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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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은 웃으면서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재미있겠다 싶었는지 민수에게 슬쩍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이거 내가 말해줬다고 하면 안 된다?
사실 저게 그 동영상 보고 벤치마킹한 거거든.
그러니까 대답 못 하고 줄행랑친 거야.”
“동영상? 무슨….”
“에이. 답답한 녀석아. 그 왜 있잖아. 엄청 야한 여자들만 나오는 응응 동영상.
저거 연습하려고 아주 초 단위로 분석하면서 봤거든. 설아가.
킥킥. 그때 생각하니까 또 웃기네.
우리 설아가 연기에 그렇게 열정적이야.”
태준의 말에 민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성인인 설아가 그런 영상을 보고 연습했다는 데 자신이 뭐라고 트집 잡을 권리는 없었지만, 기분이 좀 묘하긴 했다.
“…. 설마 네가 가지고 있던 거로 연습한 건 아니겠지?”
민수의 말에 태준은 큰일 날 소리 한다는 듯 펄펄 뛰었다.
“어허! 그 무슨 망측한 소리야?
나한테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그런 건 소싯적에나 잠시 관심을 가지다 성인이 되면 바로 졸업하는 거라고.
야. 그리고 내 취향은 금발이라 설아가 공부하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아.”
묘하게 핀트가 어긋한 말이었지만 민수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준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우리 윤 배우.
그런데 만약 설아가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네가 얘기해 준 거라고 딱 알 텐데.
이거 괜찮은 거야?”
민수의 말에 태준이 움찔했다.
집안에서 있었던 일을 민수가 알고 있다면 그건 무조건 자신이 범인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 괴수가 자신을 결코 용서할 리 없었다.
요즘은 좀 덜해졌다지만 민수와 연결된 일에는 가차 없는 설아였으니까.
자신의 무덤을 팠다는 생각에 아차 한 태준은 바로 민수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야야. 이럴 거야? 비밀 지켜주기로 했잖아.
남자가 말이야. 한입에서 두말하기 있냐?”
태준의 다급한 외침에도 민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언제 자네가 말해줬다고 한데?
그냥 넌지시 그랬다면서요? 그냥 들리는 말이 그렇다고요. 이 정도만 할 건데.”
“와…. 그게 그 말이지. 이 사람 이거 안 되겠구만.
사람이 말이야. 그럴 수도…. 있죠. 네네.
저 민수님 혹시 필요한 거 없으신가요? 하하.
아이고 여기에 먼지가….
저 죄송한데 참 그것만은 어떻게 안 될까요?”
자존심이고 뭐고 우선 위기를 모면해 보겠다는 태준의 태세전환.
그 모습이 너무 어이없어서 민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실 웃고 있었다.
참 유쾌한 친구라니까.
민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별다른 대꾸 없이 바로 촬영장으로 향했다.
태준은 그런 민수에게 애타게 외치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그저 대답 없는 메아리로 흩어질 뿐이었다.
“와. 괜히 말했네. 설마 진짜 그러는 건 아니겠지?
허허. 내가 범을 키웠어. 범을….
야! 정민수! 너 진짜 그러지 마라!”
태준 덕분에 잠시 즐거웠던 민수는 이제 오늘의 가장 중요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세트장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블랙 위자드의 수비진을 돌파한 쉐도우, 쿤. 그리고 샌디가 카야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블랙 리자드의 본부를 공격한 쉐도우는 그곳에서 온갖 생체 실험이 자행되었다는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체포하러 온 쿤과 전투를 벌이다가 블랙 리자드가 제작한 생체 키메라들의 거센 공격을 받게 된다.
서로에게 공격을 퍼붓던 쿤과 쉐도우는 상황이 급박하게 변하면서 어쩔 수 없이 연수합격 해 키메라를 물리치게 되었다.
쿤도 생체 키메라를 보고는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같이 키메라를 모두 해치운 둘은 마지막으로 카야를 제거할 때까지만 불안정한 동맹을 계속 유지하기로 하고 카야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지금 블랙 리자드 본부 가장 깊숙한 곳에서 카야를 발견하게 되었다.
“저기에요. 저기 있을 거예요.
이곳이 기억나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상대는….. 이미 인간이 아니니까요.”
샌디는 무슨 끔찍한 것을 본 거처럼 파리한 안색으로 쉐도우에게 경고했다.
이미 미로 같은 이 지하 광장을 돌파하며 샌디의 위력을 실감한 쿤도 조금 불안한 얼굴로 쉐도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차피 적으로 만난 쿤에게 쉐도우가 좋은 말을 건넬 리가 없었다.
“뭘 봐. 늑대 친구. 빨리 들어가서 놈을 곤죽 내고 우리는 다시 찢어지자고.
나 원 참. 내가 보안관이랑 같은 배를 타게 될 줄이야….”
퉁명스러운 쉐도우의 말에 쿤도 인상을 쓰며 맞받아쳤다.
“나도 마찬가지다 범죄자.
동맹은 오늘뿐이야.
내일부터 다시 네놈의 숨통을 끊으러 달려올 테니까 목이나 잘 닦고 기다려라.”
“워~ 이 늑대 친구 이거. 완전….
체포도 아니고 숨통을 끊는다고? 아까는 얌전히 체포당하라고 하지 않았냐?”
“그건 네놈이 이렇게 흉악한 놈이라는 걸 몰랐을 때지.
네놈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은 위험한 놈이야.
이 사회를 위해서 없어져 줘야겠어.”
“미친….
뭐 좋아. 좋을 대로 하라고.
하지만 왜 이 도시에 이딴 놈들이 활개 치고 돌아다니는지도 생각해 보는 게 좋을걸?
이 도시의 진정한 악당이 누군지 잘 생각해봐.”
쉐도우의 말에 쿤도 느껴지는 바가 있었는지 움찔하고는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도 자신에게 내려진 지시를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항상 본부의 지시를 최우선으로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아…. 다가오네요. 거대한 무언가가….”
샌디가 공포에 떨고 있는 사이 문이 열리고 카야가 걸어 나왔다.
무슨 일인지 온몸의 혈관이 꿈틀거리고 눈동자는 광기에 물들어 있었지만 샌디가 두려워했던 것만큼 특별한 모습은 아니었다.
“뭐….. 별거 아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쉐도우가 카야의 꼬리에 맞고 뒤로 튕겨 나갔다.
갑작스럽게 솟아난 꼬리.
그리고 온몸에서 비늘이 돋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번들거리는 불은 눈동자.
온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검은 비늘.
지금 카야의 모습은 이족 보행 하는 거대한 도마뱀 같았다.
저것은 구전에만 남아있던 순종 리자드맨의 모습이었다.
리자드맨은 이름처럼 단순한 도마뱀 인간이 아니었다.
단단한 비늘은 일반적인 총알이나 칼날에 모두 면역이었고 온몸이 무기인, 그야말로 오랫동안 최상위 포식자의 자리를 지켜낸 난폭한 전사였다.
쉐도우가 일격을 맞고 튕겨 나가자 쿤은 본능적으로 전투 모드에 들어가 카야에게 달려들었다.
상반신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고 온몸에는 금빛 털로 뒤덮였다.
강력한 숄더 터치 후 바로 상대를 완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짓눌렀지만 놀랍게도 카야는 그런 쿤의 엄청난 힘을 그래도 맞받아치고 있었다.
쿤이 서서히 밀리고 있는 가운데 카야의 그림자에서 갑자기 쉐도우가 튀어나왔다.
쉐도우의 특기인 그림자 뚫기였다.
“죽어라! 이 미친 도마뱀아!
갑작스러운 공격에 카야가 움찔했으나 당장 쿤을 뿌리치기는 무리였다.
그리고 쉐도우의 그림자 칼날이 카야의 후두부를 찢고 지나가자 카야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크악! 캬!캭!”
갑작스런 광란의 몸부림에 얻어맞고 튕겨 나간 둘은 겨우 호흡을 고르며 카야에게 다시 접근해 들어갔다.
생각보다 강력한 카야의 힘을 실감하고는 한껏 주의를 기울이면 슬금슬금 그렇게 접근하고 있었다.
“치명타가 아니었어. 늑대 친구.
저놈의 비늘이 생각보다 더 단단해.”
“완력으로는 제압하기 힘들다.
순수한 완력은 나를 능가하고 있으니까.”
둘은 서로의 의견을 모으면서 천천히 카야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렇게 잠시 대치 상태가 이어지자 고통과 분노로 이성을 잃은 카야가 먼저 쉐도우에게 달려들었다.
완력으로는 상대가 안 되었지만 쉐도우의 주특기는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쉐도우는 카야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계속 피하면서 대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두 팔과 발 이외에도 쉐도우가 처음 상대하는 꼬리가 있었다.
“큭!”
쉐도우는 간간이 날라오는 꼬리 공격 때문에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하지만 카야의 상대는 쉐도우 하나가 아니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쿤이 다시 카야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난 이놈에게 치명타를 먹을 수 없어.
내가 이놈을 견제하는 동안 네가 공격해야 해.”
“좋아. 늑대 친구 몇 초만 기다리라고.”
잠시 행동의 자유를 얻은 쉐도우는 온몸을 그림자로 두른 채 천장을 향해 그림자 줄을 쏘았다.
그리고 그 줄을 타고 위로 쭉 올라간 후 자신의 그림자를 모두 끌어 모아 거대한 창을 뽑아냈다.
천장에 매달린 채 카야를 조준한 쉐도우는 바로 몸을 날려 카야에게 창을 내질렀다.
카야와 한 덩어리가 되어 몸싸움하던 쿤은 쉐도우가 몸을 날리자 그 시간에 맞춰 자신도 몸을 뒤로 날렸다
“카!!!앆!”
이성을 잃고 본능으로만 움직여서일까?
카야는 갑자기 공중에서 강습한 쉐도우의 창끝을 피하지 못했다.
몸 전체를 그림자의 창에 꿰뚫린 카야는 단말마를 지르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헉. 헉. 끝인가?”
쉐도우는 쿤이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 한마디에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저런 대사가 끝난 후에는 당연히 상대가 부활하는 것이 그다음 수순이 아니 던가.
하지만 그건 소설 속에나 있는 일이라고 자위하며 쿤에게 다가가는 찰나.
“크크크큭크큭.”
쓰러져 있단 카야의 몸이 흔들리며 이상한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와. 시바. 진짜냐?”
“응? 뭐?”
“당장 피해!”
쉐도우는 지쳐서 멍하니 있던 쿤을 뒤로 밀치며 몸을 날렸다.
그리고 뒤이어 갑자기 거대하게 부푼 카야의 발이 쿤이 있던 자리를 짓밟고 일어섰다.
“맙소사…..”
쉐도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카야의 몸집이 수십 배로 부풀어 올라 사족 보행하며 쉐도우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게 뭐지?
드래곤?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날개가 없잖아?”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쿤도 지금은 적지 않게 당황했는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거대 도마뱀.
저걸 다른 말로 어떻게 표현하겠어?
하… 이런 식으로 Phase 2라고?”
쉐도우도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카야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대한 도마뱀이었다.
꼬리에 한 번이라도 잘못 맞으면 그야말로 온몸이 산산이 조각날 거 같은 거대하고 강력한.
정말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저 앞에 괴물이 자신만 노리고 있으니 싸우긴 싸워야 했다.
“가슴에 역린이 있어요.
가슴을 노리세요!”
지금껏 뒤에서 추이를 지켜보던 샌디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쉐도우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말이 가슴이지 사족보행 하는 거대 도마뱀의 가슴을 노리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크아아!”
괴성을 지르며 돌진하는 카야와 피하는 쉐도우.
카야가 부딪친 벽 한쪽이 사정없이 무너져 내린다.
정말 놀라운 힘이었다.
쉐도우는 계속 이어지는 카야의 돌진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쉐도우가 줄을 쏘아대며 날렵하게 튀어 나가는 곳마다 어김없이 카야의 거대한 몸체가 부딪쳐 주변을 산산조각내고 있었다.
물론 영화에선 이런 식으로 긴박하고 박력 있게 연출이 될 테지만 촬영장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몸에 거대한 CG 처리용 인형 옷을 입은 강환이 뒤뚱거리면서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온통 연두색으로 물들어 있는 이 인형 옷은 무려 사족 보행 도마뱀 인형 옷이었다.
결국 이 옷을 입고 강환이 네발로 뛰어다녀야 한다는 것.
강환은 이 인형을 보자마자 황당하다는 얼굴로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보였지만 거대 리자드의 육중한 무게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감독의 설득에 울며 겨자 먹기로 입을 수밖에 없었다.
“와 저거…. 진짜 웃기네.
푸하하. 삼촌이 개고생 하시는 구만.”
민수가 진지하게 인형 옷을 입은 우스꽝스러운 강환에게 피해 다니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태준은 뒤뚱거리는 강환의 모습에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저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급박한 표정을 지으며 급하게 몸을 던지는 민수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한동안 추격전이 이어지더니 강환이 무언가에 걸려 뒤로 완전히 넘어졌다.
쉐도우가 카야를 유인해 몸을 뒤집은 후에 거대한 칼날을 쑤셔 박는 마지막 장면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렇게 촬영이 모두 마치자 강환은 무거운 인형 옷을 집어 던지고는 자신에게 물을 건네는 태준에게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와. 내가 진짜. 연기 인생이 거의 20년인데 이런 걸 입고 연기해 보기는 또 처음이네.
대체 저건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내가 나중에 영화 보고 이 장면이 제대로 안 나오면 감독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 강환이에게 이런 걸 입혀? 아우 진짜 성질 많이 죽었다.”
“에이. 삼촌 진짜 멋졌어요.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 되지 않을까요?
캬~ 역시 강환이라니까.”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강환에게 태준이 웃으며 멋졌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저게 그냥 투덜거리는 말뿐이란 걸 모르는 배우는 아무도 없었다.
강환은 윤 엔터의 공식적인 투 머치 토커(Too much Talker)였으니까 말이다.
마찬가지로 연기에 집중하느라 온몸이 진을 다 뺀 민수도 강환에게 다가와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강환도 자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NG도 없이 훌륭하게 연기한 민수에게 칭찬의 말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NG라도 몇 번 났으면 자신은 정말 몸살이 났을지도 몰랐다.
“아! 스티븐도 수고했다고 전해줘.
NG 안 내줘서 고맙다고!
와 진짜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나 먼저 들어갈게.”
오늘 열연을 펼치며 지친 강환이 가장먼저 촬영장을 떠났다.
민수는 그런 강환의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 강환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촬영 때문에 겨우 참아왔던 웃음이 뒤늦게 터져 버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