했다.
그것이 금호족의 대당주이자 이종족 안전 위원회 장로인 자신의 위대한 의무이자 책임이었다.
그리고 늦은 밤.
쿤이 남몰래 금호당을 방문했다.
상황은 많이 안 좋았지만 쿤으로서는 오래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던 금호족의 요청을 무정하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삼당주는 쿤을 금호당의 숨겨진 거처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어진 쿤과 시아의 독대.
시아는 고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다기를 꺼낸 후 차를 한잔 따라 쿤에게 내밀었다.
“반가워요. 금호당의 시아에요.”
“쿤이다.
무슨 일로 나를 불렀지?”
시아는 성급하게 나오는 쿤의 모습에서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나치게 서두르면서 왠지 불안해 보이는 쿤의 행동은 치안청의 최고 무력단체인 퍼니셔가 혼란스러워할 만큼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서운하군요.
우리가 그렇게 무슨 일이 있어야만 부르는 사이인가요?”
“예전에야 금랑족과 요호족이 혈연을 이루며 세를 유지했다지만,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지 않나?
내가 널 오늘 처음 봤다는 사실만 생각해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지.”
예전부터 이어졌던 종족간의 친분을 빌미로 무슨 요구를 꺼내기도 전에 쿤이 먼저 말을 끊었다.
시아는 바늘 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는 쿤의 태도에 자세를 바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옛정에 호소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런 매정한 남자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바빠 보이니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대체 치안청은 지금 무슨 생각이죠?
밖에는 이상한 놈들이 어슬렁거리는데 치안청은 애꿎은 이종족만 박대하고 있어요.
당신이라며 뭐라도 알고 있는 게 있을 테죠?”
시아의 말에 쿤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이미 모든 사건에서 배제된 지 오래였고 자신이 배제된 이후에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자신도 시아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없었다.
솔직히 자신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모른다.
내 말을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지금 치안청에서 완전히 고립된 상태다.
본부에서도 자중하라는 명령만 전달하고는 묵묵부답이야.
점점 상황이 이상해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솔직한 쿤의 이야기에 답답해 목이 탄 시아는 잠시 말없이 차만 따라 마시고 있었다.
그러게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시아는 치안청의 상황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자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종족에 대한 불심검문이나 연행은 쉐도우란 자를 잡기 위해서라고 하던데요.”
“그렇다. 그 녀석이 사라진 지 벌써 4개월이나 지났지.
그리고 넉 달 전에 일어났던 폭발사고의 현장에 쉐도우가 있었을 거라고 추측 아니 확정이라고 해도 무방하겠군.
모두 폭발해 버려서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치안청에서도 사실상 사망했다고 결론을 내린 상황이야.
그런데 그런 쉐도우를 잡겠다고 이종족을 압박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이유인지….”
“혹시 살아있는 건 아닌가요?”
쿤은 시아의 가설에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쉐도우가 살아 있다라.
하지만 사고 현장을 직접 조사했던 쿤으로서는 아무리 쉐도우라도 그런 대폭발 안에서 살아나왔을 거로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차라리 치안청이 쉐도우를 이종족 탄압의 구실로 삼고 있다는 추리가 더 논리적이리라.
“쉐도우가 살아있다면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이 있지.”
“누구죠?”
“샌디. 재즈바 엘리자베스의 샌디다.”
“윽…. 서쪽의 걸레….”
“응?”
시아는 샌디의 이름이 나오자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둘은 그야말로 앙숙인 사이였으니까.
처음 이종족이 이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서큐버스와 요호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구전에 의하면 순혈 서큐버스와 요호는 둘 다 인간의 정기를 양식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결국 같은 먹이를 둔 포식자들 간의 신경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를 이어가며 쌓여버린 안 좋은 감정들.
게다가 둘 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했으니 서로를 질투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시아는 평소에 샌디를 서쪽의 걸레라는 천박한 표현으로 폄하했고 샌디 역시 이에 질세라 시아를 동쪽의 창녀라고 불렀다.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은 둘이었으니 아무리 급해도 시아가 샌디를 직접 찾아가 묻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좋아요. 우선 기다리죠.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샌디를 찾아갈 생각은 없어요.
그녀가 저에게 올바른 대답을 해 줄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그녀라고 딱히 무슨 방법이 있을 거 같지는 않네요.”
시아는 자꾸만 늘어가는 한숨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도대체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만약 계속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간다면 자신도 위원회에 연락하고 치안청에 반기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터전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치안청에 꼭 전하세요.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요.”
단호한 시아의 눈빛에 쿤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쿤이 걱정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은 치안청과 금호당이 정면충돌하면서 그 여파가 순혈 인간과 혼혈 이종족의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일이 쉽게 흘러갈 거 같지는 않았다.
컷 사인이 나자 스티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민수에게 다가왔다.
“왜? 무슨 문제 있어?”
항상 즐겁게 촬영하던 스티븐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자 민수도 가볍게 여길 수 없어서 서둘러 다가가 무슨 일인지 물었다.
“Boy. 한국 여자들은 다 저렇게 예뻐?”
다급하게 다가온 민수는 스티븐이 심각한 얼굴로 얼빠진 소리를 늘어놓자 맥 빠진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촬영 잘하다 말고.
아까 낮에 뭐라도 잘못 먹은 거야?”
“아니 아니. 솔직히 네 피앙세를 봤을 때도 엄청 예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어.
그런데 저 배우도 엄청 예쁘잖아.
나 진짜 한국에서 활동하는 걸 고민해 봐야 할 거 같아.”
“어딜 가더라도 예쁜 사람은 예쁘고 평범한 사람은 평범하겠지.
네가 말한 배우 둘은 한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예쁜 사람들이고.
할리우드에도 예쁜 배우들 많던데 무슨 황당한 소리야?”
“아무리 다른 사람들은 다 예쁘다고 한들 내 스타일이 아니면 무슨 소용이야?
솔직히 저번에 같이 영화 찍은 릴리도 할리우드에서는 손꼽히는 미인인데 내 눈엔 그저 그랬다고.”
“맙소사.”
민수는 스티븐의 말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저번에 스티븐과 같이 연기했던 릴리아나는 그야말로 금세기 최고의 섹시심벌이 아닌가.
그런 릴리아나보다 소희가 더 예쁘다니.
저 녀석은 화려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주제에 동양인에게 더 큰 매력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자들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다니.
에릭 감독이 알면 뒤통수를 부여잡고 넘어갈 일이었다.
민수는 얼빠진 스티븐에게 다가가 뒤통수에 촙을 한대 먹이고는 정신 차리라고 닦달했다.
“야. 정신 차려.
한국어도 못 하는 놈이 무슨 한국 활동이야?
그렇게 마음에 들면 차라리 그냥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면서 예쁜 동양 배우나 모델을 찾아봐.
어쩌면 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민수의 말이 타당했기 때문에 스티븐도 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연찮게 자신의 취향을 정확히 알게 된 스티븐은 열의에 찬 목소리로 굳게 다짐했다.
“좋아. 이번 영화가 중국이랑 한국에서 개봉할 때 나도 따라간다.
아니. 일본도 간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완벽하게 내 취향인 사람도 찾을 수 있겠지.”
민수는 스티븐이 작품 홍보 활동에 열을 올리는 건 좋은데 미국에서 홍보해 줘야 할 스티븐이 저러고 있자 순간 시름에 빠져들었다.
그렇다고 저걸 막을 수도 없으니 난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야. 다 좋은데 할리우드 홍보 활동도 신경 좀 써줄래?
이거 네 돈도 들어간 영화잖아.
거기서 홍보할 사람은 너뿐인데 네가 아시아에서만 돌면 어쩌겠다는 거야?”
민수가 애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스티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시 촬영을 위해 세트장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 정말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뭐… 아직 멀었으니 저러다 말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우선 에릭 감독님께 도움부터 청하고.”
민수는 저 친구가 그냥 저러다 말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촬영 중인 세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말은 저렇게 해도 자신의 친구가 그 정도 분별력은 있을 거라고 믿었다.
미국에서 홍보할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다른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후에도 여러 장면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습격과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치안청.
시아의 인내심은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특히 자신의 수하들이 하나둘씩 다쳐나갈 때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치안청장과의 무의미한 면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시아의 인내심이 결국 바닥을 찍고 말았다.
치안청장이 이종족에 대한 탄압을 막으려면 쉐도우를 잡아 오라는 개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사라진 쉐도우를 어디서 잡아 온단 말인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심지어 치안청 내에서도 쉐도우가 죽었다고 결론 내리지 않았던가.
시아도 이제는 치안청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결국 자신들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