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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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일정은 바빴지만 그래도 틈틈이 휴일은 있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찾아온 휴일.
오늘은 무슨 일인지 모든 배우가 민수를 찾아왔다.
“오. 민수 형님이 그렇게 요리를 잘한 다면서요?”
“죽여주지. 정말 끝내줬다니까.
솔직히 웬만한 레스토랑은 민수한테 상대도 안 돼.”
그렇다.
저번 영화를 촬영할 때 민수에게 스테이크를 얻어먹은 스티븐이 다른 배우들에게 자랑한 것이었다.
결국 배우들은 호기심 깃든 얼굴로 민수에게 찾아와 요리를 부탁하고 있었다.
“거! 우리가 남이가!? 정 쉐프. 날래날래 움직이라우!”
심지어 태준은 뻔뻔하기까지 했다.
우리가 남이냐고 우기는 태준의 모습에 민수는 실소를 머금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자신의 지인들에게 훌륭한 음식을 대접한다.
애당초 이런 목적으로 요리를 배운 것이니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해 볼 생각이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특별한 메뉴를 준비할 수는 없었고 그냥 무난하게 스테이크와 스파게티, 그리고 샐러드를 준비하기로 했다.
배우들은 민수가 요리하는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체 능력이 우월한 민수가 적절한 경험과 감각까지 익혔으니 그 몸놀림이 예사로울 리가.
여러 가지 음식을 한꺼번에 조리하는 민수의 현란한 모습은 웬만한 전문가 못지않았다.
가장 먼저 나온 두 접시의 스테이크의 주인은 스티븐과 설아가 되었다.
남은 요리의 조리도 거의 끝나가고 있어 이제 바로바로 음식이 나올 거라 별 의미는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나름 큰 의미가 있었는지 리온이 두 번째 접시를 바로 설아에게 내밀었던 것이다.
“자자. 형수님이 두 번째. 레이디 퍼스트라고 하죠?”
대뜸 설아를 형수라고 부르는 리온의 모습에 민수는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 웃고 있었다.
“에… 그런 거였어요? 와. 난 전혀 몰랐는데.
아아. 그래서 그렇게 철벽을….”
소속사에 들어온 지 오래되지 않았고 회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은우는 민수와 설아의 연애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어? 설마 이거 비밀인 건 아니죠?
에이. 형님 걱정 마세요.
제가 이 바닥에서 또 유명한 자물쇠 아닙니까?
다른 곳에서 제 입이 열릴 리가 없다니까요.”
조금 당황한 듯한 민수의 낌새를 눈치챈 리온은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자신이 자물쇠라고 자랑하는 리온의 말에 민수도 피식 웃으며 부디 그래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 난 상관없는데 아직 설아가 어리기도 하고 사람들 눈도 좀 부담스럽긴 해서.
그러니 다른 곳에 이야기하면 안 된다?”
“헤헤.”
설아는 민수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을 애인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자 흐뭇한 눈으로 민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민수와 설아의 은근한 아이 컨택.
하지만 이런 장면을 태준이 그냥 보고만 넘어갈 리가 없었다.
“거기 한 쌍의 바퀴 님들.
애정 표현은 두 분이 있을 때 하시고요.
정 쉐프 뭐하나. 음식 식겠어.”
민수는 초를 치며 타박하는 태준의 말과 자신의 입에 지퍼를 다는 모션을 취하는 리온의 행동에 웃음 지으며 주방으로 돌아가 다른 음식을 날라오기 시작했다.
민수가 사라지고 태준은 재빨리 설아의 동정을 살폈다.
평소였으면 바로 응징에 들어왔을 자신의 동생도 다른 배우들의 이목을 생각해서인지 얌전을 떨며 다소곳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자자. 준비한 것은 별로 없지만, 많이들 들어요.”
태준은 민수가 음식을 다 내오자 자신이 대접한 것인 양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이 여간 익살맞은 것이 아니라 배우들도 실소를 머금으며 태준에게 감사했다.
“잘 먹을게요.”
“오 친구. 좋아. 큭큭.”
민수도 웃으며 배우들과 함께 수저를 들었다.
그렇게 모두에게 만족스럽고 즐거운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젊은 배우들은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배우들이 모인 것이다 보니 그 주제가 연기나 그에 관련된 것으로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중견 배우가 강환 선생님뿐이네.
이것도 참 드문 일인데.
그래서 이렇게 편했구나.”
태준이 포문을 열자 다른 배우들도 너나없이 이야기를 보태기 시작했다.
“강환 선생님이 이제 곧 합류하시죠? 그분 성격은 어떠세요?”
가수로 활동하면서도 평소에 연기에 관심이 많았던 리온은 대학로에서 유명한 강환을 이미 알고 있었다.
브라운관이나 극장가에서는 거의 활동하지 않았던 강환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연기에 대한 리온의 관심이 얼마나 깊은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오. 우리 필수는 강환 삼촌도 알아?
젊은 애들은 잘 모를 텐데.
우리 소속사 발성 선생님인데 성격 좋으시지.
뒷끝도 전혀 없고.”
자기도 젊은 녀석인 주제에 참 말은 잘한다.
극단을 맡고 있는 강환은 이번 주에 촬영장에 합류하게 되었다.
극단에 조금 문제가 생겼다는데 그걸 해결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 것이었다.
강환이 목숨처럼 아끼는 극단이라 다른 배우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 강환이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도 결국 극단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극단의 운영자금에 문제가 생긴 것.
자신의 생계가 아니라 극단의 생계 때문이지만 어쨌든 이번에는 강환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영화에 참여한 생계형 배우였다.
민수는 다만 도대체 연기도 잘하는 극단 “뿌리”가 왜 예술의 전당 공연만 가면 그렇게 죽을 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예술의 전당에 무슨 마가 낀 게 아닐까 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어쨌든 유일한 중년 배우이자 대 선배인 강환의 성격이 좋다는 말에 리온은 적지 않게 안심한 모양이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까다로운 어른이 계신 촬영장은 분위기가 아주….”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는 리온의 모습에 태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말이야 바른말이지.
솔직히 이 정도로 화기애애한 촬영장이 드물긴 해.
감독님도 별로 까다롭지 않고 성격 안 좋은 선배들도 없으니까.
캬~ 지금까지 우리 정 배우가 이런 곳에서만 촬영했단 말이야.
온실 속 화초 같은 우리 정 배우가 나중에 다른 곳에서 촬영하면 어쩔까 몰라.”
자신에게 화초 같다고 말하는 태준의 모습에 민수는 실소가 절로 지어졌지만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저번 생에서야 별의별 거지 같은 꼴을 많이 봤지만 이번에는 편하게만 촬영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첫 드라마를 제외하고 자신이 찍은 작품들은 거의 자신을 우대해 주는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첫 드라마부터 주연으로 승승장구했던 태준이 그런 말을 하니 조금 재미있긴 했다.
태준이야말로 진정한 꽃길을 걸어온 배우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도 리온은 태준의 말에 흥미가 돌았는지 호기심 서린 눈빛으로 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 아무래도 전 아이돌 출신이다 보니 특별히 배우 선배들이랑 충돌할 일은 별로 없었거든요.
백안시하는 경우는 있어도 굳이 저한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후배들한테 뭐라고 하는 선배들이 많은가요?”
“사람마다 성격은 제각각이니까.
보자. 기억에 남는 선배가…..
아. 진태명 선배.
그 선배는… 뭐라고 해야 하나?”
태준이 이제 중년에 접어들기 시작한 진태명의 이야기를 꺼냈다.
진태명은 민수도 기억하고 있던 배우였다.
전생에서는 촬영장에서 본 기억도 있었다.
민수의 기억 속에 그는 보조출연자들한테도 친절하게 대해주는 좋은 배우였다.
“그러니까 그 선배는 뭐라고 해야 할까?
스태프들이나 엑스트라들에게는 정말 친절하거든.
그런데 후배 배우들한테는 얼마나 악랄한지.
내가 아주 학을 뗐다니까.”
이어지는 태준의 말에 민수는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 좋아 보이는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니.
“그런 배우들이 있지.
자신의 라이벌이 될 후배 배우들은 싹을 밟아 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배우들.
드문 경우는 아니야. 나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맞아. 내가 두 번째 주연으로 들어갔을 때 그 선배가 나랑 공동 주연이었는데.
아주 잡아 먹으려고 하더라고.
배우들 기죽이는 게 여배우들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라는 거지.
은우도 이런 경험 있지 않아?”
“음… 저번에 창민 선배처럼 대놓고 얼굴만 믿고 나대지 말라는 건 차라리 약과죠.
은근히 뒤에서 이간질하거나 스태프들에게 알게 모르게 험담하고.
그런 식으로 악질적인 선배들이 좀 있긴 했어요.”
민수도 배우들의 이야기에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자신이 단역을 전전하며 전해 듣거나 경험한 것들이 배우들이 직접 경험하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위치가 다르니 경험하는 것들도 전혀 다른 것이리라.
진태명도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일이 없는 보조 출연자에게는 친절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때 자신이 제법 비중이 있는 조연이라도 됐으면 진태명의 참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민수는 문득 자신이 전생에 경험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허구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치가 바뀌었으니 그에 맞는 새로운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거의 지인들로만 구성된 환경에서 주로 연기해 왔던 자신의 경험은 다양한 작품을 연기했던 배우들에 비하면 부족한 면이 있었다.
물론 전생의 경험으로 그들보다 우월한 면도 분명히 있지만 말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태준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감독들은 또 어떻고.
이 바닥에 완고한 사람들이 정말 많은 거 같아.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고.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바꿀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냥 밀어붙이기만 해.
그런 곳에 비하면 확실히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지.”
배우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태원은 그런 면에서는 정말 열린 감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러 작품을 같이 할 동안 항상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도 태원은 씬이 끝날 때마다 항상 배우들이랑 같이 모니터링하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곤 했다.
“할리우드도 사람 사는 곳이니 이곳과 다르진 않지.
다만 좀 더 삭막하다고 할까?
거기 기 싸움은 여기랑은 좀 달라.
조연이나 단역 배우가 실수로 주연 배우의 심기를 거슬리면 여기서는 자존심 상하게 하기도 하고 그런다며?
될성부른 조연을 기죽이기도 하고.
거긴 그런 건 없어.
그냥 웃으며 인사하고 그다음 날 바로 계약 해지서가 날라올 뿐이지.
힘 있는 주연이 싫다고 하는 순간 웬만한 인물들은 그냥 파리목숨에 불과하거든.
뭐, 그 업보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기도 하지만 말이야.”
“헤… 살벌한 동네네요.”
“주연도 마찬가지.
서로 마음에 안 들어 으르렁거리면 결국 한 사람이 떠나는 경우가 많아.
그 상황까지 가면 그때는 누가 더 힘이 있느냐의 싸움이지.
여기서는 좀 마음에 안 든다고 서로 싸워 상대를 하차까지 시키는 경우는 없잖아?
그쪽에서도 드문 일이긴 하지만 전혀 없는 일은 아니지.
신인 시절 그런 일 때문에 은퇴할 때까지 앙숙이었던 배우들도 있었다는군.
난 단역으로 주로 보냈고, 감독님이 날 워낙 아껴서 그런 일이 없었지만 소문은 그렇더라고.”
아무래도 자본주의적인 마인드가 가장 두드러지는 할리우드다 보니 한국보다는 칼 같은 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주연간의 기 싸움이나 다툼이야 그렇다 치지만 조연이나 단역을 갈아치우는 건 아마 인식이나 마인드의 차이가 아닐까 싶었다.
한국에서 단역 같은 경우 웬만큼 연기가 엉성하지 않은 이상 주연 배우가 바꿔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 배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감독이나 조연출이 그 단역을 바꾸긴 할 것이다.
다만 뒤에서 그 배우를 몰인정하다고 하거나 성격이 별로라고 말하겠지.
그건 바꿔주긴 하지만 주연 배우가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를 스태프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웬만큼 개차반이 아니면 배우들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 것이고.
하지만 스티븐의 말을 들어보니 그쪽에서는 그렇게 단역이 바뀌는 것을 스태프들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단역 하나가 주연의 심기를 어지럽혀서 영화나 드라마에 악영향을 주는 것보다 그냥 그걸 바꾸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다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서로 생각하는 게 조금 다른 건 분명해 보였다.
“하여간 여기나 거기나 문제가 많은 건 마찬가지네요.
하긴 아이돌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문제가 많으니까요.
으아…. 그러고 보니 이제 다음 주부터는 또 본격적으로 액션 연기가 계속 이어지겠네요.
우리 액션 배우님들이 또 수고가 많으시겠어요.”
“그러게. 참 수고가 많겠어.
정 배우. 스티븐. 수고 좀 하라고.
아. 은우도 마찬가지.”
앞으로도 계속 수고하라는 얄미운 태준의 말에 민수와 액션 배우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이야 액션 연기가 거의 없지만 태준도 2편에서는 본격적으로 액션 연기에 나서야 했다.
민수는 그날을 기대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