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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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진짜 미치겠네.
저 옷 대체 뭐야?
아니, 어디서 저런 걸….”
“그러게. 굳이 저런 걸 입고 찍을 필요는 없을 텐데.”
태준의 말대로 CG 처리를 위해 전용 복장을 착용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도 저렇게 괴상한 것을 입을 필요는 없었다.
인형 옷에도 품격이 있는 것이고 민수가 보기에 저런 사족 보행 도마뱀 인형 옷은 상대를 즐겁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스태프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 데 사실 모든 복장 중에 저 옷이 가장 저렴했대.
하긴 누가 저런 걸 입겠어?
사는 사람이 없으니 가격은 저절로 내려갔을 테고.”
“그걸 우리 제작진이 날름 낚아챈 거군.
오로지 싸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야.
와 진짜. 명불허전이네.”
민수는 예전에 얼핏 돈을 아끼는 것은 찬진의 스태프들이 전국에서 손가락 안에 든다는 말을 윤 대표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저 의상도 그 노력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정말 눈물겨운 분투가 아닐 수 없었다.
다만 그 피해를 강환이 홀로 떠맡게 된 것은 좀 안타깝긴 했지만 말이다.
“저래서 얼마나 아낀다고…..”
어이없긴 하지만 제작진이 공수해 온 것은 저것뿐이었으니 배우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저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둘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민수와 태준은 오늘 하루 온몸이 기진맥진해질 정도로 뛰어다니면서 인생의 흑역사를 기록한 강환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이제 대충 곤란한 부분은 다 정리가 된 건가?”
“음…. 이따가 대폭발 장면만 찍으면 되지.
그것도 딱히 내가 고생할 것은 없네.
그 뒤로는 이제 스티비가 연기하는 장면이 이어질 테니 난 당분간은 좀 한가할 테고.”
“하긴… 이젠 내가 좀 바빠질 시간인가?
그래. 끝까지 수고해.
아, 그리고 이따가 촬영 끝나고 대화 좀 나누자고 친구.
이대로 그냥 내뺄 생각은 아니겠지?”
민수는 태준의 말을 애써 모른 척하며 바로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태준은 그 모습에 혀를 차며 촬영이 끝난 후 민수에게 무조건 확답을 받아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불안감에 몸을 떨며 민수가 설아와 연기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겨우 카야를 처치하고 가까스로 몸을 뺀 쉐도우와 샌디.
샌디는 지치고 다친 쉐도우의 몸을 겨우 지탱하며 은신처 근처까지 도망 왔다.
카야를 처리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연합하기로 했던 쿤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었으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지금은 무조건 도망부터 생각해야 했다.
“어때요? 괜찮아요?”
겨우 여유를 찾고 주저앉아 숨을 격하게 몰아쉬던 쉐도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샌디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뭐에요?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 네가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나 해서.
지금까지는 나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내거나 간지러운 입김을 불어 넣기만 했었잖아?”
“나라고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줄 알아요?
그건 그냥 종족 특성이라고요.
마음에 드는 수컷이 있으면 바로 몸으로 부딪치는 종족인데 그럼 어쩌라고요?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그래도 어느 정도 괜찮아졌나 보네요.”
툴툴거리는 샌디의 말에 쉐도우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상황을 점검했다.
샌디의 말대로 가까스로 치명상은 피했는지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진 않았다.
앞으로 며칠 정도는 정양해야겠지만 그래도 그런 괴물과 싸워 이긴 것치고는 상태가 양호했다.
“그런데 대체 그건 뭐였지?
혹시 알고 있는 건 없나?”
“글쎄요.
저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라서요.
그냥 느낌으로 아는 거라 뭐라고 설명하기도 힘들어요.
하지만 쉐도우.
당신은 날 얼마나 믿나요?”
샌디의 말에 쉐도우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샌디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냐 믿느냐라.
솔직히 쉐도우는 아직 샌디를 그렇게 믿고 있지는 않았다.
그나마 쉐도우가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에게 이 힘을 준 닥터C 정도일까?
“하. 아직 절 믿지 못하는군요.
하긴 그래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당신은 믿지 못하겠지만 당신이 가장 의심해야 할 사람은 아마 닥터C일거에요.
아까 그 키메라들… 왠지 익숙하지 않나요?
인간에게 이종족의 DNA를 이식해 강제로 힘을 깨우는 거요.”
“설마…..”
“아마 당신도 그런 과정으로 쉐도우가 된 걸 테죠?
그것들을 실패작이라면 당신은 성공작.
이래도 모르겠어요?”
“카야의 뒤에 닥터C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샌디의 이야기에 쉐도우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이 닥터C 말고 더 있을 거 같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닥터C는 왜 자신에게 유전자를 주입했고 자신이 카야를 공격하는 걸 두고 보기만 한 걸까?
“이해가 안 돼.
만약 네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닥터C는 자신의 성공작으로 자신이 만든 키메라 공장을 때려 부쉈단 말인데….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 이유가 있을까?”
“모든 데이터를 뽑아내 더 이상 필요가 없다면 그럴 지도요.
완벽한 성공작인 당신이 있으니까요.”
닥터C는 자신이 깨어난 순간 자신을 관찰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도대체 어떻게 관찰하고 있던 걸까?
만약 샌디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지금도 어디서 날 관찰하고 있는 건가?
그럼 과연 그는 나의 적인가?
샌디는 믿을 만한 사람인가? 어쩌면 그녀가 나를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쉐도우는 여러 가지 의문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우선 닥터C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차차 생각해 보지.
오늘은 이만 헤어지자고.”
우선 자리를 물리자는 쉐도우에게 샌디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경고했다.
“좋아요.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야.
하지만 조심하세요.
그리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제가 머무는 곳으로 오세요.
당신을 기다릴게요.”
쉐도우는 말을 마치고 멀어져 가는 샌디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애써 고개를 저어 생각과 고민을 떨쳐 내고는 은신처로 들어갔다.
그리고 은신처.
다친 몸을 회복하기 위해 회복실로 들어선 쉐도우는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게 되었다.
회복 캡슐에 몸을 눕히자마자 건물 내 모든 통행로가 폐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온갖 경보음이 울리면서 완전히 폐쇄된 건물.
당황하는 쉐도우의 머리 위로 갑자기 거대한 홀로그램 하나가 나타났다.
홀로그램의 주인공은 바로 이곳의 전 주인인 닥터C였다.
“쉐도우. 나의 유일한 성공작.
당신의 활약은 잘 봤습니다.
역시 쉐도우의 유전자는 대단하더군요.”
“….닥터C?”
“만약 당신이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그 쓰레기 같은 실패작들을 모조리 없애고 돌아왔단 뜻이겠죠.
정말 수고했어요.”
혼자 즐겁게 웃으며 한바탕 손뼉을 친 닥터 C는 웃음기를 거두고 계속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당신의 자아가 너무 강하더군요.
원래는 서서히 자신을 잃어가며 진작에 제 말만 듣는 꼭두각시가 되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전 과감하게 당신을 폐기처분 하기로 했어요.
아깝지만 어쩔 수 없죠.
통제도 안 되는 인형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아. 걱정 마세요. 아프지 않을 테니까요.
순식간에 폭발할 테니 고통 따위를 느낄 시간은 없을 거예요.
당신이 좋은 자료가 되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까요?
그럼 저승에서나마 행복하시길…..”
닥터C의 홀로그램이 사라지고 쉐도우가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은신처 전체에 경보음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경보. 자폭 1분 전. 경보! 경보!]
“미친….”
쉐도우는 급하게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모든 통로가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여 도저히 탈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하… 이건….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쉐도우가 당황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경고했던 1분이 지나자 마지막 자폭경보가 울리면서…..
[쾅! 펑!!]
은신처가 완전히 폭발하며 그 일대를 거대한 크레이터로 만들었다.
도시 외곽이 갑작스럽게 폭발하자 사람들은 다들 공포에 빠져들었다.
마치 자신들이 모르는 무슨 일이 더 벌어질 거 같은 그런 공포였다.
방금 찍은 장면은 영화 “Shadow Awaken” 즉 1편의 마지막에 들어갈 장면이었다.
2편이 시작하면 쉐도우가 차원을 찢고 그림자 뚫기를 시전해 옛 쉐도우들이 살던 성지로 떨어져 그곳에서 진정한 쉐도우로 레벨 업 하고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이어지게 된다.
1편의 중요한 장면들은 얼추 마무리되었고 이제 그사이에 들어갈 장면들을 촬영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자잘한 장면들을 촬영하고 남은 작업을 마무리 짓는데 걸린 시간은 한 달 남짓.
이제 겨우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한 지 두 달쯤이 지난 시기였으니 배우들의 연기 호흡이 좋아 예상보다 진행속도가 더 빨라진 것이었다.
민수가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두 달의 시간 동안 한국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특히 세트장 대화재 사건은 이제 여러 가지 방향으로 갈라져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부실시공과 날림 공사로 일관하던 여러 시공사가 무거운 법의 철퇴를 맞았다.
그리고 수사망은 그런 시공사를 방치한 주무관청의 공무원들에게까지 이어졌고 여러 곳에서 뇌물을 받은 정황이 분명한 공무원들은 자연스럽게 옷을 벗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계속 수사망이 파고 들어가자 각 당의 실세들과 고위 공직자들에게 뇌물을 건네고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받은 어떤 일당의 정체가 서서히 수면위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뇌물 수여자와 공여자를 연결해 주는 중간 관계자가 버젓이 활동하고 있었다니.
그에 연루된 공직자나 국회의원의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떠들썩했지만, 연예계는 조금 다른 방향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어디선가 이번 화재가 진룡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음모라는 찌라시가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원래 단순히 떠도는 찌라시는 한둘이 아니었고 그냥 믿는 사람만 믿는다는 게 그런 찌라시였지만 이번에는 생각보다 단순하지가 않았다.
그냥 ‘에이 말도 안 돼.’ 라고 하며 넘어갈 이야기가 여러 가지 살이 붙어 ‘어? 이거 진짜 그럴듯한데.’ 라는 정도까지 부풀어 올라와 버린 것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번 찌라시는 민 여사가 넙치를 잡아다가 심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살을 붙여 의도적으로 뿌린 찌라시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건 원래 진룡이 잘하는 하는 짓이잖아요?
예전에 민수한테도 이런 식으로 찌라시를 뿌렸었죠.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놈들이 했던 게 그냥 근거 없는 날조였다면 제가 하는 건 사실에 입각한 선동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 자업자득이죠.
만약 지금까지 행실을 바로 했으면 그냥 웃고 넘어갈 농담이 되는 거였으니까요.”
민 여사가 배포한 루머는 생각보다 더 위력적이었다.
그 대상이 일반 대중들이 아니라 이쪽 관계자였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다.
그들은 진룡이 최근에 어떤 식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지, 자신들을 거스르는 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 여사의 말대로 다 진룡의 자업자득이었는데 문제는 대부분의 관계자가 진룡이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장 대놓고 진룡에게 뭐라고 하는 곳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뒤에서 진룡을 백안시하는 움직임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그 화재가 자신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진룡으로서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거기다가 진룡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민수의 드라마가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자신들의 드라마가 참패를 거듭하고 있다는 거였다.
민수의 “달빛 연인”이 뒤집어지면서 KBC는 그 시간대에 새로운 드라마를 방송하게 되었는데 그 드라마의 제목은 “Gate And Money”
지금 한창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이 사태를 정확히 저격하는 드라마였다.
끝없이 튀어나오는 비리들 때문인지 대쪽 같은 검사가 부패한 공무원과 국회의원 등을 시원하게 응징하는 내용의 이 드라마는 지금 국민적인 사랑을 받으며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드라마가 제작되기 시작한 시기에는 아직 그런 조짐이 거의 없었으니 작가나 피디가 정말 운 좋게 시기를 잘 만난 것이었다.
진룡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불운이었다.
드라마에서까지 참패를 겪은 진룡은 이제 마지막 희망인 “에이전트 K”가 흥행하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미디어 사업 쪽에서는 계속되는 루머로 입지가 좁아졌고 기대했던 드라마는 불의의 타격을 받아 죽을 쑤고 있었으니 결국 세트장 화재 사건이 진룡을 어둠의 구렁텅이로 몰아 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